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남편의 친구들이 토요일 경포 바닷가 근처의 호텔에 숙소를 정해서 결혼 전날을 함께하기로 했다. 호텔 방 여러 개를 잡아서 친구들이 지낼 수 있게 해 주었으나 아마 하루 먼저 내려왔던 친구들은 우리가 지불해 준 방 값보다 더 많은 비용을 썼을 텐데 그런 사정은 세월이 훨씬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사람들 사이의 살아가는 이야기들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 수도 없을뿐더러 많은 부분은 알면서도 모르는 듯 지내게 된다. 그러니 오랜 세월을 살아가다 보면 세상에는 내가 알게 모르게 쌓아 놓은 빚들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위해 베푼 것보다 내가 누군가에게 받은 것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하나의 억울한 사연들에 집중을 하고는 삶의 많은 부분을 고통스러워하며 시간을 산다. 나도 그런 사람들과 다르지 않아서 남편과 지내는 동안 억울했던 사연들에 집중을 하고 매일매일 따지며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 시작이 바로 그날, 결혼식 전날이었던 토요일 밤의 경포 바닷가였다.
먼 곳에서 하루 먼저 우리의 결혼을 축하해 주러 온 친구들이 각자 정해진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에 모였다. 두 아들을 데리고 부부가 함께 내려와 준 나의 고등학교 동창은 이른 저녁 식사를 한 후에 아이들을 재우러 방으로 들어갔고 대학 동창과 직장 친구가 함께 내 곁에 남아있었다. 남편의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식사를 시작 한지 한두 시간 정도가 지날 무렵에 남편이 속해있던 볼링동호회 회원들이 도착해서 합류를 했다. 승합차 한 대로 내려온 여섯 명의 회원들 중 여자회원도 한 명이 있었는데 모두들 전에 한 번 만나서 인사를 나눈 사람들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에는 없지만 젊은 남녀 여럿이 친구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서 결혼식 뒤풀이가 아닌 앞풀이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앉아있던 운치 있는 봄날 저녁의 밤바다였다.
나는 왼쪽에 앉아있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오른쪽 옆자리의 친구와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줄곧 말이 없던 그 친구의 옆얼굴이 창백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먼 곳 밤바닷가를 응시하는 그녀의 당황한 시선의 끝을 나도 천천히 따라가 보았다. 멀찍하게 떨어져 있는 그 시선의 끝지점에는 내일 나와 결혼을 할 남편의 뒷모습과 늦게 온 볼링동호회 회원 중 홍일점인 그 여자 회원의 뒷모습이 나란히 서 있었다. 어두운 중에도 환하게 밝혀진 조명은 모래사장에 남아있는 두 사람의 발자국을 길게 비추고 있었다. 나도, 내 옆의 친구도 말이 없어졌다. 다른 친구들도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잠시 뒤 그 둘이 돌아왔다. 식사 자리는 주섬주섬 마무리가 되었고 친구들이 저마다의 숙소로 돌아간 뒤 나도 내 숙소로 돌아왔다. 남편이 나를 숙소까지 바래다주겠다며 따라왔다. 다음날까지 나와 함께 하면서 결혼식 일정을 챙겨주기로 한 친구가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아야 할 것 같아서 어두운 골목 구석에 멈추어 서서 아주 화가 난 목소리와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굳이 그 바닷가를, 굳이 그 여자 회원과, 굳이 단 둘이 걸어가는 모습을 꼭 그렇게 모두에게 보여주었어야 했느냐고 나는 물었다.
먼 곳에서 여자가 혼자서 내려왔는데 어떻게 그냥 모른 척을 할 수 있느냐고 그가 답했다.
그 먼 곳에서 여자가 혼자 내려올 때, 바로 내일 결혼하게 될 그 남자가 자기를 챙겨주기 원해서 온 것이냐고 나는 물었다.
별 것 아닌 일로 유난을 떤다며 그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말을 이어갔다.
나는 무척 화가 났고, 아마도 격앙된 말투로 여러 가지 못마땅한 이야기들을 하다가 '내일 결혼식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 뒤 울면서 친구가 먼저 들어가서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사실 전달자로 이야기를 이어가던 남편은 일방적인 내 성냄과 종료 선언에 대해서도 아무 액션이 없었다. 휴대전화가 드물던 시절이었다. 그는 그냥 본가로 들어갔다가 다음날 새벽에 나를 데리러 왔다.
그에게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는 밤이었던 것이다.
나에겐 영원히 끝나지 않을 긴 밤이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나는 그날을 떠올린다.
그대로, 결혼식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먼 곳으로 가버리겠다고 흐느껴 울면서 여러 번 다짐을 해보았지만 엄마와 아버지가 이 강원도까지 손님들을 모시고 내려오기 위해 버스를 대절하고 간식거리를 맞추고 친척과 친지들에게 청첩장을 보내며 연락하던 모습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아침 일찍부터 분주하게 서둘러 내려오시게 될 부모님이 내가 없는 결혼식장에서 일가친척과 친구분들과 직장 동료들을 맞이하게 될 황망한 장면들이, 그다음에 생길 감당 못할 일들이 시커먼 파도처럼 예상 못할 두려움 덩어리가 되어 밀려들어왔다.
퉁퉁 부은 얼굴로 새벽을 맞았다. 말끔한 양복을 입은 그는 문 앞에 서서 호출 벨을 눌러 약속된 시간이 되어도 나오지 않는 나를 불렀다.
어릴 때부터 내게 익숙했던 장면은 엄마가 아버지를 향해 큰 소리로 간밤에 집에 들어오지 않고 술에 취해 도박장에서 잃은 돈에 대해 따져 말하면 턱을 치켜들고 눈을 내리깐 채 엄마를 흘겨보던 아버지가 손을 높이 올리고는 인정사정 보지 않고 엄마의 얼굴을 때리는 것이었다.
나는 거의 내 엄마의 모습으로 남편의 사사건건에 대해 따졌다.
그러나 남편은 어떤 경우에도 내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앞뒤가 맞지 않는 답일지언정 어쩐지 타당해 보이는 이유를 대며 감정의 동요 없는 사실 전달자의 모습을 한 번도 잃지 않았다.
나는 도망가지 못했다. 문제가 생겼을 때 한 번도 큰소리를 낸 적이 없다는 그것 하나 만으로 그는 충분히 견뎌볼 만한 상대가 아닐까? 그렇게 자꾸 나의 내면에게 속삭였다. 그 한 가지뿐이라면, 어쩌면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그와 충분히 이야기가 통하는 접점을 찾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이른 아침의 웨딩 촬영을 마쳤고, 버스를 타고 오신 부모님과 친척들과 지인들을 맞이했고, 예식을 올렸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그때의 이야기를 한다.
남편에게, 친구들에게.
남편은 이미 오래전 일이라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날의 사실을 곁에서 보았던 친구는 우리가 갱년기에 접어들어서 각자의 남편에 대한 상념들이 동료애 정도로 정착되어 가는 시점이 되었을 때 내게 말했다.
"있잖아, 사실... 나 남편 때문에 너무너무 힘든 날이 많았었어.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기조차 싫다는 생각이 들 때면 네 생각이 나더라. 결혼식 전날 네 남편이 어떤 여자랑 둘이서 바닷가를 걸었잖아. 그 모습이 생각나곤 했어. 그래.... 너도 사는데.... 그런 너도 사는데... 그렇게 네 생각을 하면서 힘든 날을 버텼다."
그날의 일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가 그동안 견뎌왔던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날의 이야기를 시작하면 사람들의 표정과 말은 다양해진다.
"뭐야? 뭐지? 왜 그러지?"
그렇게 말을 하며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위기의 부부' 스토리가 수 백 가지는 스쳐 지나가고 있다. 그런 내용이란 걸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하면, 일단 내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그 자리에서는 더 이상 별 말이 없이 웃으며 화제를 돌린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그의 주변인들과 제법 맛있는 양념이 섞인 화젯거리로 오르내리다가 별로 오래지 않은 날 뒤에 내 귀에 약간 각색된 이야기가 되어 들려오곤 했기 때문이다.
"야! 실망이다. 어떻게 남편을 그런 식으로 뒷담화를 하지? 다른 사람들도 그 정도 문제는 다 갖고 살아. 지혜롭지 못하다, 넌.."
그렇게 비난하고 돌아서는 친구도 있었다.
"에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이렇게 생각해 봐. 여자와 남자라고 단정 짓지 말고. '여자'와 '남자'가 아니라 그냥 두 사람이 잠깐 밖에 나와있다가 우연히 바닷가를 걷게 된 거잖아. 그게 뭐 그리 별일이라고... 네가 좀 예민하네!"
몇몇은 그런 충고를 해 주기도 한다.
앞과 뒤의 맥락을 다 떼고 그날 그 상황에 대한 나의 반응 만을 보면 분명 내가 예민한 것도 맞다.
"허어! 네가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내가 진심으로 위로를 받는 순간은 그런 말을 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다. 그들은 남편에 대해서도, 나에 대해서도 평가하지 않았다.
“이끌거나, 따르거나, 떠나거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 육군 대장이었던 조지 S. 패튼의 문구로 알려져 있으며 CNN의 창립자 테드 터너의 자서전 제목이기도 하다. 기업가 정신, 리더십을 논할 때 자주 인용되는 말로 최근에는 스타트업에서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종종 나의 삼십 년 결혼생활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한다.
첫 십 년. 따르겠다고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따르지 못했다.
두 번째 십 년. 이끌고 싶었다. 그러나 이끌지 못했다.
세 번째 십 년. 떠나려고 마음먹었다. 칠 년은 떠나 있었지만 결국 떠나지 못했다.
길들여지거나 길들이거나. 그런 이분법의 문제가 세 가지의 해법을 내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차라리 포기해버리라는 인간관계의 심플한 조언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 아닐까? 내가 따를 만한 사람, 나를 잘 따르는 사람들만 주변에 남기는 인간관계가 가능하기는 한 걸까? 희망도 체념과 같은 맥락으로 놓아두는 카뮈의 시크한 화법을 이해할 수는 있을까?
시작의 날부터 미치도록 도망가고 싶었으나 결국 도망가지 못했던 나의 결혼은 그렇게 따르지 못했던 시절, 이끌지 못했던 시절, 떠나지 못했던 시절의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