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낯선 도시

바르샤바의 첫날

by 미 지

비를 좋아한다.

첫 발을 내딘 도시에 비가 내리고 있다.


우산도 쓰지 않고 서두르지도 않으면서 사람들이 지나간다. 소리 없이.

비도 서두르지 않으면서 내린다. 추적추적.


내 여행 캐리어만 드르륵 덜컥 덜컥 바닥을 긁으며 소리를 냈다.


열세 시간의 비행은 지루하고 힘들었다. 아직 항공편 성수기가 아닌 관계로 뒤쪽 칸으로 자리를 배정받았으면 편안하게 누워서 갈 수도 있었다는 건 비행기가 출발하고 한참 지나서 알았다.


바르샤바공항은 몇십 년 전 인천공항이 생기기 전의 김포국제공항을 떠올리게 했다. 도착장에서 내려서 대기 중이던 공항버스를 타고 족히 십여분을 달려서 공항청사로 들어갔다. 수십 명 정도의 입국심사는 신속했고, 나에게도 '며칠 머물 예정인가?' 하는 질문이 전부였다.

짐을 찾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수하물 컨테이너가 돌다가 가끔 가방을 서너 개씩 떨구고 멈추고 기다리고 그럴 때 주변엔 열서너 명의 사람들이 전부였다.


공항 편의점에서 30일 30기가 유심카드를 신용카드로 구입했다. 심카드를 구입해서 바깥에 있는 여행자센터로 가서 도움을 받으면 된다는 안내를 보았는데 편의점 직원이 여권을 달라 하고는 열심히, 천천히, 친절하게 등록을 다 도와주었기 때문에 여행자센터를 찾아갈 필요는 없어졌다.


Atm기로 현찰을 꺼냈다. 이중환전을 하지 않겠다는 선택이 있는 걸 모르고 진행하다가 한 차례 거부되기도 했지만 1000 폴란드 화폐 인출에 성공을 했다. 아침에 인천공항 환전소에서 환전한 100유로 한 장이 내가 가진 돈의 전부였기에 신용카드 이용이 안되거나 현금인출을 할 수 없게 되면 조금 복잡한 상황이 생길 터였다. 필요한 준비가 하나씩 완수될 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져갔다.


시내로 가기 위해 티켓 발권기를 찾았다. 바깥 버스정류장에 있는 기계는 폴란드 교통카드만 충전이 가능하고 발권 작동이 안 된다는 안내문이 떠 있었다.

다시 공항 안으로 들어가서 발권기 앞으로 갔다. 현지어를 쓰는 중년 여성과 젊은 여성 두 명이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75분 권 4.4 plz 결제 진행에서 화면이 멈추어있었으므로 그분들도 나도 티켓을 사지 못했다.

난 잠시 서서 다른 사람들이 그 발권기에서 티켓을 사는 것을 보고 따라 해보려고 했지만 젊은 남성 두 명이 기계 앞에 왔다가 멈추어있는 화면을 손으로 한두 번 건드려보다 돌아서 가는 것을 보면서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버스를 타서 버스기사에게 직접 돈을 주면 된다고도 하지만 내겐 방금 ATM에서 나온 100 plz 지폐뿐이다. 환율 300을 곱하면 3만 원 정도가 되는데 4.4 즈워티, 천오백 원이 채 안 되는 버스비를 지불하기엔 너무 큰 액면이었므로 택시를 타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택시 승강구역에 서 있는 배차 안내원에게 다가가 호텔 바우처를 보여주었다. 바로 다음 순서로 대기 중이던 택시를 배정받았고 색깔이 없어 보이는 초로의 여성 드라이버가 운전석에서 내려 배차안내원과 짧은 대화를 한 뒤 트렁크를 열고 내 가방을 실어주었다.

난 100 즈워티 지폐를 보여주면서 거스름돈이 가능한가 물었지만 택시를 배정해 주던 사람도 드라이버도 별다른 대답이 없으니 가능하다는 말로 알아듣기로 했다. 프린트한 바우처를 보여주겠다고 하니까 이미 배차안내원에게 갈 곳을 들어서 알고 있다는 대답을 한 뒤 그녀는 조용히 출발을 했다.


비 오는 골목길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그녀가 터키, 튀르키에 두 단어로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고가 난 지 11일이 지난 오늘 3명이 구조되었다며 기적이라고 말했다. 첫 두 단어에 생각이 멈추었던 나는 그것이 지진 관련 이야기라는 것을 두 템포가 지나서 깨달았고 그녀가 반복해서 '미라클!'을 두 번 말하고 난 뒤에서야 '아, 시리아?' 하고 핀트가 한참 지나간 단어를 뱉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골목길 운전을 시작했다.

천천히 그 말들을 이해한 나는 그냥 머쓱해져서... 튀르키에가 터키를 말하는 거냐고 몰랐던 것처럼 물었다. 그녀는 터키와 튀르키에는 같은 나라고 시리아는 다른 나라라고 말해주었다. 기적의 생존자 이야기를 하려다가 한번 비껴가버린 대화의 주제는 그렇게 나의 얕은 영어실력으로 인해 빗나가기 시작해서 나의 얕은 상식을 터치해 주는 것으로 한 번 더 뒤틀리는 마무리를 했다.

조용히 호텔에 도착했고 나는 100 즈워티를 건넸다. 그녀는 지갑 두 개와 주머니를 샅샅이 뒤져가며 잔돈을 만들어 내게 주었다. 20 즈워티 지폐 3장과 동전 몇 개. 40 즈워티가 채 안 되는 택시비 12000원 정도에 시내로 들어왔다.


호텔 체크인을 하고 우산을 쓰고 가까운 거리를 산책하다가 근처에 있는 태국음식점에서 볶은 국수를 달라고 했다. 혼자 일하는 식당 주인도 나만큼 영어를 못했다. 메뉴판 속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도 못 알아듣기에 그냥 내가 유일하게 아는 태국 음식인 똠양꿍을 포장해 달라고 했다.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려는데 결제가 거부되었다. 원화결제를 차단시켰으므로 현지화폐나 달러로 결제를 하라는 말도 그는 이해를 못 했다. 택시비를 주고 거슬러 받은 이십 즈워티 지폐로 계산을 마칠 수 있었다. 포크도 수저도 밥이나 누들도 추가하지 않은 딱 한 그릇의 뜨거운 수프. 피곤한 몸에 두 번의 기내식으로 조금 부어있는 위장, 시차 때문에 감기는 눈, 비 오는 스산한 날씨에 꼭 어울리는 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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