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로비의 럭셔리한 주택가에 있는 홈스테이 가정에는 호스트 기드온과 그의 아내, 어린 딸, 여동생 둘, 아내의 남동생 둘과 집안일을 하는 엔젤라, 출입문을 지키는 가드가 살고 있다.
켄의 설명에 따르면 키모리마을 티 농장과 넓은 밭이 딸린(나는 땅의 넓이 개념이 없지만, 시골에서 보았던 대략 천 평 정도의 논을 떠올려 그 기준으로 가늠해 열 배 정도는 될 듯하므로 만평으로 어림하는) 죠슈아의 집은 이만 달러, 우리 돈 이천만 원 정도로 살 수 있다고 했다.
이곳 나이로비 기드온 집은 월세가 만 오천 달러, 우리 돈 천오백만 원 정도라고 했다.
이곳에서는 소를 키우지 않았다. 우유가 필요하면 쇼핑몰에서 사 오면 되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대형 쇼핑몰인 야야 센터에서는 필요한 모든 물건을 살 수 있었다. 물건값은 한국 쇼핑몰과 다르지 않았다.
홈스테이 숙박비용은 따로 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야야 센터에서 기드온 아내와 두 번의 쇼핑을 하면서 현지 숙박비용만큼의 물건 구입 비용을 대신 지불했다. 첫 쇼핑 때는 사뭇 미안해하던 다이애나였지만 두 번째 쇼핑 때는 어린 딸의 기저귀와 분유병 등을 망설임 없이 담고 또 담았다.
기드온은 공항에서 켄과 몇몇 일행을 태운 차에 나를 태우고 집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와이파이 사용을 할 수 있도록 핸드폰에 비번을 입력시켜 주고, 엔젤라를 불러 내 가방을 여동생들의 방에 들여놓아주고, 더운물 샤워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젊은 정치인으로 대통령과 함께 며칠 후에 있을 백악관 회의에 참가하러 갈 준비를 하고 있었던 그는 나의 포토프린터로 여권사진을 출력해 줄 수 있는지 물었고, 나는 기꺼이 페북에서 그의 사진을 다운로드하여 여권사진 한 세트를 출력해 주었다.
여동생 중 한 명인 에밀리가 내가 사용하고 있는 두 대의 아이폰 중 하나를 자신이 가지고 놀아도 되는지 묻기에 통화버튼만 누르지 않으면 빌려줄 수 있다고 했더니 절대로 통화하지 않고 게임만 하겠노라 장담을 하기에 빌려주었지만,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말을 믿지 않아야 하는 그룹에는 사춘기 십 대 청소년이 1순위로 들어간다는 걸 모르는 어른은 아마 없을 거다.
이튿날 두 번의 통화버튼을 누른 기록을 보며 통화하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나 물었더니, 통화버튼은 눌렀지만 통화를 하지는 않았다고 정색을 하며 오히려 나에게 따지고, 핸드폰을 돌려달라고 해도 돌려주지 않으려고 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기드온이 돌려주라 해서 겨우 돌려받았지만 아이폰 충전 케이블 하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에밀리 말이, 기드온이 가져갔다고 했다. 비록 나에게 허락받지 않고 가져간 것이지만 아이폰 충전 케이블이 그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면, 그와 함께 내 아이폰 충전 케이블이 백악관에 동행한다면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주방에 좋은 오븐이 있었다. 항공사의 티켓 메일을 기다리다가 나는그 오븐에 쿠키를 굽고 싶어 졌다. 키모리 주방에서는 프라이팬을 사용해 한 번에 예닐곱 개씩의 비스킷을 구웠었다, 이곳 넓은 주방 작업대에서 반죽을 밀고 한 번에 20여 개의 비스킷을 노릇노릇 구울 수 있는 오븐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비스킷 두 판을 구웠는데 식구들이 무척 좋아했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남자 식구 한 명이 내가 구운 비스킷이 맛있다며 언제 레시피를 알려달라고 말했다. 나는 이리 오라고, 지금 반죽할 거니까 같이 하자는 말을 해버렸고 그는 당황하며 주방 밖으로 나갔다.
'언젠가 레시피를 알려달라'는 말이란 게 우리말로 치면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의 쓰임과 비슷한 말로, 맛있는 거 만든 사람한테 예의상 하는 말이라는 게 뒤늦게 생각이 나서 혼자 막 웃었다.
생각해 볼수록 케냐는 내 적성에는 맞는 곳인 듯했다.
일처리 방법이 우리와 달라서 화가 날 것 같다가도 사람들 얼굴을 보면 정말 최선을 다 해서 성실하게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애쓰는 게 보였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달라서 오래 걸릴 뿐... 그걸 내 방식대로 맞추라고 하면 이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아서 긴 호흡을 배우려고 애썼다.
좋은 공기, 좋은 식재료로 만든 유기농 간결 식단, 긴 호흡..
거리를 걸을 때마다 만나는 사람들은 또 어찌나 다소곳하게 친절한지...
내 마음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부분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다시 세팅하고... 마음 요가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수요일 저녁에는 엔젤라의 안내를 받아 집 뜰에서 열리는 수요예배에 참석했다.
대문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옆 집 문 앞에 텐트가 쳐져 있었는데 그곳으로 사람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매주 수요일에 여기서 워십을 한다고 했다.
어제 내가 쿠키를 구웠던 주방에서는 교회 사람들 몇 명이 분주히 짜파티와 밀크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엔젤라와 텐트로 가서 뒷자리에 앉아 은혜로운 찬송가와 함께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들 틈에서 같은 은혜를 누려보았다. 플라스틱 의자가 빽빽이 놓인 중간중간 여자들이 엎드려 기도를 하며 울기도 하고, 환자인 듯싶은 사람 한 명이 텐트 바깥 잔디밭에 엎디어 기도를 드리고 있었으며, 경배와 찬양은 초대교회가 이런 모습이었겠구나 싶은 간절함과 은혜로움으로 넘쳐나고 있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오가며 성경구절을 읽고 두 여인이 밀을 까부르다 한 여인은 들림을 받고 한 여인은 그대로 있더라는 성경 내용을 설명하는 목사와 진행자는 영어와 스와힐리어로 통역을 하며 말씀을 전했다. 피부색이 다른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들 틈에서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예배에 참가하다가.... 며칠 동안의 긴장이 풀린 듯 잠이 와서 일찍 침실로 돌아와 그들이 준비해 준 짜파티와 밀크티를 먹고 잠이 들었다.
켄이 혼자 티켓 오피스에 가서 알아본 바에 따르면 (전날 나는 에티오피아 항공사의 티켓 오피스 담당자 앞에서 한국 아시아나항공에 전화를 걸어서 이들이 알아야 한다는 예약번호를 알려주었다. 한국 담당자는 내가 지금 케냐에서 홍콩 태풍 때문에 발이 묶였다는 말 한마디만 듣고 최대한 신속하게 나의 정보를 묻고 알려주고, 전화를 끊을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머지는 한국의 항공사를 믿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목요일 출발할 수 있으며 페널티 비용은 내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기드온은 저녁때 미국으로 출발할 예정이며 기드온의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시댁에 가고 엔젤라가 하루 동안 내 식사를 챙겨줄 거라고 했다.
목요일 아침. 엔젤라가 정성스럽게 준비해 주는 빵과 녹차 아침식사, 너구리 라면을 하나 끓여 먹고 켄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제 간다던 기드온의 미국행은 오늘로 미루어졌다 하고, 오늘 오후에 출발하게 될 나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엔젤라가 사진을 찍어줄 수 있는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고 난 당연히 사진을 찍어서 프린트해 주겠다고 했다. 아름다운 십 대의 얼굴과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엔젤라의 표정은 예쁜 옷을 여러 번 갈아입으며 찍은 사진마다 생기 있게 살아있었다.
그녀는, 그녀가 가진 옷 중에서 점잖은 갈색의 겉옷 하나를 나에게 선물이라며 주었다.
나는 미국 여행길에 요긴하게 쓸 수 있을 멀티탭과 충전 케이블을 기드온에게 전해달라고 엔젤라에게 부탁했는데, 엔젤라는 그는 부자이기 때문에 그것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이 그것을 쓰겠다고 했고 난 백 퍼센트 찬성을 해 주었다.
기드온이 켄에게 차를 내어주어서 공항으로 향했고, 엔젤라가 나의 배웅을 위해 따라와 주었다. 나는 차 안에서 한국식의 핸드폰 충전 케이블을 꺼내서 엔젤라에게 멀티탭과 함께 사용하라고 주었는데, 그건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발권이 되는 것을 확인한 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켄에게 남아있던 미국 달러와 케냐 실링을 주기 위해 갔을 때, 엔젤라는 나에게서 받은 케이블과 멀티탭을 그에게 전해주고 있었다. 조용조용한 동작이었으나 빼앗기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했고, 켄에게 돈이 담긴 봉투를 주며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고 그냥 돌아서서 출국장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