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rchid Oct 12. 2023

세상이 귀 닫았던 69세 여성의 목소리: <69세>

                          

  2017년 미국에서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에 대한 폭로로 촉발된 미투(Me Too) 운동이 우리나라로 확산되면서 그동안 침묵 되어왔던 성폭력으로 인한 여성의 이야기가 걷잡을 수 없이 사회적 문제로 번져나갔다. 그러나 이 사회적 이슈에서 정작 사각지대에 놓인 일반 여성들의 문제는 여전히 관심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영화에서는 빈곤하고 힘없는 69세 여성이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29세 간호 보조사 남성(김준경)에게 성폭행 당한다. 

  여인의 고백은 자신이 요양사로 돌보다가 동거하게 된 ‘동인’(기주봉)이라는 한 노시인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시인은 여성이 당한 성폭력에 분노하여 가해자인 젊은이가 벌을 받을 수 있도록 여성과 함께 경찰서를 찾는다. 그러나 주인공 효정(예수정)의 이야기는 고발을 하려고 찾은 경찰서의 형사들조차도 킥킥대는 한낱 가십거리 정도로 취급되기도 한다. 심지어 같은 여성들조차 도움을 청하는 그녀의 고백에 뒷걸음치며,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법적 제도는 개연성 부족이라는 이유를 들어 그녀의 고발을 기각한다. 한 명의 ‘주체’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그저 치매의 가능성에 노출된 ‘무성적’ 존재로 밀려난 69세 효정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에 그친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상처를 견디는 위로가 될까? 그러나 효정은 죽은 듯이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세상에 내놓기로 한다. 효정도 가해자인 젊은 남성에 의해 눌렸던 손목 상처의 흔적이 지워져 가듯이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 침묵하며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상처를 숨기면 최소한 그녀에게 가해지는 주변의 냉소와 편견으로 인한 이차적 상처를 받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히려 효정은 차갑고 단단한 세상의 벽을 넘어 날기로 한다. 효정은 남성의 완력이 남긴 피멍이 든 손으로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수많은 페이지로 복사를 해서 자신이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는 다세대주택 옥상에 올라가 공중에 날린다.

  효정의 품위는 노인 여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적 제도나 타인들의 무관심에 주저앉지 않고 스스로 맞서고자 일어선 주체로서의 힘에 있다. 더 이상 그녀는 그늘에 숨거나 수영장 물밑에서 혼자이거나 조용히 침묵하지 않는다. 결국 치유는 잊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고 드러내는 힘겨운 용기로부터 시작한다. 

  효정의 변화는 주저앉으려고 했던 또 다른 노인들을 일으켜 세우는 응원의 힘으로 확장된다. 효정이 떠나고 다시 혼자된 노시인 ‘동인’은 시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다시 시작하기로 한다. 그는 잔잔한 미소와 함께 그동안 선인장 받침대가 되어 묻혀있던 자신의 시집을 꺼내 햇빛 아래서 먼지를 턴다. 깊어가는 연륜의 맛이 시에 담긴다. <치유>를 쓴 루이스 헤이(Louise L. Hay)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에가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라고. 치유의 답은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으며 그 답을 찾은 듯 효정의 시선은 밝은 햇빛을 향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