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대로 베트남어를 공부하고 있는데, 대화를 시도해도 현지인들이 내 말을 잘 알아듣질 못하니 재미가 없다. 6개나 되는 성조 때문에 발음이 어렵기도 하고, 아는 단어를 가지고 문장을 만든다고 한 게 말이 안 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한 번은 거래처 직원한테 '당신은 몇 살입니까?'라고 물어본다는 게 '당신은 얼마입니까?'라고 한 적이 있었고-두 문장은 딱 한 글자가 다르다-, 얼마 전엔 아는 베트남어 단어를 조합해서 나름대로 문장을 만들었더니 정말 이상한 말이 되어버려서 직원을 한참 웃게 한 적도 있었다. 한국어를 기준으로 "나 밖으로 나갈 거야."라는 말을 베트남 단어를 조합해 만들면 "나 응가하러 갈 거야."라는 말이 된다.
처음 베트남에 왔을 때는 금방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었다. 왜냐면 영어도 그렇게 배웠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베트남어의 홍수에 둘러싸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무지 실력이 늘질 않는다.
'체계적으로 배우질 않아서 그런가 보다.' 결국 시간을 쪼개서라도 어학당엘 다니기로 하고, 당장 호치민 대학교 어학당에 등록하러 갔다. 베트남의 대학교 캠퍼스는 한국에서 보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학교가 단과대별로 도시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는데, 어학당이 있는 호치민 인문사회 대학은 호치민 시내에 위치해 있다.
학교의 오토바이 주차장 뒤편에 있는 어학당 사무실 접수처에 앉아서 직원에게 랭귀지 코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2개월이 1개 코스로 이뤄져 있고, 1단계부터 시작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더 높은 단계로 가고 싶으면 테스트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배워둔 게 있으니 테스트하겠다고 하자 접수하던 직원이 나에게 하던 말을 영어에서 베트남어로 바로 바꾼다. 간단한 베트남어 몇 마디를 물어본 후 "2단계로 등록하시면 되겠네요."라고 결정을 내줬다.
가격도 비싸지 않고, 퇴근 후 일주일에 두 번씩 다니는 거면 업무에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매주 화, 목 저녁 7시부터 9시까지의 시간을 선택한 뒤, 강의실 번호가 인쇄된 접수증을 받아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호찌민 대학교 어학당의 베트남어 교재
첫 수업을 하는 날, 오랜만에 학교에 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렌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아직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 먼저 들어가 앉았다. 앞문 하나만 있는 1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강의실인데, 의자가 붙어있는 강의실용책상이 앞뒤 두줄로 한 줄에 5개씩 놓여있다. 한국의 여느 학교와 같이 책상은 볼펜으로 낙서도 돼있고, 여기저기 칼로 파인 홈도 있다.
6시 40분, 저녁이지만 아직 날이 더운 편이다. 강의실 뒤쪽의 아이보리 색으로 변해있는 벽걸이 에어컨을 틀었더니 드르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먼지 냄새가 확 퍼져 나온다. '좀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앞문을 열어두고 앞줄 가운데 책상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어떤 선생님 그리고 어떤 학생들과 공부하게 될지 기대하며 교재를 꺼내 보고 있었다.
내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두 명이 일본어로 얘기하며 들어온다. 두 명은 내 오른쪽의 하얀 벽 안쪽부터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나와 눈인사를 했다. '일본 사람이네. 한국 사람은 안 오나?' 잠시 후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들어온다. Xin Chào(신 짜오)라고 작게 베트남어로 인사를 하며 일본 아저씨들 뒷자리 구석으로 들어갔다. 셋이서 서로 일본어로 인사를 한다. '다 일본 사람이네?' 아마 1단계 수업부터 같이 듣고 온 것 같다. 잠시 후 여자 선생님이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선생님은 50대 후반 정도로 되어 보이는 분인데, 슬리퍼처럼 생긴 검은 구두에 두꺼운 돋보기를 쓰고 있다. 나한테 인사를 건네더니 베트남어로 이름, 나이, 직장에서 뭘 하는지 물어본다. 레벨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혹시 1단계로 쫓겨날까 짧은 질문에도 열심히 대답했다. 선생님은 나에 대한 질문을 끝낸 뒤,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달라며 이름들이 적혀있는 출석부를 한 장 내민다. 역시 한국 이름은 나밖에 없다. '서양 이름도 있는데'하는 순간 문을 쓱 밀고 한 명이 더 들어온다. 한 손에 헬멧을 들고 온 서양 여자가 Xin Chào를 "싄 촤오"라고 발음하며 내 뒤에 앉았다. 우리 반은 이렇게 한국 사람 1명, 일본 사람 3명, 프랑스 사람 1명 총 5명이다.
선생님이 화이트보드에 뽁뽁 거리며 베트남어 문장을 쓴 다음 따라 읽으라고 시킨다.
"나는 소고기 쌀국수를 가장 좋아합니다."
간단한 문장인데 발음이 어렵다. 역시나 선생님은 학생들의 발음이 좋지 않다고 계속 다시 시키고 있다.
쌀국수 발음이 어렵다. Phở(퍼)라고 발음해야 되는데, 성조가 있기 때문에 발음하기가 어렵다. O 위에 그려져 있는 물음표 모양이 성조 표신데 발음을 물음표처럼 위에서 아래로 흔들어줘야 한다. 이걸 글로 설명하기가 너무 어렵다. 그래도 내가 나름대로 깨달은 느낌적인 느낌으로 설명해보면, 빨래한 수건 윗부분을 잡고 아래로 휙 터는 느낌으로 발음하면 된다. 수건이 아래로 한번 펄럭이다가 제일 하단이 튕겨 올라오는 느낌을 떠올려 보자. 이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이제 어렵지 않다. 이렇게 쓰면 이해가 되려나 싶지만, [퍼어~어↗].
아무튼 베트남어 발음이 쉽지 않아서 우리가 계속 틀리고 있다. 갑자기 프랑스 여자가 웃음을 터뜨린다. Phở 발음이 너무 어렵기도 하고, 또 뭔가 이 초등학교스러운 분위기가 우스운가 보다. 나도 그렇게 느꼈고, 학생들 모두 웃음이 나왔다.
이제 어려운 발음 연습을 끝내고, 배운 문장을 가지고 파트너와 질문 주고받기를 하라고 한다. 일단 처음엔 일본 아저씨 두 명, 그리고 여자 두 명이 같은 조가 된다. 나는 조원이 없어서 선생님과 함께 하기로 했다. 나이 많으신 선생님은 마치 추석에 만난 고모처럼 쉼 없이 질문을 퍼붓는다. "나이가 몇 살입니까? 결혼을 했습니까? 부인은 몇 살입니까? 아이는 몇 명입니까? 아버지는 뭐 하십니까? 어머니는 뭐 하십니까?" 외국에선 이런 거 물어보는 게 실례라고 했는데, 베트남은 관계를 맺기 전에 서로의 나이로 서열을 정해야 돼서 그러는지 개인 신상에 관한 질문이 계속 이어진다.
이제 조가 바뀌었다. 나는 내 옆의 일본 아저씨와 같은 조가 되고, 내 뒤에 프랑스 여자가 선생님이랑 같은 조가 되었다. 나와 일본 아저씨는 아직 베트남어가 짧아서 그런지 대화가 일찍 끝났다. 그리고 내 뒤에선 선생님과 학생의 대화가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당신은 몇 살입니까? 결혼을 했습니까? 왜 안 했습니까? 결혼할 계획이 있습니까?" '와! 이런 것까지 물어보네.'라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 사람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더듬더듬 대답을 하고 있다. 그렇게 선생님의 호구조사에 걸려서 탈탈 털리고 있던 프랑스 여자가 선생님에게 영어로 질문을 했다. "선생님은 교사 자격증이 있나요?" 선생님은 당황한 듯 있다고 대답했고, 학생들은 피식 웃었다.
이렇게 두 달짜리 코스를 두 번, 총 4달 과정의 코스를 무사히 마쳤다. 몇 번 빠지긴 했지만, 중도에 그만둔 일본 아저씨보다는 낫다. 모두들 낮에는 직장에서 엔지니어로, 관리자로, 또 디자이너와 회계사로 열심히 일하다가 저녁엔 어학당에 나와 학생이 되는 이 분위기도 즐거웠다. 또 열정이 넘쳐서 항상 수업 시간을 20분씩 넘겨서 끝내주는 선생님에게도 감사했다. 어떤 날은 짜증이 나기도 했었고
아직 초급반만 마쳐서 그런지 한국 TV에서 본 외국인들처럼 현지 언어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마지막 수업에까지 출석한 것에 의의를 두기로 하자. 중급반으로 넘어가고 싶지만 회사 일 때문에 일단 여기서 멈춰야 한다. 요즘 회사에 다시 어려운 일들이 생기고 있다. 다음에 또 더 공부할 기회가 있겠지...... 마지막 날, 시험을 마치고 나서 우린 서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눴다. 종강 후 다음 학기에 또 만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