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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Oct 23. 2024

결혼·여름의 카뮈와 J언니와

대학을 다닐 때 알게 된 J언니는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다. 등 하교 길 버스 안에서 만나 오고 가는 긴 날, 긴 시간 동안 나는 줄곧 치기 어리고 철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언니는 미소 띤 얼굴로 말없이 들어주었다. 말하고 싶은 욕구. 그냥 많은 말을 하고 싶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한없이 자신감이 없어서 밖에서는 얌전한 사람으로 보여지던 때였으나 언니는 나와 단 둘이 있는 시간 동안 짙은 눈 화장을 하고 립스틱을 짙게 바른 붉은 내 입술에서 나오는 그 많은 짜증과 불평과 잘난 척과 우울의 고백을 조용한 미소로 들어주었다.  


언니가 살고 있는 곳은 공단 근처에 있는 빌라였는데 그 마을 사람들로부터 어떤 공장에서 임시직을 구한다는 정보를 들으면 공강이나 휴일이 있는 날이면 빠지지 않고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방학 때면 내게도 일을 해서 용돈 벌이를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알려주었다.

프랑스의 전통 빵 이름이 들어간 제과제빵 공장에서는 연말연시가 되면 케이크를 만드는 생산라인을 풀가동시켜야 했으므로 어느 해 겨울 방학에 거기서 단기 알바를 할 기회가 있었다. 열흘 남짓 공장으로 출근을 해서 내가 한 일은 버터크림을 바르기 위해 동그랗게 잘려진 카스텔라 시트가 바쁘게 돌아가는 컨베어벨트 앞에 서서 다른 근로자들처럼 불량이 있는지 체크를 하거나, 다른 쪽 컨베어벨트에서 돌아가고 있는 버터크림이  발라진 케이크 위로 루돌프 사슴이나 플라스틱 나무나 별 모형, 또는  '메리 크리스마스가' 인쇄된 장식을 올려서 데코를 하는 일이었다. 흰 가운을 입고 흰 앞치마를 두르고 흰 모자를 쓴 아저씨가 큰 목소리로 작업 지시를 하면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케이크 판 위에 놓인 빵에 버터크림을 두텁고 고르게 발라서 장식팀 컨베어 벨트로 보내는데 그 일을 담당하는 서너 명 팀의 작업 속도는 제법 빨랐고 그들 손에서 나오는 케이크의 생김이 어찌나 곱고 부드러워 보이던지 감탄이 저절로 나오고는 했다.  내 양 옆으로 숙련된 작업자들이 서서 데코용 크림을 짜서 케이크 테두리를 장식했고 나는 그 틈에 서서 더듬거리면서 그들의 일하는 모양을 흉내 내고는 했다.


통근 버스를 타고 아홉 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 공장에 도착을 하면 곧바로 앞치마와 스카프를 두르고 컨베어벨트 앞에 서서 빠르게 돌아가는 케이크 위에 할당된 작업을 하는 단조로운 일이 반복되었다. 두 시간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 지루한 생각이 들 무렵이 되면 흰 모자를 쓴 반장 아저씨는 자신이 버터크림을 두껍게 발라서 회전판에 빙글빙글 돌려가며 거의 모양을 완성해 가던 케이크의 한쪽 부위를 손바닥으로 꾹 눌러서 일부러 파치를 만들었다. 그러면 약속처럼 돌아가던 컨베어벨트가 일제히 멈추었고, 그가 "커피 타임!"하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옆에 있던 숙련공 두세 명이 후다닥 달려 나갔다가 뜨거운 커피가 담긴 커다란 양은 주전자와 종이컵 한 묶음을 가지고 들어와서 작업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부서진 케이크 조각을 숟가락으로 듬뿍 떠서 서로의 입에 넣어주고는 했는데 내가 대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직원분들은 조금 부끄러워하면서 나에게 케이크와 커피를 권했다.


일하는 내내 매일 그렇게 반복이 되었다. 이른 아침의 분주함이 익숙하게 자리를 잡으며 지루한 일상으로의 진입을 알리기 시작하는 순간에 잠시 멈추어진 컨베어벨트와 부서진 케이크와  달달한 믹스 커피의 조화는 그때까지는 맛본 적 없던 세상에 더없이 조화롭고 향기로운 꿀맛이었다.

그리고 다시 작업이 시작되어 두 시간 정도가 지나면 점심시간 알람이 울렸다. 직원들은 일 분도 지체하지 않고 우르르 식당으로 몰려가서 밥을 받아먹었는데 식판에 받아먹는 음식의 맛 또한 훌륭하기가 이를 데가 없었다.


 '음식을 만드는 공장은 밥을 맛있게 해 줘야 한대. 그래야 직원들이 만드는 음식에 손을 대지 않으니까!'


 J언니는 일을 하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내가 막 투덜거림을 시작하려다 멈추고는 맛있게 밥을 먹는 모양을 보고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J언니도 나도 임용시험을 통과해서 같은 해에 발령을 받았다.

J언니는 나보다 먼저 결혼을 했다.  신랑은 방학 때면 아르바이트를 하던 공장에서 만난 숙련공이었다. 언니가 함을 받던 날 친구 대표로 내가 함께 했다.  함을 받을 준비를 하던 낮시간부터 신랑과 신랑 친구 두 명이 와서 함께 하던 저녁시간까지 함께 하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언니의 아버지는 오래전 돌아가셨고, 언니의 엄마는 함께 살지 않는 남자가 방문할 때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했다는 것이었다. 그날 신랑 측 세 명의 남자들은 '선생 아내'와 그의 동생뻘 친구를 조금은 어려워하고, 조금은 신기해하면서 화기애애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일 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J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에서야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 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 시절에도, 결혼한 후에도 J언니는 우울했다고 했다.


세월이 지나는 동안 가끔씩 J언니의 표정들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내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언니의 표정 속 몇 가지 컷은 우울한 사람들의 그것이었다. 거기에는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도 섞여있었다. 그 눈빛이 의미하는 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알아갔다.


나는 가끔 언니에게 내가 읽은 책 이야기를 했다. 사르트르가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설명한 사이비 지식인, 카뮈가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언급한  '공허하고 부조리한 세계를 앞에 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제1의 방안이면서  동시에 삶을 직시하는 명철한 의식에서 빛의 세계 밖으로의 도피로 인도하는 치명적 유희일 뿐인 자살'에 대하여.


'있잖아, 자살은, 살아가는 게 자신 없다는 자기 고백이나 마찬가지래. 부조리한 세상에서 무의미한 바위 굴리기를 하면서라도 시지프스는 살아갔다는데, 그게 바로 그의 삶 자체래. 우리가 비록 사이비 지식인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우리 스스로를 위하는 데 죄다 써 버린다고 해도 그것 조차도 우리의 삶 자체라니... 마음에 안 들어... '


J언니는 수줍게 나에게 책 한 권을 선물했었다. 카뮈의 책 '결혼·여름'


언니가 가고 난 뒤에도 나는 여러 번 그 책을 읽었지만 세월의 책장 안쪽으로 깊숙하게 넣어 두던 날부터는 그런 책이 있었는지도 까마득히 잊고 지내왔다. 그리고 십 수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날 낡은 책들을 정리하던 중에 익숙하지만 낯선 그 책이 손에 잡혔다. 


별 생각 없이 책장을 몇 장 넘겨보았다.  


88년 5월에, 생일을 축하하며.

짧은 메시지와 언니의 서명이 남아있다.


그리고 또 몇장을 넘기자 스물두 살의 내가 적어 놓은 서평이 나왔다. 낯설고 서툰 필체였다.


작가는 인간 모두를 사랑하는 것 -즉 세상의 모든 것. 결국에 이르러서는 자기 자신만의 삶을 사랑하는 것-을 '결혼'으로 묶어버린다. 그는 자연과 인간이 연합해서 만든 도시와 결혼함으로써 인간의 밑바닥부터의 순수에서 출발해 인간의 가장 흉한 모습의 타락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것 -인간 자체-와 결혼하고 만다. 전 부분에 걸쳐 작가는 자연과, 인간과, 인간의 삶을 눈부시게 찬양하고 쾌락조차도 거부하지 않고 있지만 결국엔 그 모든 것들을 기필코  거부하고야 마는 듯이 보인다. 그의 절망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세상을 사랑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바닥까지의 절망을 경험한 그가 세상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처절한 몸부림으로까지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언니는 결혼의 시작점에서 결국 '자신 없음'을 고백하고 다른 지점과의 결혼을 선택했었다.


나는, 내 결혼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날마다 절망과 결혼했고, 망각과 결혼했고, 가끔 행복과 결혼했다. 매일매일 신화처럼 눈을 뜨고 전설처럼 하루를 살고 나서는 도시 괴담 같은 하루를 마무리했다.


인류의 온갖 악들이 우글거리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그리스인들은 다른 모든 악들을 쏟아 놓고 난 후에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악인 희망을 쏟아냈다. 이보다 더 감동적인 상징을 나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희망은 체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 체념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 카뮈 , 결혼·여름 ; 알제이의 여름 중에서의 이 구절에 스물두 살의 내가 밑줄을 그어놓았다. 그리고 또 그 빈 여백에 빽빽하게 적어 놓고 있었다.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듯이 작가는 사랑도 낭만도 없는 세상의 부조리함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부여받은 사람의 의무는 최대로 생을 사는 것이라고, 지극히 충동적이며 감정적인 알제이 -모든 세상-에서의 삶과 죽음을 통해 보여준다. 절도 있는 자연인. 작가의 사상은 최대로 생을 느끼는 것이 최대의 선이라는 현실주의와 자연주의를 함께 담고 있으면서도 그 내면에는 표현 못할 현실의 부조리를 가장 큰 크기와 무게로 인식하는 비관주의도 함께 담고 있다. 그는 삶과 죽음, 욕망과 이성, 쾌락과 금욕 등 세상의 모든 양 극단을 동시에 수용하거나 배척하는 극단의 방식을 택해서 비로소 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는 한계까지 절망하고 난 뒤, 모든 세상을 인정할 수 있고, 비로소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현실이 된다.


최대한으로 삶을 살고 나면 비로소 능동적으로 나의 현실을 대처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나 질문 같은 건 그 메모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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