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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벼락 Dec 19. 2022

육아도 벼락치기 Ep. 2 - 돌파티와 물김치

아쉬운 엄마를 만났지만 과분한 아빠도 만나 균형을 이루었으니 되었다.

2022년 12월 14일은 우리 아이들이 첫 생일을 맞는 날이었고 15일은 돌잔치가 계획된 날이었다. 잔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조촐하게 셀프 생일상을 차리게 되었고 실제 찾아왔던 인원도 적었으므로 '돌파티'라는 말로 대체하고 싶다. 잔치가 곧 파티고 파티가 곧 잔치지만, 코리안 잔치라고 부를 만큼 성대하게 무언가를 하지는 못하였다.


우리 아이들은 1월 4일에 제왕절개로 태어날 예정이었지만 엄마의 임신중독증으로 일반 단태아 만삭아들보다는 6주나 빨리 세상에 나왔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1월생을 만들지 못하고 심지어 남들이 다 기피하는 12월생이라는 운명을 아이에게 준 것은 아닌지 시작부터 엇나갔다는 생각에 분한 마음도 컸다. 하지만 실제로는 1.7키로, 1.8키로로 너무 작게 태어난 아기들이 무려 12월 생이었으므로 같은 해에 태어난 친구들과는 너무 큰 차이가 있었고, 우리보다 늦게 태어난 아가들보다도 우리 아이들이 작았으므로 나는 그동안 눈을 반만 뜨고 살았다. 다행히 아기들이 1년 내내 열심히 커 준 덕분에 성장곡선의 맨 밑에도 들어오지도 못했던 발달 상황이 이제 성장곡선 하단에 무사히 안착하고 서서히 올라가는 길에 있으니 이번에 아가들의 첫 생일을 맞는 나의 마음도 무척 새로울 수 밖에 없었다.


일 년 전, 그러니까 2021년 12월 14일, 분만이 결정되긴 하였으나 혈소판 수치가 바닥을 찍는 바람에 전신마취 후 아이를 제왕절개로 분만해야 했다. 나는 의식이 없는 상태로 아이를 낳았고, 아이들은 바로 니큐에 입원했다. 코로나로 인해, 그리고 아이들이 무려 신생아 중환자실에 입원했기에 그 다음날 면회시간에 맞춰서야만 아이들을 볼 수 있었으므로 내 기준에서는 12월 15일이 아이들의 실물을 처음 본 뜻깊은 날이기도 하다. 우리 아이들은 남들보다 작은 몸으로 100일을 맞고, 200일을 맞고, 300일을 맞다가, 첫 돌을 맞았다. 으레 그러하듯 나도 100일 파티와 돌파티로 아가들의 성장을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코로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성대하게 할 계획도 없었으므로 두 번 다 집에서 생일상을 대여하여 작고 예쁘게 치러주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100일 파티 때도, 돌파티 때도 분노에 휩싸였다. 원인은 바로 모할머니의 부재다.

* 나는 엄마 쪽 가족을 외가로 부르는 것이 다분히 성차별적이라고 생각하여 부할머니 혹은 아빠할머니, 모할머니 혹은 엄마할머니라는 말을 대체용어로 쓴다.


부재라고 하니까 좀 그런데, 우리 엄마는 멀쩡히 살아계시다. 대전에 살고 계시고, 다양한 관심사가 있지만 뭐 하나 꽂히면 잘 해내는 성격인 것인지 그 관심사에 푹 빠져서 살다가 상위레벨까지 섭렵하곤 한다. 약 6~7년 전부터 시작하신 색소폰 세계에서 어느 정도 잘 하시게 되셨는지 색소폰 사관학교라는 곳에 교관선생님으로 계시고 약 30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피드백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한다. 아무렴 300명 전체를 혼자 돌볼까 싶지만, 그렇다. 우리 엄마가 아이들 100일 파티도, 돌파티도 오지 않은 이유는 그 색소폰 사관학교 일정이 너무 바빠서라고 한다.


2022년 12월 15일 돌파티 당일. 점심 시간 즈음에 오기로 예정돼 있던 가족들을 기다리며 아이들 밥을 먹이고 있었다. 우리 집 현관문 벨이 울렸고 남편이 나가서 문을 열었는데 이게 웬걸. 이번에도 엄마 없이 아빠만 오셨다. 나는 엄마가 올 거라고 예상했다. 100일 때는 못 간다는 말이라도 있었으나 이번에는 안 온다는 말도 없었을 뿐더러 100일은 백 번 만 번 양보하여 바빠서 못 올 수도 있다치지만 이것은 인생 첫 손주들의, 무려 둘이나 되는 손주들의 돌잔치 아닌가? 아빠표 돼지갈비찜을 한 솥하여 들고 온 아빠가 반가운 것은 잠시였고, 왜 엄마는 오지 않았냐는 날세운 질문부터 하게 되었다. 아빠는 베실베실 웃는 듯 아닌 듯 '그러게-' 정도의 말만 했던 것 같다. 다시 물었다. 엄마는 왜 안왔냐고.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 그랬더니 아빠가 "너희 엄마 속을 누가 알겠니" 하고 만다. 더 화가 나서 다시 물었다. 내가 엄마한테 뭐 잘못한 거 있냐고, 엄마가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 같냐고. 그랬더니 아빠는 또 "너한테 화날 일이 뭐가 있겠니? 요즘 색소폰 사관학교가 너무 바빠서 그런걸 거다. 너희 엄마 아무도 못말리잖니."


남들은 아기를 낳고 키우는 과정에서 엄마 생각이 나서 많이 운다고 하더라. 엄마가 나를 위해서 얼마나 큰 희생을 하셨는지 깨닫게 되면서, 어릴 때는 이해가 가지 않던 엄마의 말들과 행동들이 비로소 이해가 가고 엄마의 과거와 현재에 빚진 느낌이 든다고. 딱 잘라 말하자면 난 아니다. 아이를 낳은 그 날부터 아니었다. 내가 마취에서 풀리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엄마는 울먹였다. 엄마가 걱정할까봐 '저 괜찮아요 안 아파요' 라고 말했지만 우리 엄마 대답에서는 띠용-소리가 났다. "아니, 엄마 미국에서 아는 사람 하나도 없을 때 너 낳고 힘들었던 그 때 생각나서 눈물이 나." 두 번이나 찾아온, 내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었던 산후 출혈이 있은 후에는 이런 말도 들었다. "너가 제왕절개 후 통증이 하나도 없어서 걱정했다. 분만은 원래 고통이 수반되는거다. 세상에는 총량(보존)의 법칙이 적용되는데 너가 안 아팠다하니 걱정됐다." 그 말인 즉슨 내가 제왕 후 통증이 없었기 때문에 산후 출혈을 겪는 거라는 말이다. 그게 총량이 보존되는 법칙에 맞는 결과라는 말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실제로 그 뜻이 그러했다. 내 친구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기함하였다. 친엄마 맞냐는 질문도 여러번 받았다. 그럴 때마다 어릴 때부터 아빠가 나한테 해준 말이 생각난다. "너네 엄마는 계모인가봐."


아이들의 돌파티는 잘 마치었다. 귀여운 아기들은 빵실빵실 잘 웃어주었고, 아빠와 삼촌(내 남동생)과 엄마아빠가 함께 한 돌파티는 정말 작지만 예쁘고 알찼다. 대여한 돌상도 정갈하고 예뻤고, 날짜에 맞춰 잘 도착한 떡케이크와 돌떡, 화과자도 돌상에 딱 어울렸다. 그러나 나는 그 날 카톡에도, 전화로도, 그 어떤 방식으로도 엄마로부터 아이들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받지 못했다. 아, 애들 생일 3주 전인가 엄마가 직접 짜 준 아기 목도리 두 개를 보내주시며 편지로 "꼬마님들, 생일을 축하합니다."라고 써서 보내주시긴 했다. 100일 파티에 이어 이번에도 오지 않으려는 심산인가 싶어 쎄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안 온다는 말은 없었기에 올 거라고 생각한 내가 멍청한건지.


어릴 때부터 엄마가 나를 살갑게 키우지 않은 건 맞다. 내가 정말 어릴 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터 집안일을 다 놓아버렸던 것 같다. 엄마는 그 당시 여성에게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정도보다 훨씬 더 많은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초등학교를 들어간 이후로 바로 일을 시작했고 그 때부터 나는 식탁 위에 놓인 만원으로 중국집, 피자집, 치킨집을 돌려막기 하며 배달음식을 먹은 기억이, 집밥을 먹은 기억보다 더 많다. 뭐, 사실 나를 어떻게 키웠는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집은 가족 대소사는 무조건 가족 전원이 모여서 챙기는 따뜻한 전통이 있었는데 엄마가 그것을 와장창 깨먹었다는 것이다. 무려 손주들 100일 파티, 그리고 돌파티에서.


기뻐야 할, 축하받아야 마땅할, 2021년의 그 날에, 2022년의 그 날에. 배신감과 분노를 느껴야한다는 것은 참 힘들다. 글을 쓰는 이 시점은 돌파티가 끝난지 3일이 지난 시점이고 나는 3일 내내 문득 밀려들어오는 부아를 삭이며, 이걸 따질지 말지를 고민하는 내 처지를 애석해했다. 그러나 오늘 저녁 남편이 말아준 물김치국수 한 사발이 나를 진정시켰다.


아빠가 직접 만들어서 가져온 물김치. 2006년 중국에 어학연수를 가있던 시절 추석을 틈타 잠시 한국에 들어왔는데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야하던 그 날, 아빠가 할머니께서 담가주신 나박김치에 소면을 한 주먹 툭 말아 내어주셨다. 단 몇 개월이었지만 중국 음식만 먹었던 나에게 그 나박김치국수가 어찌나 맛있었던지.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맛을 고르라면 단연 다섯 손가락 중 첫 손가락에 그 나박김치국수의 자리를 매겨주었다. 할머니표 나박김치국수와 아빠표 돼지갈비찜과는 용호쌍박의 관계이다. 아빠에게도 그 말을 서너번 한 것 같은데 이번엔 아빠가 그 말을 기억해서 직접 절임배추를 주문하여 당근과 사과와 청각을 깍뚝깍뚝 썰어서 손수 김치를 해서 가져온 것이다. 무려 아빠표 돼지갈비찜과 함께.


내가 불효녀인 것인지, 엄마를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라는 에피소드가 많이 떠오른다. 물론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더 잘 남는 걸거다. 나도 엄마에 대한 좋은 기억이 있고 그래서 마음 속 깊이 엄마를 많이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엄마도 엄마의 삶이 있기에 어린 시절 나보다 본인의 삶을 앞장 서서 살았다는 그 자체를 비난할 수도 없다. 나도 그렇게 살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어릴 때부터 마음으로 몸으로 받은 상처가 사라진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엄마가 아무런 기별도 없이 돌파티를 보이콧 한 것에 대해 따질지, 나도 엄마처럼 앞으로 엄마 생신은 계속 보이콧 할 것인지, 이번 사건을 모른 척 하고 넘어갈 것인지를 고민하던 차에 아빠가 만들어준 물김치에 나를 진정시키는 한 가지 문장을 찾아낼 수 있어서 오늘은 그 생각으로 나를 다스려본다.


아쉬운 엄마를 만났지만, 과분한 아빠를 만나 균형을 이루었으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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