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여 년 정도로 헤아려야 하는 아주 오래전 기억 속의 어느 날 일이다. 식빵을 사기 위해 마을 길의 횡단보도를 건널 때 아무 이유 없이 '개구리 왕자'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가 싶더니 혼잣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여름 한 낮, 길 건너편 빵집을 향해 건널목을 건너던 내 입술에서.
'그래,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나에게 "드디어 진정한 사랑을 찾았어. 이제 나는 내 길을 찾아 떠나야겠어!"라고 말을 하는 날이 온다면 기꺼이 그렇게 해 줄게. 화려한 새 옷을 입히고 성대한 혼수를 장만해서 장가보내줄게.'
그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길을 걷고 있는 스스로에 한없이 의아해하면서도 결혼 4년 차로 갓 낳은 둘째 아기를 등에 업은, 아직까지는 새색시로 불리던 나는 역시 새신랑인 남편을 떠올리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어쩐지 정리가 잘 되지 않는 그날, 그 순간의 마음과 생각이 참으로 기이하기 짝이 없었으므로 지금까지도 절대로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아직 신혼의 분위기에서 서투르게 엄마, 아빠로서의 시간들을 배워가고 있던 때였다.
짧은 연애 기간을 거쳐 조금 의아했던 상견례 후 마음이 많이 지치던 결혼식을 치르고 난 뒤로 기억이 올라간다.
결혼 두 달째가 되던 날부터 시부모님은 조바심을 내셨다.
"어째서 임신을 못하느냐?"
딱히 대답을 찾지 못한 채로 눈만 멀뚱멀뚱 뜨며 입을 다물게 되곤 하던 몇 차례의 질문은 결혼 세 달째가 되어서 임신 소식을 알려드리던 날부터는 '아들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로 바뀌어 반복되었다.
신생아 성별을 알려주면 위법이 되던 시절이었으나 임신 서너 달 무렵 초음파를 살피던 산부인과 의사가 "어? 아들이네? 첫 앤 데 아들이네!" 하며 대놓고 실언 같은 축하를 해 주었으니 더 이상의 초조한 조바심은 사라지는 듯했다.
이듬해에 첫아들을 낳았다.
이어서 둘째를 가지라는 재촉이 이어졌고, 두 해가 지나 얻은 둘째는 딸이었다.
"딸도 하나는 있어야 하니 괜찮다"며 큰 아량을 베푸시는 듯 말씀하시던 시부모님은 곧 서른 중반으로 들어가는 내 나이를 염려하시며 다시 말씀하셨다.
"아들 하나로는 부족하니 얼른 하나를 더 나아야 한다"
내가 말없이 미소를 지으면 이미 여러 번 반복하던 말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다시 말씀하셨다.
"니 시아버지랑 친한 교장 선생님이 너보다 일곱 살은 어린 당신 딸을 니 신랑과 결혼시켜 주면 지참금 몇 천만 원과 아파트 한 채를 해 가지고 오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웃어른이 하시는 말씀에 토를 달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으니 그런 말 하나하나를 마음에 고깝게 새기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며 지내왔는데, 아마도 몸과 마음과 기억은 죄다 제각각의 언어로 그 일상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좋았던 일, 행복했던 일에 집중하며 산다. 그들에게도 피하고 싶은 나쁜 일, 불행한 일들이 종종 생기기도 하지만 애쓰든 애쓰지 않든 그들의 기억과 시간의 그물에 남겨지는 것들은 대부분 좋았던 일, 행복했던 일들이다.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젠 안다.
저절로 그렇게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 천성이 밝은 사람일지라도 그런 기억의 그물을 가지고 온전히 유지해 내려면 무척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처럼 회색빛 그림자의 그물을 가진 사람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나이가 들면서 인생의 무대에서 차례차례 각 단계마다의 막이 내려가는 순간들을 만나곤 한다.
철 없이 빛나던 십 대.
서툴러도 기어이 길을 찾아내려 애쓰던 이십 대.
조금쯤의 실수가 앞으로 나아가는 도약판이 되어주던 삼십 대.
낯섦도 익숙하게 처리해 내던 사십 대.
타인의 서툶을 함께 감당할 여력이 준비되던 오십 대를 천천히 지나면서 이제 비로소 타인의 능숙함에도 서툶에도 감탄을 보낼 수 있는 육십 대를 맞이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게 그리 녹록한 일이야 아닐 테지만.
스물을 넘기고 꽉 채운 서른이 되기까지는 엄마와 아버지를 미워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방목하듯 키워졌다.
우울했던 사춘기.
술 때문에 종종 문제가 생기곤 하던 가정사.
아버지의 알코올 문제와 도박 문제에서 비롯된 내 가정의 숨기고 싶은 비밀들은 한 달에 두세 번쯤 가볍게 가난한 달동네 작은 집들의 벽면으로 여과 없이 흘러나가곤 했었으니 피하고 싶어도 피해 지지 않는 가난하고 가련한 집의 사정을 이웃들에게 드러내게 되는 가여운 아이들로 자라야 했다. 다행인 것은 그 마을에서 내 부모님은 그나마 괜찮은 축에 들었으니, 아이들 밥 굶기지 않았고 어린 나이에 돈을 벌기 위해 세상 어딘가로 던져내지 않았고 고등학교까지는 수업료와 책값과 차비를 제공해 주었으므로 그 마을에서 가장 사정이 나쁜 집안의 부모는 아니었다는 긍정적인 사실이 하나 정도는 있다는 것이었다.
흠....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는 맞지 않았다. 아버지의 동전 몇 개를 몰래 가져다가 사탕을 사서 나에게 나누어주었던 언니의 팔이 부러진 적이 한 번 있었고, 애써 기억에서 지워냈지만 분명 무섭게 매를 맞은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럼에도 엄마만큼 맞아보지는 않았다.
엄마가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아서 시퍼래진 눈에 달걀을 굴려가며 멍을 빼는 마사지를 하는 날이면 동네 아줌마들 여럿이서 아버지가 일 나가고 없는 안방에 모여 간밤의 이야기를 나누고 먹을 것을 나누는 일이 그 마을에서 거의 매일 집집마다 일어나는 작은 이벤트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은 불가능하다는 선언을 받았다. 이젠 취업을 해서 살림에 보태라는 명을 받고 한 달 십만 원 월급을 받으면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넉 달만에 그만두고 기어이 대학엘 갔다. 좋은 점수는 아니었지만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이 그 시절에는 있었다. 장학생으로 합격했다는 대학에 가겠다는 걸 막을 부모님은 아니셨다.
책을 사 주셨고 교통비를 주셨고 용돈을 주셨고 밥을 먹여주셨다.
대학을 졸업하고 임용 시험을 보고 선생이 되던 날부터 나는 부모님의 큰 자랑 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딸과 결혼을 앞두고 있는 잘 생긴 데다 좋은 직장을 가진 예비 사위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대치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결혼식 하객을 태워 내려오실 부모님의 마음이 어떤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나는 그래서 결혼식 전날의 그 허무한 장면과 말이 안 되는 답변을 들으면서도 결혼식을 엎을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그냥, 차라리 남들에게 설명이 가능한 일이었다면 훨씬 가볍게 정리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누구와 의논할 수도 하소연할 수도 없는 그 밤의 일들이 처연한 시간처럼 흐르다가 되돌아오곤 하는 기억이 되어있었다.
그날 이후 도무지 해석이 되지 않는 사연들을 쌓아가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오랫동안 남편을 미워했다. 그것이 미움이라는 것도 모른 채.
처음으로 쌓이기 시작한 것은 나에 대한 의심이었다.
내가 자란 가정보다 남편이 자란 가정이 훨씬 더 정답에 가까울 거라는 생각을 하며 조금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천천히 내 부모님보다 더 바람직하고 더 정상적인 시부모님을 통해 지금까지 내가 알지 못하던 세상을 배우고 싶었다.
훌륭한 공무원 가정의 가풍을 배워가려면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내려두어야 할 것 같았다. 그 가정에 동화되고자 애를 썼다. 그런데 자꾸만 몸이 아팠다.
내 방식대로 익혀왔던 삼십 년의 세월을 죄 다 부정하고 남편의 삼십 년 세월을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고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쉽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팠다는 것을 천천히 알아가는 세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