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와가와가(WaggaWagga)에서의 삶은 여유로웠다. 평소 일을 4시 반에 마쳤다. 회사에서 나와 바로 도서관으로 가면 1시간은 책을 볼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서서 일한 피곤함이 책을 보면 사라졌다. 노동자가 아닌 여행자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도서관 문을 닫으면 집으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울워스(Woolworths)에 들러 저녁거리를 샀다. 탄산음료를 박스로 사기도 했다. 저녁을 만들어 먹고는 탄산음료 한 캔을 쭉 들이켰다. 하루 노동에 대한 보상이었다. 셰어 메이트들은 리쿼 샵(Liquor Shop)에서 맥주를 박스로 사서 한 캔씩 마셨다.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주 4일 근무라 일주일에 3일은 쉴 수 있었다. 때때로 동네 공원마다 있는 바비큐장에서 바비큐를 구워 먹었다. 경마대회와 같은 마을 행사에도 참석했다. 마을의 맛집을 순방했고 다른 한국인들의 집에 초대받아 놀러 가기도 하였다. 한 달에 한번 꼴로는 셰어 메이트들과 함께 시드니나 멜버른과 같은 대도시로 나갔다. 한인 식당에서 맛난 것을 사 먹었다. 유명한 장소에서 관광객이 되어 사진을 찍었다. 돌아오기 전에는 꼭 한인 마트에서 장을 봤다. 와가와가의 마트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설령 있다고 해도 비싸기 그지없는 한국산 김치와 라면, 즉석요리들을 가득 실어 돌아왔다. 한 달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렇게 겉으로 여유 가득한 삶이었다. 하지만 속은 치열했다. 정확히는 치열하게 칼과 싸웠다. 일주일의 4일, 도합 40시간의 정형은 칼로 시작해 칼로 끝났다. 칼날이 살면 일이 신이 났고 죽으면 지옥이 따로 없었다. 자비 없이 돌아가는 컨베어는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쉬지 않는 날은 일을 하면서, 거리를 걸으면서, 밥을 먹으면서, 꿈꾸면서 자나 깨나 두 가지만 생각했다. 어떻게 오랫동안 칼의 날카로움을 유지할지와 어떻게 하면 빠른 시간 내에 날을 다시 세울지였다.
시간은 어느덧 흘러 육류가공공장에서 일한 지 3개월을 꽉 채웠다. 한 자리에서만 근무한 덕으로 갈빗살을 낭비 없이 발라내고 아롱사태도 칼자국 하나 없이 모양 그대로 예쁘게 떼냈다. 컨베어를 쭉 돌면서 작업이 쳐지는 구간에 잠깐씩 투입되어 도와주는 매니저는 더 이상 내 자리에 투입되는 일이 없었다. 대신 내 옆을 지날 때면 엄지를 척하고 올렸다. 나도 고기를 떼면서 그들에게 같이 엄지를 올려주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칼날과의 씨름은 계속되고 있었다.
셰어하우스의 메이트들이 일부 바뀌었다. 몇몇은 나가고 몇몇이 들어왔다. 그간 고기 미는 일이나 내장 손질과 같이 나와 마주 칠일 없는 일에 배정되던 메이트들이었다. 보닝룸(Boning Room)에서 칼 쓰는 업무를 하는 한국인들이 몇 명 있었지만 우리 집에는 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한국에 돌아가서 정형을 하고 싶다는 동생 하나가 셰어 메이트로 들어왔다. 그는 매달린 고기를 손질하는 컨베어 앞부분에서 정형하길 원했다. 바로 내가 있는 자리였다. 매니저는 그의 얘기를 듣고도 컨베어 라인 끝단에서 고기 부위를 세세하게 나누는 공정으로 보냈다. 내 자리는 큰 고기 덩어리를 만지는 일이라 그의 몸이 왜소해서 그런가 싶었다. 게다가 3개월에 걸쳐 숙달된 내가 있는데 굳이 신입을 그 자리에 넣는 것도 리스크(risk) 기도 했다. 난 어디가 되었든 같은 보닝룸에서 작업하는 동료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일에 신이 났다. 일을 하다 고개를 들어보면 그가 일하는 모습이 멀찍이 보였다. 내가 고단한 만큼 그도 고단할 거란 사실이 위안이 되었다. 그동안 힘듬을 진심으로 공유할 사람이 필요했었다. 다른 파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칼 잡는 사람(칼잡이)의 힘듬을 이해시키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신입 동생은 일하면서 어려움을 많이 토로하였다. 나는 고기 잡는 요령부터 칼을 잘 가는 법까지 아는 한은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실제 칼을 갈았을 때 작은 각도 차이로도 칼이 잘 들고 안 들기 때문에 내가 하는 방법을 시연해주기도 하였다. 동생은 3개월 된 하찮은 경력으로 가르치는 나를 존경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배웠다. 별것 아닌 지식이라도 반짝이는 눈으로 듣는 그의 태도는 내 어깨가 으쓱해지게 했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었다. 동생은 자기가 일하는 파트의 한국인들에게도 내 얘기를 하였다. 일을 쉬는 날에는 그런 한국인들의 집에 초대받았다. 그들도 내가 우리 공장에서는 유일하게 매달린 고기를 손질하는 파트의 한국인 정형 노동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나에게 가르침을 받으려는 그들을 보며 지난 3개월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칼날과의 씨름은 계속하고 있지만 일에서 처지지 않으려고 애써온 노하우들이 그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좋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내 자리에 자부심을 느낀 적이 없었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든 자리에 배정이 되었냐고 원망을 했을 뿐이었다. 남보다 더 고민해야 했고 더 힘을 많이 써야 했다. 희한하게도 시간은 나를 이 일에 적응하게 하였다. 생각해보면 최소 하루 약 1,400마리 내외의 소를 100일간 처리하였으니 쉬는 날을 제외하고도 약 8만 마리가 나를 거쳐갔다. 이 고된 시간이 다른 이들에게 부러움을 받는 위치에 올려주었다. 한국 칼잡이들 사이에서의 나의 명성은 보닝룸에 신입 한국인 노동자들이 더 들어올수록 높아졌다. 그들에게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냥 어쩌다 일을 거기로 배정받아 버텼던 사람일 뿐인데 사람들은 마치 일을 잘해서 처음부터 그곳으로 배정받은 것처럼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고 사실을 말해도 그들은 여전히 나를 대단하게 봐주었다.
나는 명성에 걸맞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가며 정형 업무를 잘하기 위해 매일 연구하였다. 처음부터 일을 잘하는 사람은 없지만 한자리에서 꾸준히 노력하면 누구나 일을 잘하게 되어 있었다. 불과 몇 주 만에 나는 더 성장했다. 더 이상 칼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수준에 이르렀다. 이제 내 업무가 힘들다고 말하고 다니지 않았다. 나를 여기로 보낸 배정 담당자를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기회를 준 그들에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실력은 명성을 만들고 명성은 다시 실력을 만들었다. 그런 나와 함께 보닝룸의 한국인 칼잡이들은 모두 성장하였다. 우리는 더 쉽고 편하게 일하기 위해 방법을 고민하는 동료였고 서로의 힘듬을 이해하는 좋은 친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