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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Jan 03. 2023

공부가 즐겁다고?

자기 주도 학습? 자기 주도 인생!

얼마 전, 기말고사를 며칠 앞둔 딸아이의 책상 스탠드에 자그마한 쪽지가 붙어있었다. 이제 중학교 2학년인 녀석이, 시험공부를 한다며 밤늦도록 책상 앞에 앉아 문제집에 머리를 파묻고 있을 때만 해도 “역시 딸내미라서 그런지 야무진 구석이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책상 앞 스탠드 모서리에 붙은 그 쪽지를 보고, 나는 잠시 낯선 이의 방에 들어온 듯 묘한 기분을 느꼈다. 파란색 포스트잇 쪽지에는 ”즐겁다 ^^“라고 적혀 있었다.


짧은 순간, 대견함과 서운함, 그리고 알 수 없는 여러 조각의 감정들이 교차했다. 어느새 아이가 이 정도로 커버렸구나. 노는 것, 노래 부르는 것, 그림 그리는 것 그렇게 좋아하던 꼬맹이가, 어느새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 가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나이가 되었다니.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른다 싶어 살짝 슬펐다. 그렇게 책과 시험지로 어질러진 아이의 책상을 뒤로하며 방을 나서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걸 자기 주도 학습이라고 하던가?"




몇 년 전, 퇴근길이 같은 방향인 직장 동료와 지하철을 타고 가며 자녀 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 교육을 위해 소위 명문 학군에 살아야 하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왜냐하면, 인기 학군과는 거리가 먼 동네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나의 주변에도, 고액 과외나 부모의 강요 없이 공부만 잘했던 친구들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위 “좋은 학군“에서 나고 자라 명문대를 졸업한 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좋은 학교의 졸업장을 거머쥐었지만, 그는 스스로를 매우 평범한 사람으로 여겼다. 학창 시절에도 공부를 열심히 하는 편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보내는 학원에 다니고,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어울리고, 가끔 땡땡이도 치고 숙제도 빼먹었지만 무난하게 그 무리의 행동반경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뿐이었다고. 하나같이 비슷한 수준의 명문 대학에 진학하게 된 친구들을 떠올리며, 그는 이 모든 것이 바로 “좋은 학군“에서 자란 덕분이라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부모가, 학원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명문대에 진학하게 되었다는 그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저 “그래서 학군 좋은 곳에 살아야 하는군!”하며 납득해야 하는지. (물론, 좋은 교육 환경을 누가 마다 하겠는가?) 하지만, 명문대 졸업을 앞둔 많은 청년들 중에는 정작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왜 그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떠밀리듯 취업 시장으로 향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도 명백한 현실이다. 이 모범생들이 어떻게 해야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까지도 “명문 학군”에 있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이것은 명문대 진학의 비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밤이 늦도록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딸아이는, 아직은 몇 달을 주기로 장래 희망이 바뀌는 녀석이지만, 지금 제 인생에 주어진 “공부”라는 난제를 자기 주도적으로 풀어나가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나는 기쁘다. 나중에 커서 무엇이 되려나. 회사원도 좋고 전문직도 좋다. (어릴 적 꿈이었던 탐정도 좋고)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떠밀리듯 받아 든 선택지가 아니길, 지금처럼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열심히 뛰어 다다른 목적지이길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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