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선 '나'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딱히 없고, 상대에 따라 '내'가 계속 변한다. 이게 무슨 황당한 말인가? 베트남어를 배우면서 이 부분이 무척 신기했다. 분명 베트남어 교재에는 '또이(Tôi)'라는, '나'를 지칭하는 대명사가 소개되어 있지만 이 단어는 실생활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문서상으로 존재하는 단어이거나, 상대방과 내가 전혀 남남이라고 생각되는 경우에만 사용하는 '나'이다. 간혹 서로 친하게 지내다가 싸울 때, 이 '또이'라는 '나'를 쓰기도 한다.
대신 실생활에서 '나'라는 대명사는 이렇게 사용된다. 예를 들어 '내가 너에게 밥 사줄게'를 베트남 방식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1. 오빠가 여동생에게 밥 사줄게.
2. 남동생이 누나에게 밥 사줄게.
3. 형이 남동생에게 밥 사줄게.
4. 삼촌이 조카에게 밥 사줄게.
5.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밥 사줄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는지? 즉, 상대방과 나의 관계에 따라 계속해서 나와 너라는 대명사가 바뀌게 된다. 이게 현지에서 계속 살던 사람들은 원래 그렇게 살았으니까 쉽겠지만, 나처럼 외국인으로서 처음 베트남에 온 사람들은 엄청 헷갈리는 말이다. 오빠, 동생, 삼촌과 같은 단어를 베트남어로 계속 생각하고 있다가, 상대방을 보자마자 뇌에서 입으로 순식간에 툭 나와줘야 한다.
'우와 이렇게 대명사를 줄줄이 외워야 되는 언어가 있다고?' 베트남어 선생님에게 간단하게 쓸 수는 없는지 물었다. 선생님이 대답하기를 외국인들은 너무 세분화해서 얘기하지 않아도 현지인들이 다 이해하니까 나이로 봐서 내가 상대방보다 많으면 오빠 또는 형, 적으면 동생이라고 말하면 된다고 했다. 상대방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하고, 나머지 단어들은 살아가면서 천천히 배워서 쓰라고 한다.
회계팀에서 자금 결재를 받으러 한(Hanh)이라는 여자 직원이 나에게 들어왔다. 오늘은 결제 대금이 얼마 없다. 다행히 간단한 거래들만 있어서 결재가 어렵지 않은 날이다. 자금 결재가 끝난 뒤에 한(Hanh)은 따로 챙겨 온 뭔가를 조심스럽게 내 앞에 꺼내 놓는다. 맛있는 거니까 한번 먹어보라고 한다. '고마워'라고 수업시간에 착실히 배워둔 대로 베트남어로 유창하게 얘기해줬다.
"오빠가 동생한테 고마워."
한(Hanh)은 웃으며 결재 서류를 들고나갔다.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 이렇게 베트남어로 얘기해주니까 직원들이 확실히 좋아하는 것 같다. '가만, 근데 이게 뭐지?' '한'이 내 책상에 놓고 간 이 이상한 물체의 정체가 아무리 봐도 생전 처음 보는 거다. '이게 뭐지? 대체 이 자연스럽지 않게 생긴, 악마의 열매처럼 생긴 이게 뭣이란 말인가?'
처음 보는 이 물체를 한동안 눌러보기도 하고 두드려도 봤다. 양쪽 끝 뾰족한 부분 간 간격은 명함 길이(짧은 변의 길이) 정도 되는 것 같고, 딱딱하기는 호두껍질 같다. 새 부리처럼 생긴 양쪽 끝은 가시 같이 뾰족한데, 게의 집게발과 비슷한 감촉이다. '와! 이게 뭐지? 이걸 어떻게 먹으라고 준거야? 이건 진짜 사람 불러야겠다.'
한(Hanh)과 같이 회계팀에 있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마이(Mai)를 불렀다.
"마이(Mai), 이거 뭔지 알아? 한(Hanh)이 주고 갔는데, 먹는 거 맞아?" 나는 저 마귀같이 생긴 열매를 집어 들어 마이(Mai)에게 물었다.
"하하하, 이거 '꾸 어우(củ ấu)'라는 거예요. 이거 열맨데 딱딱해요. 내가 까서 갖다 드릴게요." 마이(Mai)는 이 열매를 건네받아서 내 눈 앞에 보여주며 이름을 말한다.
"아니, 아니야, 까지마. 이따가 집에 가져가서 애들 보여주고 싶어."
"네, 이거 베트남 애들도 많이 가지고 놀아요." 마이(Mai)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생긴 게 무슨 악마같이 생겼어."
"하하, 네 좀 그렇게 생겼습니다. 그리고 한(Hanh)이 대신 얘기 좀 전해 달라는 게 있어요."
"어? 뭔데?" 나도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마이(Mai)를 바라봤다.
"자기한테 오빠라고 부르지 말아 달래요. 가슴 떨려서 결재받으러 못 들어오겠답니다. 크킄크,,, 설레나 봐요."
"하하하, 정말? 선생님이 이렇게 말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럼 '한'한테는 '나'를 뭐라고 말해야 돼?"
"'셉(sếp)'이라고 해주세요. '윗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단어 하나 더 외워야 되겠네. 알았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만 계속 살았으면 이런 건 하나도 몰랐을 텐데, 이렇게 외국에 나와 살다 보니 아는 게 많아지고, 나눌 수 있는 이야기도 점점 더 풍성해지고 있다. 그리고 매일 뭔가 배우는 이 기분도 나쁘지 않다. 다시 호기심 많은 학생이 되어 살고 있는 기분이랄까?
우리 아이들도 그렇겠지? 이곳의 삶을 통해 우리 아이들과 나중에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이 풍성해지면 좋겠다. 악마 열매를 앞에 두고 신기해서 이렇게 저렇게 사진 찍고 놀았던 기억, 집 앞 풀 속에서 잡았던 왕 달팽이한테 소리 지르던 기억, 그리고 재빠른 작은 도마뱀을 잡아서 아빠 옷소매에 올려놓고 구경했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