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신비를 사느라 글을 쓸 시간이 없었던 아프리카의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쓰기로 했었다.
오늘 마지막 글을 올리면서 , 아주 많이 고민을 했다. 내 글 속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을 가려주는 일이 필요해졌기에. 비록 글 속에서는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가리지만 케냐 여행 기간 동안 만났던 모든 사람들을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피하고 싶어서 보내버린 사람이었는데, 어쩔 수 없이 다시 연락을 해서 만나게 된 켄.
홍콩 공항이 태풍으로 폐쇄를 예고하던 토요일 점심. 한국 식당에서 불고기 정식을 먹으면서 난 혼자 공항에 들어가서 비행이 다시 시작될 때까지 공항에서 머물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그를 보냈었다.
윌리에게서 분명 받았을 라이드 비용을 챙겨놓고 비용을 지불할 일이 생길 때마다 나에게 계산을 미루는 것, 그의 가계대출 상환 독촉 문자를 굳이 내게 보여주며 지어 보이는 불쌍한 표정에 마음이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항공사 직원과는 말이 안 통하고, 토요일 일요일 사무실은 다 문을 닫아서 알아볼 수 있는 곳도 없고....
공항 노숙은 하루 정도야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또 하루를그 좁은 공항에 앉아서 보내기는 싫었다. 택시를 불러서 숙소를 잡으려고 하다가 다시 그에게 연락을 했고,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었다.
쥬빌레(희년)가 정치적 모토라는 젊은이의 대통령 기드온은 생기 넘치는 스물여덟 살 청년으로 낯설게 어울리는 힙합 패션의 개성 있는 외모가 인상적이었다. 그의 집은 참 좋았다. 일요일부터 목요일까지 4박 5일의 럭셔리한 홈스테이는 케냐와 후회 없는 이별을 할 수 있도록 잘 정리된 순간순간의 추억거리가 되어주었다.
켄으로부터 한국식당 이야기를 들은 기드온은 월요일 저녁에 자신의 아내와 함께 한국 식당에서 밥을 사겠다고 했다. 켄과 나, 사무실 직원 한 명까지 5명이 기드온의 차를 타고 한국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했다. 불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아내와 내가 나란히 앉아있는 것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던 그가 해맑게 웃으며 '그라데이션!' 하고 외쳤다. 두 사람의 흑과 백 피부색을 기분 좋게 표현하는 그의 말에 모두가 한바탕 웃을 수 있었다.
그들은 상추쌈에 고기를 얹어먹는 우리의 식사방법을 아주 당황스러워했다. 케일도 잘게 썰어서 볶는 그들의 조리법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었다.
생전 처음 잡아본다는 쇠젓가락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몇 번 움직이던 기드온은 다른 손에 밥그릇을 집어 들고 장난스럽게 면요리를 먹는 시늉을 하며 '쿵푸 팬더!'하고 말했다. 그의 최애 영화가 쿵푸 팬더라고 했다.
식사값을 지불할 때 그들은 청구서에 적힌 비싼 음식 가격에 상당히 당황을 했다. 내가 사겠다고 말했지만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더치페이를 하자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유소에 들러서 차에 기름을 넣을 때 미리 은행에서 찾아두었던 오천 실링짜리를 꺼내서 그에게 건네주었더니 그는 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 대신 돈의 액면가가 크니까 소액권으로 바꿔주겠다며 '굿 체인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말마따나 소액권은 정말 유용했다.
그는 또 길 건너편 건물에 쓰여 있는 한문 글자의 뜻이 무엇이냐고 내게 물었다. 한문으로 '조식'이라고 쓰여있었고 내가 '브랙퍼스트'라고 대답해 주자 그들은 무릎을 탁 치며 '호텔!'하고 말했다. 그곳 사람들은 식당을 '호텔'이라고 부르니까. 이제 기드온은 자신 있게 중국식당에 가서 쿵푸팬더가 좋아한다는 국수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국수는 한국음식보다는 가격이 쌀 것이고.
엔젤라. 열대여섯 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하우스키퍼. 청소며 애보기, 식사 준비와 설거지를 조근조근 서두르지도 않고 열등감도 보이지 않는 차분한 음성과 표정으로 척척 해 냈다.
수요일에는 옆 집 정원에서 예배가 있다며 함께 갈지 묻기에 기쁜 마음으로 따라갔다.
나름대로 격식 있는 옷차림으로 천막 안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사람. 바닥에 깊이 엎드려 기도드리고 눈물 흘리는 사람, 잔디밭에 담요를 깔고 엎드려 천막 안을 향하는 환자. 키보드 연주자와 가스펠 가수, 목사님의 선창과 나지막하게 되풀이되는 워십송의 선율.
왜 나는 왜 이 날 이 시간 여기에 앉아있는가 알 듯 모를 듯하게 마음이 울렸다. 눈물이 흘렀나 보다. 엔젤라가 내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여주었다.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에 5000실링을 주면서 오늘 주차비와 비용으로 쓰라고 했더니 켄은 무척 기뻐하면서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데 무려 천 실링이나 썼다. 공항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가 티켓팅을 마치고 마지막 인사를 하러 나올 때까지 여유 있게 기다려주는 그가 어떻게 고맙지 않겠는가?
엔젤라를 잠시 혼자 세워두고 그를 불러서 지난 일요일 현금인출기에서 인출해 쓰고 남은 돈 6천 실링과 달러 백 불을 봉투에 담아 그에게 주었다. 항공권 페널티 150불은 네 것이야... 놀라서 허둥지둥 고맙다는 말을 하며 엔젤라와 사라지는 뒷모습이 아련했다. 아마도 지난 토요일 공항에서 그에게 주었던 케냐 실링과 오늘 준 금액을 합하면 그가 내게 보여주었던 대출 상환 독촉 문자에 적혀있던 금액에 거의 가까운 액수가 되었을 터였다.
아프리카는 젊은 대륙이다. 누구나 좋은 직업을 갖고 싶어 하지만 일자리가 없다. 2018년, 케냐 현지 직장인들 중 하우스키퍼나 가드의 한 달 월급은 100달러 정도였다. 외국계 건설회사에 취직하게 되면 200불~300불 정도 받게 되는 월급이 높은 수준에 들어갔다. 문제는 일을 하고 싶어도 그런 일자리를 갖게 되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기드온의 젊은 처남 둘이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었다. 자신은 한국의 연구소에서 일을 하고 싶으니 한국에 돌아가서 자신들이 갈 수 있는 직장과 집을 알아봐 달라는 내용이었다. 한국의 유학원 사이트를 알려주면서 직접 알아보라고, 나는 그쪽 일을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한국에 들어오게 될 아프리카 흑인들이 받게 될 차별에 대해서는.... 그냥, 한국 사람들은 낯선 사람들에 대해 친절하지 않다는 말로 대신해야 했다.
나이로비의 시내에 있는 공원을 산책할 때, 나이로비 빈민가 근처에 있는 친구의 숙소에서 머물고 있던 켄은 간밤에 자신이 예언자라고 말하며 주변에서 놀고 있는 꼬마 아이들을 놀린 이야기를 나에게 해 주었다.
나도 예언가라고, 그리고 내 예언은 무척 잘 이루어진다고 나는 그에게 말했다. 피식 웃는 그에게 나는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7주 전 아시아나항공에서 내 케냐행 항공권의 퍼스트 네임과 라스트 네임이 바뀐 채로 예약이 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돌아오는 항공권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을 해 주었다. 난, 만약 그런 문제가 생긴다면 한주일 정도 더 머물면서 여행 기간을 늘리고 편도 티켓을 새로 구입해서 돌아올 계획이라는 내용을 블로그에 올려둔 적이 있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그날의 블로그를 찾아서, 그 부분의 텍스트를 그의 눈앞에서 복사해서 번역기에 돌려서 보여주었다.
'나는 여기 오기 전에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예언했었어'
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보고 번역기를 보고 또 나를 보고 번역기를 보고 그랬다.
"켄, 너는 부자가 될 거고 유명해질 거야."
나는 그에게 예언을 해 주었다.
나에게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여행의 경험과 기억을 남겨주었어.
내가 혼자서, 아니면 친구들과 여행객으로 왔었다면 나이로비의 버스 터미널 부근 그 복잡한 동네 게스트하우스에서 어떻게 지낼 수 있었겠어. 나이로비의 부촌, 젊은이의 대통령이라는 정치가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면서 그 사모님이 차려주는 아침식사를 하고 서너 군데의 현지인들 쇼핑센터에서 쇼핑을 하고 마을 골목길 산책을 혼자서 하는 일을 어떻게 할 수가 있었겠어.
내가 엔젤라에게 주었던 휴대폰 케이블을 조용히 사냥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이유였다.
비행기에 무사히 탑승한 뒤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고마웠다. 앞으로 이곳에는 여전히 가난한 한국의 대학생들이 방문할 것이다, 그들을 잘 보살펴 주면 좋겠다. 그러면 그들이 오랜 후 어딘가 어려운 곳에 빚을 갚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럼요! 지구는 둥글어요. 우리는 늘 최선을 다 할 거예요' 하는 답을 그는 보내왔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 그로부터 또 돈을 줄 수 있느냐는 문자가 왔다.
나는 조용히 거절의 답문자를 보냈다.
'여행객과 기관 스탭과의 돈거래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단, 한국의 기관에 이 내용을 말하지는 않겠다.'
다시는 같은 내용의 문자가 오지는 않았다.
내가 볼런투어로 의미를 둔 케냐 여행을 준비할 때, 나는 젊은 학생들의 스펙을 위해 준비된 활동 장소에 내가 '침입'해서 '방해'를 하게 되지 않을까 아주 많은 걱정을 했었다.
그럼에도 굳이 여행을 추진했던 이유는, 언젠가 음식 문제로 다툼이 생긴 아들에게 '아프리카에 가면 굶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좀 다녀오는 게 어때?' 하고 말했던 일 때문이었다.
나는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갈 수 있나?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아들에게 하라고 한 건가?
처음엔 그런 마음의 무거움으로 시작한 여행이었고, 다녀오고 나서는 오히려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여행이 되었다.
내가 찾아갔던 아프리카에는 (찾아야 할 나의) '자아' 같은 것은 없었다. '기아'와 '빈곤' 문제, 그 문제들을 해결해주어야 한다는 '의무' '책임' '가책' 등의단어로 표현되는 상황 같은 것도 없었다. 아프리카는 그저 아프리카다. 여느 여행과 다를 바 없이 있는 그대로 누리기만 하면 되는 대륙이다.
이곳 사람들이 내가 이들에 비해 받은 게 많고 누리는 게 많다고 해서 그것이 공평하지 않다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나 역시 나보다 받은 것 많고 누리는 것 많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것이 공평하지 않다고 여기지 않는 태도를 유지하면서 마음의 울림을 따라 누리는 일 말이다.
여행의 매 순간순간들을 사진으로 찍어두고, 그 사진 속에서 떠올려지는 기억들을 따라가다 보면 모든 장면들은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들 뿐이었음을 새삼 알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만난 모든 이들에게 보낼 수 있는 것이 축복뿐이라는 것, 그것이 내가아프리카를 떠나 오며 알게 된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