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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서 Jan 23. 2021

라떼는 말이야

기억의 파편


   ‘커피’ 하면 달콤함이 생각나는가? 씁쓸함이 먼저 생각나는가?

요즘 사람들은 ‘커피’라고 하면 라떼부터 시작해서 카푸치노까지 달콤한 커피를 먼저 떠올린다. 그런데 달콤한 커피는 나에겐 이상한 일이다. 커피를 처음 접했을 무렵, 나에게 커피는 오직 ‘커피믹스’였다.


물론 그마저도 맛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렸을 적 엄마는 종종 내 머리가 헝클어져 지저분해 보일 즈음, 나를 미용실에 데려갔다. 그리고는 미용실 의자에 앉아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잡지를 휙 휙 넘기면서 커피를 홀짝홀짝 들이켜고 내 미용이 끝나길 기다렸다. 나는 그 커피 맛이 궁금해졌다. 향은 구수하면서도 색도 그럴듯해 보이는 게 제법 맛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집에 다 마시고 식어 잔에 남아있던 커피를 한 번 마셔보겠다며 호기롭게 커피를 들이고서는, 바로 싱크대로 달려가 뱉으며 “웩... 이렇게 쓴 걸 어떻게 마셔”라고 불평했다. 엄마는 “네가 아직 어려서 커피 맛을 몰라서 그래”라고 말하며 어른이 되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어린 시절 커피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의 맛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커피와 나는 인연이 없었다. 커피 맛이 변했던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한참 영화에 빠져 살던 나는, 배우들이 화면에서 종종 커피를 홀짝거리는 것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좋아했던 나는 그 풍류를, 그 멋을 즐기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 있던 커피믹스를 종종 밥 먹고 난 뒤 후식으로 타 마시곤 했다. 때마침 엄마는 커피믹스에 에이스 비스킷을 찍어서 먹었고, 나도 덩달아 그 맛에 빠져서 즐겨 먹게 됐다. 그렇게 커피는 나에게 달콤함이 됐다.


그런 달콤했던 커피 맛을 다시 변하게 했던 일이 있었다. 나는 당시 친구 소개를 받고 한 여자와 카페에 갔었다. 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시켰고 그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그녀는 너무 뜨거우니 적당히 식혀 마시라며 자기 컵에 있던 얼음 몇 개를 뜨거운 커피에 올려줬다. 지금 생각해보면 체하지 말라며 버드나무 잎을 띄어주는 왕건과 유 씨 부인도 아니고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나는 그녀의 그런 배려에 반했다. 안타깝게도 성급했던 어렸을 적 나는 커피도, 사랑도 몰랐다. 그렇게 커피와 나는 한동안 소원해졌다.


커피와의 마지막 추억은 씁쓸했다. 나에게는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얘기하는 걸 좋아했고, 커피를 마시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종종 카페에 가서 커피나 마시자며 나를 카페로 끌고 갔다. 당시 괜히 남자들끼리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신다는 게 어색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카페에 가자는 그 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냥 따라갔다. 그 친구는 비교적 일찍 취업에 성공한 편이었다. 사회초년생이었던 그 친구는 신입이어서 그런지 직장에 아주 늦게까지 남아 일을 하곤 했다.


그 친구의 별명은 애늙은이였다. 그는 나이가 많지도 않았으면서, 오래된 것들을 유독 사랑했다. 그는 종종 카카오톡으로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가수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라던가 이용의 ‘잊혀진 계절 ’ 같은 노래의 링크를 보내줬다. 나와 내 친구들은 도대체 몇 년도에 태어났냐며 그런 그를 놀리곤 했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그는 어느 날처럼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그는 영원히 잠에서 깨지 못했다. 그렇게 친구와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던 일상은 끝이 났다. 나와 커피의 추억은 그게 마지막이다. 지금은 카페에 가면 아메리카노밖에 시키지 않는다. 그렇다. 나에게 달달한 라떼는, 커피가 아니다. 나에게 커피란 언제까지나 씁쓸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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