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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니 Feb 27. 2024

청춘의 문장들

여행이란 빛 좋은 개살구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설렁설렁 일어나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글을 끄적이던 날이었다. 와이파이가 3시간 무료인 넓고 쾌적한 카페에서 망고 스무디를 마시며 가져온 책을 필사했다.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을 한 페이지씩 곱씹으며 읽었다. 매일매일 그렇게 그의 청춘을 조금씩 훔쳐 읽다 보니 어느 순간 쓰고 싶은 욕망이 올라왔다. 그의 문장을 따라 쓰는 게 아닌, 나의 이야기를 말이다.



 그는 1999년, 퇴근을 한 뒤 11시부터 새벽 2시까지 매일 밤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 소설로 인해 삶의 변화를 꿈꾸는 게 아닌 그저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이 문장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받았던 모든 상처가 치유됐다고 말한다. 이건 글 쓰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하다.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남이 아닌 나를 위해 쓰고 있다고 말이다.



  나의 독서습관은 아빠의 영향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아빠는 한 달에 한 번씩 나와 남동생을 데리고 서점에 가서 마음에 드는 책 딱 한 권씩 사주었다. 그게 만화책이든, 동화책이든, 세계문화유산 모음집이든 나의 선택에 관여하지 않았다. 덕분에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선택할 수 있었고, 이는 곧 책을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도와주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한창 가정집에 두꺼운 컴퓨터가 한 대씩 들어올 때쯤이었다. 포털 사이트에 궁금한 것을 검색해 보니 답이 제각각이었다. 나는 그 해답을 정확하게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아빠에게 달려가 주절주절 말했다. 그래서 답이 뭐냐고. 아빠는

인터넷 말을 믿지 마. 제일 정확한 게 뭔지 알아? 바로 책이야. 책 속에는 정답이 다 나와있어. 궁금한 게 있으면 도서관에 가서 관련된 책을 찾아봐.

라고 말했다. 실은 인터넷을 잘 몰랐던 아빠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는 걸 이제 알았지만.



 그 뒤로 나는 궁금한 게 있으면 책을 봤다. 이 습관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 이어졌다. 일본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도쿄 여행 에세이를 구매하고, 사유가 필요할 때는 철학 책을 사 모은다. 마음이 힘들 때는 정신과 의사가 쓴 책을 읽고, 갑자기 열심히 살고 싶어질 때는 자기 계발서를 무지성으로 장바구니에 담기도 한다. 시시때때로 서점 어플에 들어가 베스트셀러 목록을 쭉 훑고, 다 읽지도 못하는 소설들을 분기마다 집으로 배송시킨다. 나의 책장은 지금까지의 고민들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 사람들은 허황된 꿈을 꾸기도 한다. 이 여행이 내 인생을 모조리 바꿔놓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놈의 여행, 여행. 많은 책과 미디어에서 말한다. 여행을 하세요, 혼자서 떠나보세요, 지금 이 순간을 즐기세요. 하지만 혼자 여행을 해 본 사람들은 안다. 내가 도착한 곳이 파라다이스는 아니라는 것을.



 시도 때도 없이 당하는 인종차별과,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한 상황들, 사진과 다른 여행 스폿, 해가 지면 180도로 변하는 위험한 명소들, 묘한 긴장감, 여기저기서 내 돈을 뜯기 위한 눈초리들, 적응되지 않는 현지의 냄새, 음식, 갈까 말까 우물쭈물하는 나날들, 마음 처럼 되지 않는 계획, 열쇠를 아무리 돌려도 열리지 않는 방문, 옆집 초인종을 눌러야 하는 용기와 부끄러움, 결국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나, 빛 좋은 개살구.



 여행에서 내 인생을 뒤흔들만한 일은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니 한국에서와 똑같이 그저 하루하루 할 일을 만들어 해낼 뿐이다. 치앙마이는 더더욱 그렇다. 관광지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곳이다. 여유와 한적함이 도시 전체를 이루고 있으니 더더욱 이유를 만들어야 하는 곳이다. 내가 오늘 외출해야 하는 이유, 카페에 가야 하는 이유, 요가를 해야 하는 이유, 건강한 음식을 먹고 싶은 이유를 말이다. 나는 이곳에서 다양한 이유를 만들어냈다. 그중에 카페에 오래도록 앉아있기 위해 필사라는 이유를 찾아냈다. 하지만 이 억지로 만들어 낸 할 일이 나에게 새로운 할 일을 만들어주었다.



 글을 쓰는 일을 당장 시작하고 싶었다. 치앙마이에서 할 일 없이 지내고 있는 나에게 좋은 도전이라고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과외 선생님을 구해 줌 화상회의로 소설 쓰는 법을 배우기로 결정했다. 일단 내가 글을 써도 되는 사람인지 심사를 받아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필요했으니 선생님을 고용했다. 나는 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일단 그 세계로 먼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어를 배우고 싶다면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노래를 배우고 싶다면 직장인 밴드든 보컬 학원이든 음악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그러다 보니 글 쓰는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봤다. 그 순간 뇌리에 번개가 번쩍 했다. “대학교!”



 스무 살이 되자마자 대학교가 아닌 사회로 발을 내디뎠다. 하고 싶은 공부가 딱히 없으니 대학교를 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대학교를 가지 않은 것이 아쉬움으로 자리 잡았다. 어른들이 나에게 하던 말이 있다. 어릴 때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라는 것. 스무 살은 스무 살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나는 그 시기를 놓쳐버리니 대학을 가지 못한 아쉬운 마음 또한 점점 더 희미해져 갔다. 왜냐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감과 용기 또한 희미해지기 때문이다.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어도 '에이, 내가 무슨'하고 넘겨버린 무수히 많은 꿈들이 있었다.



 하지만 치앙마이에서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서 꿈을 만들어버렸다. 할 일이 없으면 할 일을 만들어 내는 게 인간이었다. 따분함은 곧장 사색의 시간으로 바뀌었고, 머릿속에서 나는 수 억 개의 미래를 그렸다. 숙소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건물보다 높은 나무들을 보면서 말이다. 길을 걷다가 벽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도 말이다. 땀이 너무 흘러 고개를 들었을 때도 그렸다.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을 한 자씩 꾹꾹 눌러쓰면서는 다짐했다. 나 또한 나의 젊은 날을 사로잡을 한 문장을 찾겠다고.



 문예창작과 수시 시험일까지 남은 건 단 삼 개월뿐이었다. 나는 갑자기 계획에도 없던 입시생이 되었고, 매주 수요일 밤 안산에 있는 과외 선생님과 화상 통화를 하면서 콩트를 배웠다. 아무리 봐도 늦은 나이었지만 나의 선생님은 나에게 결코 늦지 않았다고 말해주었다. 학교에는 자신의 엄마 뻘의 동문도 있다면서 말이다. 능력 있고 멋있는 나의 선생님 덕분에 나는 용기를 더더욱 낼 수 있었다. 선생님의 수업을 잘 따라가기 위해서, 그리고 곧 있을 수시 신청을 하기 위해서 나는 한국행 비행기를 앞당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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