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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Nov 06. 2024

종종 길을 잃었다.

"나는? 당신이 다른 여자와 밤 바닷가를 단 둘이 걷는 걸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었잖아. 나는 뭐가 되는 거지?"


그는 가만 선 채로 계속해서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여자가 혼자 있는데  어떻게 안 챙겨주나?"

"그 여자가 내일 결혼할 네가 챙겨주길 바라서 온 거냐고 묻는 거잖아. 그 여자는 뭐가 되고, 나는 뭐가 되는 거냐고 묻고 있는 거잖아. 사람들이 볼 때 어떤 생각을 하겠느냐고!!!"

"너랑 걸어가면 친구들이 놀리잖아..."

"그래? 내일 나하고 결혼식을 하는 것도 친구들이 놀릴 텐데? 그건 무섭고 결혼할 여자를 앉혀두고 다른 여자를 챙겨주는 건 괜찮다는 거네?"


내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그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이 없었다.


"우린 결혼을 할 수 없는 거네. 결혼하지 말아야겠네."


조금 더 커진 내 목소리에 그의 눈이 동요 없이 살짝 작아졌다.


"난 절대로 너하고 결혼하지 않을 거야. 가서 네 부모님들한테 그렇게 말해! 우린 끝났다고!!!!"


난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불을 끄고 이불을 덮고 누워서 뒤척이는 내내 바깥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저녁식사를 하기 전에 미리 약속해 두었던 다음날 아침 여섯 시가 될 때까지.


지난밤 돌아갈 때 대충 입고 있던 옷이 말끔한 양복으로 바뀌어있었으니 그가 밤새워 밖에 서서 내가 화를 풀고 나오기만을 기다리지는 않았던 게 확실했다.


나를 납득시킬 의지도 없었고 내 화를 풀어줄 요령도 요량도 그에게는 없었다. 그저 고장 난 기계장치의 전원을 껐다가 쿨 타임이 지난 뒤 다시 켜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작동되는 것과 같이  모든 일상의 소동은 잠시 신경을 꺼 둔 사이에 저절로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인  그는 가만히 말없이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그 자리에서 자기가 할 일을 했다.


말의 오류도, 감정의 오류도, 행동의 오류도, 꼬인 인간관계의 오류도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 없었던 때로 돌아간다는 믿음 그 자체의 사람처럼 그러했다.


색깔이 다른 어떤 종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지만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서는 그 색깔이 담고 있는 채도라던가 명도라던가 농도 같은 것들에 대해 애초에 자각이 없었다.


색깔이 다른 존재라는 건 그에게는 '돈'과 관련된 것이었다. '돈'에 관한 일상의 어떤 언급에든 그는 정확하게 집중했고  기민하게 반응했다.


당시 12호봉을 받고 있던 내 월급의 명세표를 보지 않고도 내 급여가 얼마인지를 알았고, 내가 은행에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이라던가 내가 들어두면 이익이 되는 예금 상품들, 연말정산을 챙기기 위해 준비해 두어야 할 것들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하는 말은 '집안에 공무원 하나는 있어야 한다'였다.

자기 아버지가 공무원으로 퇴직을 하시면서 퇴직금을 연금으로 받을지 일시금으로 받을지 선택을 해야 할 때 주변사람들이 모두 다 연금으로  받으라고 권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퇴직금의 반은 일시금으로 받고 받은 연금으로 받았는데 퇴직한 지 몇 년이 되지 않아서 일시금으로 받았던 액수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받았고 앞으로 사시는 날 동안에도 계속해서 다달이 연금이 나오게 되어 있으며 행여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뜨시게 된다 해도 배우자인 어머니가 계속해서 절반 이상의 상속 연금을 받게 되니까 어마어마한 이익이라면서, 지금의 내 월급이 적은 것 정도야 앞으로 받게 될 연금을 생각하면 별 것 아니라고 말하고 또 말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의 장점이자 단점 하나를 꼽는다면 순식간에 몇십 년 정도는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저장된 기억의 폴더 속에서 필요한 내용을 필요한 부분만큼 발췌해서 붙여 넣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기능을 발휘해서 모든 부분에 대해서는 먹통인데, '돈'과 관련된 부분에는 하이라이트를 비춘 듯 몇 번이나 반복해도 늘 명료했던 그의 기억을 자주 찾아 꺼내보곤 한다.


점잖고 큰 소리를 내는 일이 없는 그가 회사에서 유일하게 따지다가 유별난 사원으로 찍힌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24시간 동안 탈 없이 기계를 관리해야 하는 직업의 특성 때문에 3조로 구성된 팀원이 교대 근무를 했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근무는 일근이었다. 저녁 6시에 출근을 해서 다음날 아침 9시까지 근무를 하는데 저녁 6시부터 밤 12시까지 6시간 근무를 야근, 자정부터 아침 9시가 될 때까지 9시간 근무를 조근으로 구분을 해서 일근, 야근, 조근으로 나뉘는 3교대의 근무형태였다. 일주일 근무표를 보게 되면 월요일 일근으로 시작하는 날엔 9시에 출근을 해서  저녁 6시에 퇴근, 다음날인 화요일 오후 6시에 야근 출근을 해서 그다음 날인 수요일 아침 9시까지 조근을 마치고 퇴근을 한다.  다음날인 목요일 아침 9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퇴근, 금요일 오후 6시에 출근해서 다음날인 토요일 아침 9시에 퇴근 후 일요일 쉬고  월요일 아침 출근으로 반복하는 근무형태다. 몇 달 간격으로 근무 조를 변경하면서 초과 근무 시간을 조정하기도 했다.

가끔 일이 생긴 직원의 휴무 근무를 대신해야 할 경우가 생기기도 했는데 그럴 땐 일근으로 출근한 직원이 저녁에 퇴근하지 않고 야근과 조근까지 24시간 근무를 하는 내부 규칙이 있었다. 그렇게 긴급한 대체근무를 하게 되는 경우를 '몰아치기'근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경조사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휴무일이 생길 때 대체근무자가 없는 그 시절에 형성된 회사 내규였으니 특별한 일이 없다면 서로에게 폐가 되는 휴가는 서로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땐 어느 회사든 너나 할 것 없이 '휴가'를 자유롭게 쓰는 일이 눈치 보이던 시절이기도 했다.

88 올림픽을 준비하느라 규모가 커진 방송국에도 해마다 많은 수의 신입사원들이 입사를 했다. 노동자의 임금, 권리, 휴무를 보장받기 위한 노동조합이 세워지고 체계적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생기던 시절이었다.

새로운 노동자의 권리를 머리와 가슴에 입력하고 입사한 남편은 방송국에 발령받지는 못하고 차가 없으면 출퇴근이 어려운 지방  변두리의 송신소로 발령을 받았다. 출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그의 머리와 가슴에 입력한 대로 권리를 주장했다.


"왜 보장된 휴가를 쓰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을  그는 '할 일은 하는' 신입사원이 되어서 '몰아치기'근무를 한 다음 '법으로 보장된 휴가'를 내서 산으로 들로 강으로 바다로 다녔다고 했다.


한 달은 30일이다. 휴일 없이 하루 8시간 근무를 한다면 근로시간은 240시간이고, 거기서 일요일 4일 치인 32시간을 빼면 208시간이 된다.  아침에 출근해서 다음날 퇴근하는 24시간 근무를 9번 하면 216시간이니까 초과되는 8시간은 그냥 수당으로 받겠다고 했다나.... 몰아치기 근무 한 달에 아홉 번이면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결론적으로 한 달 30일 중 18일은 출근 또는 퇴근을 하는 날이고 나머지 12일은 공식적으로 회사에 나오지 않는데 쓰겠다는 말이었다.


십몇 년의 세월이 가는 동안 3교대가 아니라 4 교대로 훨씬 무리가 덜 가는 근무형태가 갖추어졌지만 그 시절의 3교대는 정말로 사람을 혹사시키는 근무형태이기는 했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으되 절대로 입에 올리지 않는, 그보다 더 힘든 근무 형태는 지금 이 시대 우리 사회 곳곳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때 그의 말은 전후맥락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한치의 어긋남은 없는 말이었다.   


'사실 전달자'인 남편은 그 일에 대해서도 동요 없는 시선과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그때 소장이 나한테 말했어. '내가 저** 평생 승진 못할 근평 점수를 줄 거다. 그리고 평생 본사에 못 들어가게 만들어버릴 거다' 그랬거든. 아무튼 그래서 나는 이 회사에 있는 동안은 승진 못해."


대부분의 일상에 반응이 없는데, '돈'과 관련된 일체의 사항에 대해 반짝반짝 빛이 나는 남편과 대화하면서 나는 종종 길을 잃곤 했다.


아이 둘이 초등학생이었을 때 시어머니가 암수술을 하셨다.

간병인이 와 있는 두 달 정도의 기간 동안 시어머니가 우리 집에서 실 때 남편은 비번인 날 낮에 간병인과 장보기 정도의 일을 했다.

퇴근하고 나면 시어머님 드실 음식을 만들어드리고  아침에 눈을 떠서도 출근 준비와 동시에 시어머니 드실 음식을 차려드렸다.

아이들은 자기들 일을 스스로 하면서도 내가 일을  멈추고 자신들에게 시선을 주는 시간을 기다렸다.

아이들이 아빠에게 함께 놀아달라고 하면 그는 '아이들은 엄마를 더 좋아하니 자기는 같이 놀아줄 수가 없다'라고 했다.

시어머니를 돌보면서 아이들을 함께 돌보는 건 너무 힘들다고 말하면 '다른 여성들은 다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다른 여성들이 그런 것처럼 나도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현대 여성이라면 자기 직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라고 그는 그 자리에서 표정을 바꾸지 않으며 연이어서 말했다.


화가 났다.

그런데 그의 말은 어쨌든 앞과 뒤는 맞았다.


앞 뒤가 다 맞는 그 사이의 길게 빈 틈을 채워 넣을 수 있는 방법이 내게는 없었다.

아마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의 그러한 빈 틈을 채워 줄 수 있는 비법 같은 걸 갖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하는 그런 말의 앞과 뒤, 넓고 긴 그 틈 사이에서 나는 자꾸만 길을 잃고 또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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