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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Nov 20. 2024

'당신은 내가 죽었으면 좋겠지?'라고?

"가스점검은요, 저 오븐 뒤쪽 가스관을 확인할 수가 없어서 점검 미완료로 결과가 나오고 있거든요. 사장님께는 설명드렸는데..."

도시가스 안전 점검을 나온 검침원이 약간 긴장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도시가스를 쓸 수 없게 되는 건가요?"

"그건... 사용하시는 데는 문제없지만 오븐 뒤쪽 배관을 뜯어서 확인할 수가 없으니..."

"오븐 배관을 뜯어야 하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만 가스 누출 사고가 생길 수도 있으니...."

"그럼 배관을 뜯을 수 없는 상태에서 저희가 지금 할 수 있는 대처는 뭐가 있을까요?"

"지금 사장님 댁 주방에 가스 타이머가 설치되어 있잖아요. 그거랑 같은 건데 '디벨타이머'라고 하는... 사장님께도 말씀을 드렸지만...타이머 기능만 있는 게 아니라 유사시에 가스를 차단해 주는 기능까지 있는 거니까...그걸 설치하시면 되는데... 인터넷으로 십삼사만 원 정도..."

휴대폰을 열어서 인터넷 화면으로 디벨타이머를 검색하는 나를 보며 그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끝이 하나같이 마침표를 찍지 않은 상태의 말줄임표처럼 흐리게 처리되고 있었다.

디벨타이머 검색 페이지를 열고 그것이 맞느냐고 묻는 나에게 그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네. 그게 맞아요. 저희 회사에서도 그 제품을 그 가격으로 설치까지 해 드리고 있으니까 충분히 비교해 보시고, 다음에 설치하게 되신다면 고객센터에 문의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여기 점검표에 사인 부탁드려요.

검침원은 마지막 말은 정확하게 마침표를 찍듯 말을 했고 조심스럽게 내 서명을 받은 다음 인사를 하고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지난 7년 동안 집안의 모든 일 처리는 남편이 맡아서 해 왔었다.

고장 난 냉장고와 에어컨과 보일러를 새로 구입해서 설치하고, 쿠션이 망가진 소파를 AS센터에 연락해서 수선을 하고, 아파트 정기 소독을 받고, 매달 일정에 맞추어서 정수기 점검과 청소를 받다가 정수기를 해체한 뒤 자가교환 필터 정수기를 설치하고, 관리실 안내에 따라 도어록 시스템을 교체하고, 막힌 하수구와 화장실 수전 교체를 하기 위해 설비 기술자와 연락을 하고, 위층에서 누수된 집 천장과 화장실 수리를 하고 보상을 받고, 누수된 아래층 집수리와 보상을 해 주고, 강아지들이 차례차례 세상을 떠난 뒤 망가진 온돌마루 바닥에 하나하나 시트를 사다가 붙이는 일 등 이전에 내가 하던 일들을 다 그가 해 오고 있었다. 어떤 부분은 분명 내가 하는 것보다 더 꼼꼼하고 정확하게 하기도 했지만 화장실 욕조와 베란다와 유리창을 청소하는 일, 묵은 때가 낀 가스레인지와 냉장고와 김치 냉장고와 세탁기를 청소하는 일은 가끔 집에 들르는 내 담당이었다.


오늘 가스 점검을 받기로 예약이 되어 있던 남편이 나에게 대신 점검을 받아 달라고 부탁을 하고 외출을 했으므로 칠 년 만에 처음 내가 받게 된 도시가스 안전점검이었다. 따라서 언제부터였을지 모르는 '미완료' 내용에 대해서 검침원에게 설명을 듣는 일은 내겐 오늘이 처음이었다.


오후에 귀가한 남편에게 그 '미완료' 내용에 대해 물었다.

남편은 벌컥 불편한 표정과 불쾌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거, 저 오븐을 뜯어야 한다잖아. 가스 점검을 하려면 오븐을 뜯어야 한다니 그게 말이 돼?"

"그래서, 점검원이 오븐을 뜯지 않고 디벨타이머를 설치하는 방법도 있다는 설명을 해 주지는 않았어?"

"그게 뭔데? 난 처음 듣는 말이야."

그때 나는 비로소 그 이야기를 설명하던 검침원의 약간 긴장하고 걱정스러운 표정과 말줄임표의 의미를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도 아는 거였다. 이 사람은 자신이 설명하는 내용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 않고 단지 '오븐 뒤쪽 배관을 뜯어서'라는 전제에 깊이 화를 내느라 이야기가 온전히 전개가 된다면 다음 순서에 언급하게 될 '디벨타이머'에 대한 내용은 비싼 타이머를 팔아넘기려는 상술로 치부해 버리고 공격을 하곤 했으므로 늘 '미완료'라는 말에서 멈춘 뒤 몇 마디의 투덜거림을 들어야 마무리가 된다는 것을.


"늘 같은 내용을 당신한테 말해 주었다는데, 디벨타이머에 대한 것도 이야기했을 거 아냐?"

내가 묻자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여기서 또  '생전 처음 듣는 말이다'라는 말을 내뱉었다가는 내가 그 검침원을 부르고 정말로 그것에 대해 이 사람에게 말한 적이 없느냐 물을 것이라는 것 정도는 이제 알게도 되었으므로  남편은 아주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저 타이머랑 같은 기능에 도시가스 차단 기능까지 있다는 디벨타이머 말이야. 그걸 자기한테 말하지 않았을 거라고 나는 생각이 들지를 않는데? 인터넷에서 구입해서 설치할 수도 있고 이 도시가스 회사 고객센터에 연락을 해서 설치할 수도 있다고 해서 내가 안 그래도 타이머가 거의 수명을 다 해가고 있으니 바꿀 때 그것으로 알아보겠다고 말했는데.... 정말 처음 듣는 말이야? 디벨타이머?"

허공에 일렁이던 남편의 동공이 멈추었다. 검침원이 언젠가 했을 그 말의 의미가 이제 천천히 그의 사고 체계 속으로 스며들어 가면서 드디어 우리 집 도시가스 안전점검의 문제와 해결법에 해당하는 인식의 방 하나가 마무리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시가스 점검 미완료' 이유 : 오븐 뒤쪽 배관은 확인할 수가 없음.

도시가스 점검 미완료에 대해 우리가 해야 할 조처를 하지 않았을 때 불이익은? : 없음.

계속해서 그냥 이 상태로 도시가스를 사용하게 된다면 생기게 될 예상 가능한 우려는? : 확인할 수 없는 이유로 미정의 시기에 오븐 배관을 통해 가스 누출 사고가 발생될 가능성은 있음.

해결법은? : 1. 무시하고 그냥 지내기

                2. 오븐 뒤쪽 배관을 확인할 수 있게 조처한 후 점검 완료를 받기.

                3. 디벨 타이머를 설치해서 가스 누출이 될 경우 도시가스 자동 차단 시스템을 갖추기.


드디어 그의 인식 체계에 장착된 이 '이해'의 방을 통해 몇 년이 걸렸을지 지나온 시간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도시가스 검침원은 다음 점검부터는 조금 더 수준 높고 이해가 가능한 단어를 사용하며 대화를 하는 남편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또 서너 단계를 건너뛴 '분노'가 올라오고야 말았다.

길게 잡아서 칠 년의 기간. 그것도 도시가스 안전 점검을 하는 일 년에 두세 번뿐인 단 몇 분 간의 만남을 통해서도 남편은 점검원에게  '낯선 반응'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들키고 있었다.

그를 낳아서 기른 그의 부모와 그의 모든 성장 과정을 알고 있는 형제들이 그것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

줄곧 남편을 '현금 지급기' 정도로만 취급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좋은 학벌과 좋은 직장으로 검증이 완료되었다고 믿은 내가 그와 결혼을 할 때 시댁 식구들은 '두 대의 현금 지급기'가 생긴 것처럼 우리를 대했었다.

내가 쉽게 그런 상황을 수긍하지 않고 따르지 않았을 때 나는 가차 없이 그들의 입방아에 헐벗은 상태로 오르내리곤 했었다.


그렇게 지난주에 도시가스 안전점검을 받다가 '디벨타이머'로 시작된 남편의 세상을 보는 '다른 부분'에 대해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공격을 하다가 미안해지고야 말았다. 처음 접하는 단어에 대해 인식의 방을 만드는 일은 대부분 무척 힘들어하곤 하는 사람 아니었던가. 내가 지금 그 단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이 사람과 나에게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마음이 입을 다물게 했다.


내 잔소리 공격을 받을 때면 남편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없이 있다가 내 공격이 멈추는 시점이 되면 자기 혼자서 스르륵 내가 화를 낸 모든 것들에 대해 초기화 버튼을 눌러버린다. 마치 야단을 맞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그렇게 하는 것처럼. 화를 멈춘 엄마에게 처연하게 다가가 평상시와 다름없는 애교를 던지며 일상을 다시 보내는 아이처럼 내가 화내기 직전의 일상 이야기로 곧바로 되돌아가곤 하는 것이다.

그러니 디벨타이머로 인해 화를 내던 내가, 그런 김 빠진 결과가 예상되는 공격을 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으로 잔소리를 멈추게 되는 틈을 놓치지 않고 그는 다음 주에 회사에서 직원 복지로 예약을 해 놓은 리조트로 단풍여행을 가기로 한 것을 잊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의 눈도 바라보지 않았고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것을 승낙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항상 이런 반복이었다. 내가 화를 내다가 그칠 때까지 그는 조용히 앉아서 시간을 보낸다. 처음 몇 번은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써보는 것 같지만 이제는 안다. 그는 그냥 내가 제 풀에 꺾여 입을 다물 때까지 상황에 대해 묻지도 않고 설명하거나 이해하지도 않고 그냥 앉아있는 거다. 과열된 기계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쿨다운 상태가 될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이므로. 때론 좀처럼 화가 가라앉지 않아 두 달이 넘도록 성을 낼 때도 있었다. 그때도 그는 그 두 달의 시기를 그렇게 보냈다. 조금 긴 고장이 난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고쳐지기도 한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그게 7년이 되었을 때도 똑같았다. 7년이 조금 긴 세월이라고 투덜거리기는 했다.

그러다 보니 도시가스 디벨타이머 정도의 작은 이슈는 삼십 분 정도의 잔소리로 끝난다는 것은 이제 경험으로 아는 그였기에 내가 그 사건에 대해서는 진정되는 듯 보이자마자 곧바로 다음 주에 가게 될 단풍 여행에 대해 물을 때에 난 더이상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오늘의 화는 이것 한 번으로 종료하겠다고 말을 한 뒤였으므로.

결과적으로는 그의 판단이 옳았다. 그 다음 주의 단풍 여행을 함께 떠나왔으니까.


그래서 한 주가 지난 날 여행을 떠나와서 이른 아침에 단풍이 잘 보이지 않는 산 하나를 둘러보고 난 뒤 조금 늦은 아침 식사를 하고 제대로 물든 단풍을 볼 기대로 두 번째 산을 찾아가기 위해 시동을 거는 차 안에서 남편이 회사 복지와 동료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말 한마디에 나는 또 덜컥 가속 페달을 밟아버리고야 말았다.


허름한 식당에서 예상 밖으로 입에 맞는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아진 남편은 차에 앉아 시동을 걸고 차가 예열 되기를 기다리면서도 무척 기분이 좋았다.

"정말 재미있는 말을 들었어. 회사 후배가 노후대비를 하느라 엄청 열심히 살고있는데 아무리 따져봐도 나중에 받게 될 국민연금이 너무 적어서 걱정이라고 와이프랑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싸움을 했대. 와이프가 막 화내면서 '당신은 내가 죽었으면 좋겠지?'했대. 하하하..."


'내가 죽었으면 좋겠지?'라는 말을 하면서  부부 싸움을 했다는 회사 동료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는 남편 얼굴에 재미있다는 미소가 한가득 했다.


나는 이제 안다. '내가 죽었으면 좋겠지?'라는 말을 어떨 때 어떤 사람들이 사용하는지를.

나는 안다. 남편이 어떤 이야기를 잘 이해하고 재미있어하며 평소에 보이지 않는 껄껄 웃음을 짓는지를.


"당신은 '디벨타이머'에 대해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  나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지?' 하는 말이 어떨 때 나오는 말인지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어."

남편의 눈빛이 알듯 모를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구나, 이번엔 또 무슨 잘못을 한 거지?' 그렇게 묻는 표정이지만 입은 다문채로.  



28년 전의 4월에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고 6월 무렵 혼인신고가 된 가족관계 증명서를 발급받았다.

결혼 두 달이 된 신혼부부의 집에 다니러 오신 시어머니께서 조금 낯선 말을 하셨으므로 나는 잠시 그 뜻을 헤아려보아야 했다.


"우리 옆 집 딸이 선생이었어. 결혼을 시켰는데 어느 날 그 선생이 교통사고가 나서 응급실에 입원을 했거든. 응급실 앞에 친정 부모랑 같이 앉아서 딸이 일어나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만 죽어버렸다고 하더라고. 친정부모가 정신없이 울고 있는데 시부모가 아들이랑 병원에 도착하더니 며느리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보상금은 우리가 타는 거니 그리 아시라'라고 친정 부모에게 말하면서 앵 돌아서 가더라. 나, 참. 며느리가 죽으면 그 보상금은 죄다 시댁으로 간다더라?"


남편이 나와 함께 그 말을 듣고 있었는데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결혼한 지 두 달 된 새색시였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머뭇거리다가 저녁상을 차렸었다.


나중에 남편에게 그날의 그 대화에 대해 내가 물었을 때, 그는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에는 없지만 그냥 어머니가 선생 며느리 본 것이 좋아서 하시는 말씀인데 너무 심각하게 생각한다며 나를 힐난했다. 그러면서 '집안에 공무원 한 명은 꼭 있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집안에? 공무원?

그 말을 이해하는데 조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남편에겐 형님 한 분이 계셨었는데 군대에서 사고를 당해 상이군인이 되어 제대를 하셨다고 했다. 그 형님께서 상이군인 연금을 받으시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자식의 상이군인 연금은 부모에게 상속이 되므로 시어머니께서 그 형님의 연금을 받고 계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내가 결혼한 뒤 3년이 되었을 때 공무원으로 퇴직하시고 공무원 연금을 받고 계시던 시어버지께서 갑작스러운 폐암 발병으로 두 달 만에 급하게 세상을 뜨셨다. 시아버지께서 중환자실에 입원해 계실 때 '피주사'를 놓아야 하니 동의서를 작성해 달라고 간호사가 가족들의 서명을 받고 돌아설 때 시어머니께서 그 간호사의 뒷머리에 조용히 말씀을 하셨다.

"소생시키지도 못할 거면서 환자도 가족도 다 고생시키는 피주사는 뭣하러 놓겠다고 하느냐?"

나중에 그 간호사가 나에게 물었다.

"그분, 새어머니셔요?"

마침내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아들의 상이군인유족연금과 남편의 공무원유족연금 두 계좌를 한꺼번에 받게 되신 시어머니는 식구들이 모이면 나날이 노쇠해 가고 병들어가는 신세를 한탄하시며 말씀하셨다.

'나 같은 사람은 천년만년 살아야 하는데...'


"그게 그런 의미잖아. '내가 죽었으면 좋겠지?' 라는 그 말 말이야."


신혼 2개월의 새 며느리 앞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던 시어머니에게 그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 후의 마음 상함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가끔 생각하고는 했었다.  나는 그때 화를 냈어야 했다. 화를 내야 할 때 상대방의 말속에 담긴 저의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섬찟하고 낯선 표현이어서 천만 개의 물음표를 다느라 놓쳐버렸던 말.

"아하! 그럼 어머니는 제가 이제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때 그렇게 물었어야 했다.  반드시 그렇게 물었어야만 그분은 이후에 벌어진 모든 상황들에서 약간은 조심해 보려는 마음 같은 것을 가지실 수도 있었을 것이었고, 그랬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남편의 저 말에 내가 벌컥 화를 내는 일 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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