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발령지는 시골이었다.
길을 걸을 때면 작은 마을의 아이들이 인사를 했다. 작은 마을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았을 것이었다. 스물대여섯 된 젊은 여성이 아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길을 걷는데, 그녀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몰라볼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마을의 사람들은 학교에서 아이가 다쳐서 들춰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던 나를 알아보았고, 아무 일 없는 빈 밤 홀로 마신 잭다니엘의 병 개수를 알아챘고, 먼 곳에서 나를 보러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을 알아보았고, 주말이나 방학을 본가에서 보내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졸다가 내려 바삐 걷고 있는 내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알아보았고... 그리고... 그러면서도 아무도 모르는 사람처럼 나를 보았다.
직업을 가졌지만 삶의 선택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 나이가 되는 동안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정보만 가지고 괜찮은 사회생활을 해 나가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자취방을 얻고, 혼자 사는데 필요한 가구와 가재도구를 구입하고, 퇴근 후의 빈 시간을 보낼 취미 거리를 찾고, 사람들과 대화하며 관심사를 나누고, 월급을 예치할 적절한 금융 상품을 선택하고.... 이러저러한 일상의 모든 부분에 대해 '보통'의 선택을 할 만한 정보 출처가 그 시기의 내 인맥 안에는 없었다. 신문과 라디오 방송과 신간 도서를 열심히 들여다 보고 귀 기울였지만 사회생활의 기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뉴스를 접하고 필요한 정보를 어떤 형태로든 저장해서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기본적인 인식의 도구가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선생이라면 마땅히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은 크고 잘 살고 싶다는 의지도 있었지만 그 길을 몰랐다.
그때 즐겨 듣던 라디오 방송의 시사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자원활동가'들의 모임에 대해 듣게 되었다.
도움이 필요한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친구가 되어가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이 참으로 매력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 시골에서 기차와 버스를 타고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찾아가서 동참을 하겠노라는 약속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 친구 소개로 취업을 해서 넉 달을 일했던 월급 십만 원짜리 직장은 주유소나 관련 사업장에 엔진 오일을 납품하는 작은 회사였다. 매일 아침 일찍 만원 버스를 타고 출근해서 사무실을 청소하며 전화 메모를 하고, 거래처를 돌며 판매를 하고 돌아온 외판 직원의 영수증을 받아 일지에 기록해서 하루 매출을 정리하는 간단한 업무를 반복하는 일이 전부였다.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인근 식당에 전화로 식사메뉴 주문을 하면 음식가방을 든 배달원이 선심을 쓰듯 도장이 찍힌 빈 영수증을 주고 점심 값을 받아갔다. 나와 비슷한 일을 하고 있는 그 상가의 많은 여직원들이 대부분 천 원 미만의 식사를 하고 천 이삼백 원 정도의 금액을 영수증 빈칸에 적어서 차액을 챙겨간다고 했다.
가끔 일지를 기록하다 남겨지는 돈도 있었다. 영리하고 재빠른 직원은 눈치껏 월급보다 많은 금액을 챙길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석 달을 지내는 동안 도저히 이런 식으로는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회사에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새 직원을 구해 인수인계를 해 주던 마지막 한 달까지 나는 내내 숨 막히는 공허감으로 무기력했었다.
그때보다 몇 배의 월급을 받고 작은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의 동경을 받으며 조금 더 성의 있고 정직하게 인생을 살아보고 싶어 지던 때였다.
나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불완전한 나의 기준으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고 개입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아는데 그 시절의 모든 시간을 들인 것 같다.
설명할 수 없지만 선행을 쌓다 보면 저절로 내 삶에 쌓인 선한 것들의 정수가 나를 완전한 행복으로 이끌어줄지도 모른다는 환상이었을 거라고 지금은 그 시절의 나를 해석할 수 있다.
도움을 주겠다고 시작한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다며 겉치레만의 말을 내뱉었고, 아마도 오히려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위로받고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한 일들에 집중해 버렸고, 기어이 실수와 실패 투성이인 스스로를 인정하며 물러나야 했다.
숨 쉬듯 가볍게 사람들을 볼 수 있지 않다면 내가 사람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러나 한없이 서툴기만 했던 그 시절의 나는 사람들을 구원시켜 줄 거라는 이해 못 할 열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접근으로 아마도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했더라면 필시 몹쓸 사람으로 난도질당하고도 남았을 오점을 남기고 말았던 탓에 그저 개인의 오점과 수치를 인정하며 물러나오는 것으로 혼자만의 미성숙한 시절 마무리를 한 번 했다.
열망뿐이었던 감정들을 정리하며 돌아서던 날의 어둑하던 저녁 하늘과 그 하늘을 향해 구겨 넣은 절망감과 수치심과 부채감들이 앞으로 오랜 세월을 성숙시키기 위해 내면에서 썩어가기 시작했다. 세상은 여전히 아득하게, 여전히 모를 것 투성이었고 내면은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공허했다.
도망치듯 결혼을 마음먹었다.
결혼은 좋은 상대를 만나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시기가 되어서 하는 것이라는 말이 맞았다. 남편이 될 그 사람과 어느 이른 봄에 만난 뒤 한 해를 보내는 동안 수없이 이별을 마음먹곤 했지만 그 시절은 여자가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가려면 주변의 수없는 간섭을 각오해야만 하는 때였다. 그와 헤어지고 난 다음에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과 또 다른 만남을 반복하게 될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지쳐있던 서른 살의 나는 드디어 부모님에게 결혼할 사람을 소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직원 식당에서 배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서면, 지나가는 사람들과 음식을 담아주는 조리원들이 그를 한번 더 쳐다보며 신입 탤런트냐고 물을 정도였다고 남편은 자랑처럼 말하곤 했다. 그런 그가 우리 집 초라한 안방에 발을 들이던 날 내 엄마와 아버지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고 했다. 나를 향해 나지막한 소리로 '잘 생겼다!' 탄식하던 엄마의 기죽은 중에도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던 얼굴을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한 뒤 아버지가 내어주신 아랫목을 마다하며 그는 윗목 쪽에 털썩 주저앉았다.
기다란 다리를 양껏 움직이기에 좁은 방 안에서 다리를 옮겨 자리를 고쳐 앉으며 그는 갖춰 입고 있는 정장이 불편하다고 낮게 투덜거렸다. 앉은자리에서 두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며 서툴고 긴장되게 움직이는 그의 한쪽 발에 신은 양말에는 입고 있는 반듯한 정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큰 구멍이 나 있었고 반대쪽 양말은 색이 달랐다.
어색한 식사가 이어졌다. 그는 전부터 나에게 종종 지적받던 습관대로 음식 하나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었다가 끄적이다가 내려놓다가 다시 집었다가 하면서 식사를 마쳤다. 맛은 좀 괜찮은지 걱정스럽게 묻는 엄마의 질문에는 '네, 괜찮습니다' 하고 답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과일을 먹고 부모님과 가정에 대한 의레껏의 질문과 대답 몇 가지를 나누고 일어설 때까지 아버지가 더 많이 긴장한 모습을 감추지는 못하셨다.
강원도와 경기도의 중간 지점 어딘가로 지도책을 펼쳐놓고 장소를 정해서 양가 부모님이 상견례를 했다.
예비 사돈어른들과 식사를 하며 결혼식에 대해 의논하셨다고 말씀하시는 엄마와 아버지의 얼굴은 어두웠다. 어지간해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평을 하지 않으시는 아버지가 '사부인이 무척 고우시더라. 그림같이 사셨다고 하시더구나. 꼭 그렇게 보이시더라' 하고 멈추는 말씀 뒤로 무겁게 올라앉은 염려가 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