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교육
교육자들은 종종 양극단의 태도를 취하곤 한다. 즉, 한편에서 그들은 학습자에게 자신과 같은 학문적 열정을 가지고, 자신과 동일한 수준으로 노력하길 바란다. 그들은 그런 학생들을 우대하고 편애하지만, 다른 학생들은 어느 정도 배제한다. 다른 한편에서 교육자는 학생들에 대한 개인적인 기대를 전혀 가지지 않는다. 이들은 단지 지식을 전달하고, 학습 수준을 평가하는 일만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이 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학습자의 열의, 학습자의 효율적인 교수법에 관한 것은 커리큘럼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믿음의 존재다. 학습자가 학문에 열정을 가지는 것은 학습자 개인의 사정이자 문제이고, 마찬가지로 학습자가 효과적인 학습법을 익히고 실천하는 것 또한 본인 사정이라는 것이 이러한 믿음의 내용이다. 그러니 이들 교육자는 학습자의 '개인적인 사정'에 관여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특정한 사정(열의가 넘치는 학습자 등)에 편향되어 학습자를 '차별'하거나, 아니면 어떤 사정에도 관심을 두지 않고 '방치'한다.
커리큘럼의 본성이 그러한 것이라면, 즉 학습자의 학습 조건에 대해 관여하지 않는 것이 교과과정이 지켜야 할 원칙이라면, 교육자의 이러한 양극단의 태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이들의 개인적인 선택은 차별도 방치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이 그러한 것인가? 혹은, 커리큘럼은 교육의 본성을 표상하는 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인가?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 우리는 아마도 먼저 '교육'에 관해 접근해야 할 것이다. 교육이라는 주제는 그 자체로 정치적인 이슈와 맞닿아 있다. 왜냐하면 교육은 어느 사회에서든 문화적 재생산과 특정한 주체화를 관장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교육은, 그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담론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학습자에게 그것을 익숙해지게 한다. 그럼으로써 학습자가 그 사회에서 바람직하게 여기는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생각과 태도의 방향을 조형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교육에 관한 이런 기술이 그 자체로 부정적인 측면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종종 교육의 이러한 측면을 지적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교육 제도가 마치 그 자체로 '세뇌의 일종'이자 부정성의 주범인 것처럼 손가락질한다. 현실의 교육 제도가 실천적인 측면에서 그렇게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천 양상의 빈도와, 그것의 본질을 헷갈려선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올바른 교육에 관한 논의가 불가능하게 되고, 교육 제도 안에 개선되어야 할 현실적인 문제들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여하간 어떤 입장에서든 국가 차원의 교육 제도 자체가 사라져야 한다는 발상은 괴상하다. 개성의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동질성이 공감의 기초이며, 그 사회가 연대할 수 있는 조건이라는 점에 무지하다.
다시 돌아와서, 교육의 실천에 관한 쟁점은 언제나 정치적이다. 하나의 사회는 단 하나의 규범과 세계관, 문화적 속성으로만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어떤 재생산과 주체상을 '모범'으로 간주할진 선택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의 학습자에게 어떤 가치를 우선적으로 교육할 것인가? 예컨대 우리나라는 이른바 국영수 중심의 교과목 편성을 토대로, 시간관리 역량과 경쟁, 인내심의 가치 등을 주입한다. 한국에서 학습자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활동을 하고, 그 활동의 산물로 다른 학습자들과 경쟁하며, 그 모든 인고의 시간을 단지 견뎌내길 요구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과 같다. 교육의 본성이 그런 것이라면, 교육의 실천이라 할 수 있는 커리큘럼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 아마도 바람직한 것은 그 교육이 함양하고자 하고, 평가하는 바로 그 부분과 관련해 학습을 촉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교육 제도(혹은 교육자)는 교육이 수행해야 할 바로 그 부분을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면서, 교육이 함양해야 할 역량의 결과값에만 관여하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우리나라 교육 제도의 사태를 다시금 고려해 보자. 만약 어떤 제도가 학습자에게 시간관리 역량, 경쟁과 인내심의 가치를 효과적으로 주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시간관리 역량을 기르려면 우선 시간 관리의 개념을 이해하고, 관리를 수행하는 주체의 신경생리적 지식을 획득해야 한다. 예컨대 신경학적으로, 우리가 투입할 수 있는 주의력의 하루 총량은 정해져 있다고들 한다. 즉, 아침에 어떤 일에 많은 주의력을 사용하면, 저녁엔 아무리 노력해도 아침과 같은 수준의 주의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시간을 관리한다는 것은 주의력의 투입 여부를 일의 중요도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 필요한 체내 화학적 조성이나, 그러한 역량을 기르는 직접적인 방법을 아는 것이 유리하다. 단적으로 유산소 운동이나 명상 같은 것이 있겠다. 경쟁이나 인내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교육 자신이 함양하고자 하는 바에 관여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교육 제도(또는 교육자)는 학습자가 교육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조건에도 자연스레 관여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 단지 피상적 결과에만 관여하려 하면 그 사회의 교육상은 괴상한 모습으로 변모한다. 이때 교육은 시간관리 역량에 관여하려 하지 않고, '시간관리를 잘한다면 적응해야 할 결과'를 제시할 뿐이다. 그것에 도달하는 것은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고 말이다. 그래서 그 사회의 사고는 예컨대 '시간관리를 잘한다면 국영수를 잘하겠지.'로 비약한다. 이는 '국영수를 잘하니까 시간관리 역량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또 다른 비약으로 뻗어간다. 사회가 이러니 학습자는 점수에만 매달린다. 교육이 함양해야 할 능력은 교육 제도에서 전제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교육자가 학습자에게 교육의 전제를 요구하고, 그것에 따라 자신의 교육적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차별이거나 방치이다. 교육제도나 교육자는 학습자의 바람직한 학습 조건에 보다 능동적으로 관여해야 하며, 이것이 교육의 참된 형상이자 커리큘럼이 재현해야 할 가치상이다.
아마도 커리큘럼의 역할에 관한 다른 반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상술한 내용에서 커리큘럼을 교육의 표상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커리큘럼은 교육의 목적 자체에 관여하기보단 '구체적인 지식의 획득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과정 짓는지'에 참작할 뿐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런 입장에선 교과과정에 포함되어야 할 것은 시간관리에 관한 생리적 지식이 아니라(설령 그 사회에서의 교육의 목적이 '시간관리 역량의 증진'이라고 해도),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구체적이고 기초적인 지식들의 목록(시간관리 역량으로 얻어야 할 구체적인 지식들, 예컨대 국영수)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론은 동일한 이슈에 대한 변죽일 뿐이다. 만약 커리큘럼이 구현하고자 하는 바가 교육 자체와 유리된 '구체적 지식'이라고 해도(이러한 가정 자체가 이상하긴 하지만), 그 구체적 지식의 획득과 관련한 조건에 관해 커리큘럼이 관여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결국 그 구체적 지식의 획득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과정은 단순히 그 지식을 나열하여 학습자 앞에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용이한 습득에 필요한 조건들을 선행 학습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이러한 조건에 관한 지식, 능력을 학습자 개인의 문제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그다지 의미 있는 입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입장에서 볼 때 나올 수 있는 결론은 교육도, 커리큘럼도 실상 하찮고 좁은 영역에만 종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과 커리큘럼이 실제로 그런 가치를 지닐 뿐인가? 혹은 그래야만 하는가? 직관적으로 판단컨대, 어떤 사회에서든 두 질문에 긍정하고 싶진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