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 지 Nov 13. 2024

질문은 어쩌면 자기 고백

'아이러브스쿨' 열기가 한국을 휩쓸던 시절에 나 또한 그 사이트를 통해 초등학교 동창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이십 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친구들 중에는 한 번도 같은 반이었던 적이 없었던 처음 만나는 친구들도 많았다. 식사를 하며 각자 자기소개를 할 때 당시 모교에서 근무하고 있던 내가 그런 내용을 말하며 내 소개를 했다. 한 친구가 눈을 샐쭉하게 뜨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 너. 선생이었어? 난 선생은 좀... 별로... 안 그래?"

그 친구가 옆 친구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주변 친구들이 의아하게 그 친구를 쳐다보았다.


"응? 뭐가? 선생이 왜 별로야?"

 한 친구가 물었다.


"선생은... 촌지 받잖아!"

그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


촌지라... 그 친구는 어쩌다 '선생'이라는 직업군에 대해서 딱 그 한 단어로 규정지어 말할 수 있게 되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자원활동가 모임에 나갈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곱고 앳된 남매가 모임에 나오게 되었다며 자기소개를 했다.  길고 풍성한 머리에 또렷한 이목구비의 누나와, 그 누나를 꼭 닮은 흰 피부의 남동생이었다. 어느 날 모임 장소에서 눈에 띈 피아노의 뚜껑을 열고 앉은 나는 내가 칠 줄 아는 유일한 한 곡, '젓가락 행진곡'의 앞부분을 띵똥거렸다. 그때 그 남매는 마치 별이 반짝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누나가 나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와! 언니! 선생님이라면서요? 피아노도 잘 치고... 언니네 집 부자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에 의하면 그 남매의 집이 어느 해였나 불이 나서 생활 터전이 다 타버렸다는 뉴스 속 서울 어느 달동네의 비닐하우스 촌에 있다고 했다.

'아, 이 아이들은 모르는구나. 내가 모질게 버티며 살아온 나의 유년 환경 같은 것들. 그런 구차한 것들은 지금 '현재' 찍히고 있는 나의 스냅샷 속에는 나타나지 않는 거구나.' 그런 각성이 낯설고 새삼스러웠지만 나는 그냥 미소로 답을 하며 넘겼다.


가난한 이웃을 향해 온정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은 그 처지와 형편을 마음 깊이 공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돈을 기부하는 사람도 더없이 어려운 결단을 낸 사람들일 테지만 시간과 힘을 모아서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를 돕고 이동을 돕는 마음은 그런 깊은 공감이 없이는 쉽게 만들어 낼 수 없는 마음일 것이다. 그럼에도 동남아의 어느 가난한 나라에서는 한동안 고아원을 후원하지 말아 달라는 캠페인이 있던 시기가 있었다. 가난해서 도움이 필요한 나라이기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정의 손길을 모으는 중이었는데, 분명 부모가 있는 아이들이 고아원에 보내져서 후원금을 받는 수단이 되어버리는 부작용이 발생되고 있다는 사유였다.

유서 깊은 돌사원 유적지를 방문하다 보면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아이들이 여행객들 앞에 나타나서 부채나 키홀더 같은 기념품들을 내밀고는  '1달러, 1달러~' 하며 따라다니곤 했는데, 그 아이들이 파는 물건은 사 주지 말라는 당부도 함께였다.

그 시기에 그 나라에 다녀왔다.


가난한 누군가를 향한 온정의 손길 또는 무언가를 기부하거나 하는 그런 활동은 아니었다.

봉사활동 단체를 조직해서 봉사자에게 숙소와 식사와 이동 수단을 제공해 주면서 도움이 필요한 기관을 연결해 주는 사회사업을 하는 민간단체들 중 하나를 선택해서 한달살이 '볼런투어'를 했다.

여섯 명이 한 팀으로 묶여서 전통 시장 투어 일정을 하던 날에 97년생의 현지 여성 디렉터가 동행을 했다.

신발, 옷, 야채, 고기 판매대, 미용실과 식당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시장 코너를 돌 때마다 젊은 엄마들이 자신들의 물건을 팔기 위해 잰걸음과 날렵한 시선처리, 크고 또렷한 목소리로 행인들을 불렀고 활기차게 뛰어노는 아이들이 그 엄마의 주변을 뛰어다니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양이 어린 시절의 내가 자란 곳과 전혀 달리 느껴지지가 않아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던 나는 옆에 있던 그 현지 디렉터에게 '이건, 내가 어릴 때 살던 우리나라 한국의 모습과 다르지가 않은 익숙한 풍경'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무표정하게 내 눈을 한 번 바라보더니  '한국은 너무 잘 사는 나라인데, 이런 풍경을 익숙해한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다'라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녀는 나에게 그게 정말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렇지만 질문은 나를 바라보는 무표정한 시선 속에 담아 두고 자기 고백을 담담하게 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대화를 통해서 사람들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들은 얼마나 작은가!

평생을 살아온 내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 또한 얼마나 작은가!

상대에 대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대부분의 질문에 들어 있는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이라는 것은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지내본 뒤에서야 알아지는가!

내가 얼마나 가난하고 불결하고 불편한 환경에서 자랐는지에 대해 상대방에게 설명하는 일 같은 건 또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그랬다.

나를 향해 질문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고백을 하고 있었다.

오늘의 내가 현재까지 살아온 나에 대한 고백.

그러니 내가 매일 남편을 향해 던지는 질문도 피할 수 없이 자기 고백일 뿐이었다.


"아버님이 공무원이시잖아. 지역이지만 집안일 도와주는 사람도 몇 명 함께 하는 규모 있는 집안이잖아. 그런데 그런 부모님을 두고 자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에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어? 음식투정은 하지 말라는 말은 초등학교 때 학교교육으로도 받고 가정교육도 당연한 거잖아. 그런데 어떻게 나와 우리 부모님, 내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식사자리에서는 한 번도 안 빠지고 한 가지도 안 빠뜨리고 그렇게 음식 투정을 할 수가 있는 거지? 나는 정말 존경스럽기까지 해. 모든 반찬의 재료를 그렇게 완벽하게 꿰고, 모든 음식의 소금 맛을 그렇게 완벽하게 체크해서 알려줄 수 있는 당신 표현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너무하잖아. 이야기할 게 음식 투정뿐이라면 같이 밥을 먹을 수가 없잖아!"


그러면 그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잘 먹잖아!"


그는 조금은 착하고 마음이 약했다.

어느 날 우리 집에 찾아온 동생 식구들과 쌈밥 집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절대로 음식 투정을 하지 않겠다고 몇 번을 약속하고 나간 자리였다.

우리 아이들 둘, 동생 아이들 둘. 그렇게 여덟 명이 고기를 구워 쌈을 싸 먹으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웃음이 가시질 않는 식사를 하고 있었다.

고기를 굽던 남편이 갑자기 말이 없어지더니, 예의 그 '미간 주름'이 잡혔다.

이런 표정을 보이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당황한 내가 남편의 얼굴을 보았고, 그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미 잘 알고 있는 동생도 남편의 얼굴을 보았다.

"여기요! 이것 좀 보실래요?"

남편이 음식을 나르고 있는 식당 주인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가 우리 테이블에 왔다.

"네, 손님! 뭐가 필요하세요?"

"이거 말입니다. 이 고기. 식당에서는 1인분에 200그램이잖아요. 그런데 여기 이게 200그램이 맞나요? 아무리 봐도 200그램이 안 되겠는데요?"

"네, 손님. 여기는 쌈밥집이라서요. 일반 고깃집이라면 1인분이 200그램이지만 여기는 쌈 채소 위주라서 고기는 맛보기 정도로만 나가기때문에 일반 고깃집처럼 200그램이 되지는 않습니다. 보통 다른 손님들께서는 고기를 더 추가해서 드십니다."

"아니, 그런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고깃집이든 쌈밥집이든 고기 1인분은 200그램이 정량 아닌가요?"

동생이 얼른 식당 주인에게 말했다.

"여기, 고기 4인분 추가해주세요. 우리 매형이, 고기가 맛있었나 보네!"


식사를 다 마치고 동생이 음식 값을 계산하고 나와서 헤어진 뒤 나는 남편을 향해 쏘아붙였다.

"음식 투정 하지 않기로 했잖아! 또 이게 뭐야!"

그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음식 맛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잖아. 음식 투정 하지 않았는데 왜 그러지? 식당 주인이 고기 중량을 속이니까 그냥 그걸 지적한 것뿐이야!"


그의 질문과 나의 질문 그 사이에는 늘 너무 넓은 간격이 있었다. 내 질문은 남편에 대한 섭섭함과 좀 넉넉한 성품을 보고 싶다는 자기 고백인데, 남편의 질문 속에는 어떤 고백이 담겨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의 질문 속에서는 어떤 것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자라온 환경도, 그가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나 나에게 기대하는 것도, 아니면 다른 어떤 의미라도 담겨있지 않은 듯했다.


단 하나가 있다면 사람에 대한 깊은 불신과 그것을 덮고 있는 마음 약한 본심 정도였다.


작은 아이를 등에 업고 큰 아이 손을 잡은 채 앞서 걷는 남편을 따라 걷는 일도 가끔 있었다.

보행자 신호로 바뀌기 직전의 횡단보도가 보이면 그는 후다닥 달려가서 우리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얼른 와! 신호 바뀐다!"

등에 아기를 업고, 아장아장 걷는 아기 손을 잡고 빨리 걸어가서 보행자 신호를 놓치지 않고 남편의 보폭을 따라 횡단보도를 건너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몇 번을 반복해도 알지 못했다. '질문'같은 '성냄'이 몇 차례가 지나간 뒤, 드디어 밖에 나가 길을 걸을 때면 본디 선한 마음의 소유자인 남편이 두 아이 중 한 아이를 안고 걸을 수 있게는 되었다.






이전 06화 종종 길을 잃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