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가진 모든 힘을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셨던, 세상에 대한 남다른 책임감과 실천력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던 진 선생님 삶의 모든 부분을 여전히 존경한다.
내가 그 모임에서 저지른 실수와 실패를 마무리하며 이별 인사를 하던 날이었고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과 술집이 모여있는 골목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내 맞은편으로 술에 흠뻑 취한 앙상한 남자 하나가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흘끔 쳐다보면서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진 선생님이 당황감을 숨기고 있다는 기색만큼은 감추지 못한 눈빛으로, 애써 담담함을 가장하고 있는 낯선 어조로 나에게 넌지시 혼잣말 같은 질문을 던지셨다.
"내가 아까 술 취한 남자가 네 앞에서 비틀거리며 걸어올 때 너를 보고 있었거든. 보통 사람들은 말이지... 술에 취한 남자가 앞으로 비틀거리며 다가오면 다들 무서워하면서 피해 가기 마련인데... 너는 별로 동요가 없더라...."
나는 그분이 하시는 그 말을 동요 없는 눈빛으로 들었다. 그리고 아무 말하지 않은 채 그냥 눈을 아래로 내리 깔면서 여전히 동요하지 않고 있는 듯, 태연한 듯,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못 알아듣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진 선생님은 평소에도 내가 별로 신경 쓰지 않은 채로 털털하게 입고 나와서 자주 삐져나오던 정돈 안된 옷차림이라던가 간밤에 혼자 마신 술이 덜 빠져나간 상태인데 제대로 씻지도 않아서 가까이 앉으면 피할 수 없이 전달되던 불쾌한 체취 같은 것들에 대해서 그때마다 내가 상처받지 않으면서 알아들을 수 있게, 그리고 남들은 그 대화 내용을 한마디도 못 듣도록 무척이나 신중하게 알려주시던 분이셨다. 나의 내면의 모든 부끄러움을 한 순간의 체취와 시선과 행동 하나만으로도 죄다 알아채시고 무심한 듯 알게 해 주시던 그분이 나를 위해 해 주셨던 마지막 말씀이었는데 두고두고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진 선생님이 나에게 알려주셨던 나 자신에 대한 모든 말씀들은 하나같이 부끄럽고 아픈 것들이었지만 그 말을 듣던 당시에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이 순간에도 고맙고 따뜻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그분이 선택하셨던 단어와, 그 단어들의 배열과, 생략된 문장의 형식과 문체가, 목소리 톤과, 시선까지 모두가 다 오롯이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그야말로 '어른의 말'이기 때문이었다.
술 취한 남자가 다가오면 두려워서 피해 간다고? 그렇다면 아버지가 술에 취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길에서 마주치는 다른 사람들은 그런 아버지를 피해 간 것이었다고?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남자는 위험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술에 취했을 때나 취하지 않았을 때나 위험했다. 그렇지만 피할 수 없는 위험이었다. 아버지는 그 상태로 집에 들어오셨고 엄마와 우리 남매들에게 그르렁 포효하듯 소리를 지르셨고 눈앞에 보이는 가재도구들을 뒤집고 부수고 하셨다. 그걸 피할 수 있다는 선택지를 우리 가족은 모른 채로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을 피하며 걷는다는 것이 그날 알게 된 사실이었다.
아버지에게서도 어머니에게서도 일가친척과 형제들과 친구들에게서도 배우지 못했던 스스로를 돕는 기술과 위험을 피하는 기술을 그제야 깨달았고 그제야 배울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부끄럽지만 다행이었다. 더 늦지 않아서. 그리고 내 부모님처럼 평생 모르고 살지 않을 수 있어서.
결혼식을 앞둔 신부의 집으로 오징어로 만든 가면을 쓴 함진아비가 사주단자와 패물이 든 함을 메고 들어가는 풍습이 남아있던 90년대였다. 함진아비가 한걸음 한걸음 걸을 때마다 길바닥에 돈을 깔아 밟게 하는 것이 관행처럼 여겨지던 함팔이였지만 본디 없는 풍습이라는 비판도 많았다. 만약 의사나 박사, 판사 또는 변호사처럼 '사'자가 들어가는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는 여자는 집, 자동차, 병원이나 빌딩을 장만해서 그 열쇠 3개를 혼수로 가져와야 한다는 새로운 불문율도 생기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나면 신랑과 신부의 친구들이 풍선과 꽃과 리본으로 장식된 차를 준비해 주고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왁자지껄 몰려다니며 신부에게 노래를 부르라는 청을 시작으로 신랑의 발바닥을 때린다거나 짓궂은 장난을 시키는 일이 종종 있었다. 처음엔 그야말로 농담처럼, 장난처럼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장난으로 넘기기엔 어려운 일들이 생기곤 했는데 신랑의 구두를 벗겨 거기에 술을 가득 따라서 신부에게 한 번에 마시게 한다거나 자동차에 사람을 묶어 놓고 차를 움직이거나 하는 등의 도에 넘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그저 악의 없는 농담으로 시작된 일이었을 테지만 기어이 뿌리 없는 악습으로 변질되어 버린 분별을 잃은 위험한 신고식 때문에 신랑이 목숨을 잃는다거나 함 값이나 혼수 문제로 다투던 신혼부부에게 생겨서는 안 될 커다란 문제가 생겨서 뉴스의 사회면을 장식하게 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런 볼썽사나운 모양새를 답습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함을 팔 때 신랑이 직접 함을 메고 신부집에 간다던지 함팔이에 나선 친구들이 형식적으로 '함 사세요!' 하는 외침 두세 번에 흉내뿐인 실랑이로 마무리하는 빈도가 점점 많아지던 때였다.
남편의 친구들이 함을 메고 우리 동네에 나타나서 '함 사시오!'를 외치기 시작하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남동생과 아버지가 대문 앞으로 나가 동네 사람들에게 곧 우리 집에서 있을 혼사를 알리는 인사말과 웃음으로 '어서 오시라!' 말과 함께 그들을 맞이하며 돈이 든 봉투 하나를 바닥에 깔았다. 모여있던 사람들은 그 장면이 당연히 형식적인 실랑이일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기에, '돈이 부족해 못 들어가겠다!'라고 소리 지르는 남편 친구들의 말을 괜한 너스레로 여겼으므로 냉큼 동생 친구들이 그 함진아비를 부둥켜안고 들어 올려서 바닥에 놓인 바가지를 밟는 시늉을 하는 동안 옆사람이 그것을 힘껏 밟아 깨지게 한 다음 집 안으로 발을 들이게 만들었다. 모여있던 사람들이 웃으면서 그 광경을 재미있어했고, 아버지가 힘든데 애쓰셨다 인사와 함께 따로 준비해 둔 돈이 담긴 봉투 하나를 더 건네며 방 안으로 들어오기를 청했다. 신부가 될 사람은 그날 문 밖에 나가지 않아야 했으니 방 안에서 소리만 듣고 있던 내가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나는 친구들과 방 안에서 바깥의 소리를 들으며 곧 들어올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쩐 일인지 조금 불쾌한 실랑이가 왔다 갔다 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누군가 함진아비를 오랫동안 달래고 달래서 한참 후에야 방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어허! 우리가 크게 실례를 했나 보네, 미안하네~ 마음 푸시게' 하는 말씀을 연거푸 하셨고 동생과 그 친구들이 황당한 표정이었고, 남편과 그 친구들이 불쾌한 표정을 내내 감추질 않았다. 불편한 저녁을 먹고 남편과 친구들은 아버지가 다시 더 얹어주신 돈을 받아서 자기들끼리 한잔 하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남편이 친구들과 술 한잔을 하고 호텔 방을 잡아주고 나서 나에게 와서 이야기를 했다.
친구들이 오늘 함 값으로 받으려던 금액이 있었는데, 말도 안 되는 금액이 든 봉투만 받은 상태에서 집안으로 끌려들어 와서 화가 많이 났다고 했다. 나중에 아버지가 따로 주신 돈을 합하고 나서야 비로소 처음부터 받으리라 계획했던 금액과 엇비슷하게 되었으니 겨우 마음을 풀었다는 이야기였다.
친구가 함 값으로 얼마를 받으려고 계획했느냐고 나는 물었다.
백만 원이라고 그는 답했다.
백만 원은 당시 나를 포함해서 내 나이 또래 직장인들이 받고 있던 월급의 두 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받은 돈이 얼마였느냐 물으니 집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밖에서 받은 돈은 이십만 원이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얼마를 더 주셨느냐 물으니 집 안으로 들어온 다음 이십만 원을 더 주셨다고 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친 후 나갈 때 다시 이십만 원을 더 주셔서 육십만 원이 되었으니, 받아야 할 금액에서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그냥 마음을 풀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 친구가 결혼할 때 당신 친구들이 받은 함 값은 얼마였느냐고, 결혼할 친구의 신부에게 함 값으로 무조건 백만 원씩을 정해 두고 있는 거냐고 나는 물었다.
자기 친구들은 결혼할 때 함 값을 주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고 그는 대답했다. 그런 말을 하는 내내 그는 목소리에 성냄도, 불편함도, 미안함도, 그 밖의 어떤 동요의 감정 하나도 담지 않은 상태로 사실만을 명확하게 전달하는 사실전달자였다.
함을 받던 날 함께 하며 그 장면을 모두 보았던 나의 직장 동료가 그날부터 연락을 끊었다. 결혼식이 끝난 뒤 꽃값을 받기 위해 친구들 모임에 남아있던 다른 동료도 '함 값이 적었으니 꽃값은 없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와도 연락이 끊겼다. 연락이 끊어진 친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다시 연을 이어갈 분별이, 여유가 그때의 나에게는 없었다. 어찌할 겨를 없이 말없는 이별을 하고 이미 받은 우정은 덮어버린 채수십 년을 살았다.
그날의 일에 대해서 여러 번을 물어보아도, 그런 내용의 사회문제가 뉴스로 나오고 있을 때에도 그 방송국의 엔지니어인 남편은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함 값을 제대로 주지 않은 상태로 장인어른이 함진아비를 강제로 집안으로 끌어들여서 그 친구가 화가 난 거라고.
그 일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남편의 이해 못 할 말과 태도에 대한 분노가 시작된 것은 그보다도 훨씬 전부터였다. 그럼에도 결혼식 전날에 일어날 일에 비하면 그 정도 일은 별것 아닌 축에 들어간다. 그리고 결혼식 전날의 일쯤은 그다음에 일어나게 될 일들에 비하면 또 아무것도 아닌 축에 들어간다. 그러나 나는 술 취한 내 아버지에 대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같이 남편에 대해서도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남자가 아닌 여자로 살아야 하는 그 시절의 나는 그러한 부당함과 불편함에 대해 참아 넘기며 기다리는 일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느껴졌다. 내가 그 몇 해 전 저녁에 진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 느끼던 부끄러움을 동요 없는 눈빛을 내리 까는 것으로 막아낸 채 온 마음의 힘을 꺼내 억지로 만든 무표정 속에 감추어 버리고서는 이후로 오랜 세월이 가는 동안 두고두고 부끄러워하는 중에 기어이 고쳐 내고야 말았던 것처럼 남편도 그리 될 것이 틀림없으리라 믿는 것 밖에는 답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