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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서 Jan 14. 2021

평가의 민족

불편한 일상


우리나라는 평가의 민족이다.

   최근 배달의 민족 앱을 통해 배달음식을 시키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배달의 민족 앱 내에서 배달원을 평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이 평가 시스템을 보고난 후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 켠이 불편해졌다. 물론 배달원을 평가함으로써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은 '고객'인 나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렇다면 왜 불편한 감정을 느꼈을까?


우리나라는 평가의 민족이다. 얼평(얼굴평가)부터 시작해서 스펙 평가, 성적평가, 영화 평가, 식당 평가, 상품 평가 등 온갖 것에 평가한다. 심지어 평가와 관련된 검색을 하다 보면 모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자기 인생을 평가해 달라는 글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타인의 평가를 일종의 '지표'로서 활용한다.


이런 평가의 역사는 우리의 의식 깊숙이 박혀있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집요한 집착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렇게 지나친 타인에 대한 의식과 평가는 우리의 삶을 피곤하게 한다. 회사에서는 진급을 위해 '인사평가'에 목매달고, 밖에서는 친구나 타인에게 '좋은 평가', 호감을 사기 위해 이미지 관리를 한다. 


사회는 점점 나 자신이 온전하게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시간을 줄어들게 하고 있다. 가족, 친구, 지인 등 최소한의 안전거리 내에서도 평가하기 시작한다. '누구는 어디 취업했다더라', '걔 성격 좀 이상하지 않냐?','누구는 벌써 결혼했다더라'. 평가의 영역이 확대되기 시작하면서 내가 온전히 나로서 있을 공간은 줄어든다. 이렇게 살다 보면 점점 내가 사는 모습이 나의 온전한 모습인지, 타인이 바라는 모습인지 아니면 그렇게 평가 관리를 하는 '나' 조차도 내 진짜 모습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러한 평가의 문제는, 우리들의 상황이 안좋아질 때 심화된다. 사회는 누군가를 '실패자' 혹은 '낙오자'라고 평가하며 손가락질 한다. 이런 사회는 우리에게 '실패하면 안된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라는 관념을 심어주고 개개인의 자유로운 삶의 영역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배달의 민족에서 배달원에 대한 평가를 한다고 했을 때 불편한 감정을 느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평가는 주관적이다. 배달원에게 있어서 배달을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 지표는 배달 시간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에 나갔다가 잠시 추워서 얼굴을 찌푸린 배달원의 미소를 평가한다. 도대체 배달원이 배달만 잘하면 됐지 그 이상의 어떤 친절을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일까? 각 개인이 가진 미소의 기준에 맡겨 배달원 친절의 정도를 평가하겠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불과 몇 초밖에 안 본 배달원을 평가하고 별점을 매기지만 그들에게는 생존이며 생계와 직결된 문제일 수도 있다.





나 역시도 어렸을 적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친한 친구들 몇 명에게 "너희들이 보기에 난 어떤 사람이야?", "나 어때? 난 괜찮은 사람이야?"하고 질문했던 적이 있다.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나에게 "너는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따듯한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너는 누군가에게 평가받을 필요 없어"라고 말해주고 싶다.


우리는 조금 더 타인에 대한 평가에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평가가 필요없는 영역은 줄여나가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온전히 우리로서 살아갈 수 있는 영역이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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