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풍경 속에 나를 놓아두다

한 달 살이, 새로운 공간에 익숙해지는 시간

by 최은희

비엔나의 첫인상은 상상과 조금 달랐다.

반짝이는 화려함보다는, 단단하게 눌러놓은 고요가 있었다.




네온사인 대신 석조건물의 묵직한 그림자가 거리를 감싸고 있었다. 비슷한 색조의 건물들은 무언가를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크게 말하지 않는 도시. 간판도, 건물도, 사람도 모두 절제된 톤으로 도시를 구성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지하철에서 내려 숙소까지 가는 길, 나는 몇 번인가 멈춰 섰다.


“여기가 맞나?”


도로는 정돈되어 있었고, 거리 풍경은 내가 서울에서 보던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이곳에선 속도가 아닌 공간의 깊이가 보였다. 건물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단단했고, 창문 하나, 문 손잡이 하나에도 오래된 시간이 스며 있었다.


너무 앞서 걷던 내 감각이 이 도시의 속도에 자꾸 걸려 넘어졌다.



KakaoTalk_Image_2025-07-04-20-26-00_004.jpeg
KakaoTalk_Image_2025-07-04-20-25-56_003.jpeg
KakaoTalk_Photo_2025-07-04-18-24-35 008.jpeg
비엔나 한 달 동안 머무를 공간, 쉘러가세 32


쉘러가세(schallergasse) 32번지.

독일어로 된 선명한 주소가 손에 든 지도 위에 찍혀 있었다.


“32번지... 여기구나.”


내가 한 달간 머무를 숙소였다. 노란 파스텔톤의 5층짜리 건물 입구는 예상보다 더 조용했다. 낯선 골목의 모퉁이, 브라운 컬러의 오래된 나무 문이 나를 맞았다.


손바닥에 닿는 거친 나무결, 차가운 금속 손잡이.


‘열리려나?’


열쇠를 천천히 돌렸을 때 '딸깍' 하고 울린 소리에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 소리 하나로, 나는 이 도시에 진짜로 들어온 듯했다. 아직은 어색한 이 공간이지만, 앞으로 한 달, 내가 살아갈 곳이라는 사실이 조금씩 실감 났다.


문을 열자, 낯설고도 안온한 공기가 나를 맞았다. 높은 천장 아래로 시간이 느리게 가라앉아 있었고, 창문 블라인드 너머로 부드러운 빛이 흘렀다. 일자형 작은 주방에는 이 숙소의 호스트인 바바라가 준비해둔 정갈한 것들이 놓여 있었다. 네스프레소 캡슐, 허브티, 투명한 와인잔.


누군가 나를 기다려준 것만 같은 그 조용한 환영이 따뜻했다.



KakaoTalk_Photo_2025-07-04-18-24-19 003.jpeg
KakaoTalk_Photo_2025-07-04-18-24-27 005.jpeg
호스트인 바바라가 정갈하게 준비해 둔 공간


애플차 티백을 뜨거운 물에 넣고 창가에 앉았다.


"이제 정말, 도착했구나."


시간이 스르르, 옆자리에 와 앉는 느낌이었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구글 맵을 들여다보며 헤매고, 지하철에서 잘못 내렸다. ‘내가 이 도시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왔다.


그런데 지금은, 컵에서 피어나는 김처럼 그 걱정들이 조금씩 사라지는 중이었다.


‘뭐가 그렇게 불안했을까.’


계획이 없다는 게 이렇게 자유로운 일인지 처음 알았다. 누군가의 눈치를 볼 일도 없고, 시간에 쫓길 이유도 없었다. 늦잠을 자도,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도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시간의 속도를 조절하고, 감정의 결을 다시 읽는 공간이었다.



0705_sat_morning tea.jpeg 따뜻한 애플 차를 끓여 마시며 @쉘러가세32


문득 이 공간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벽에 걸린 액자 속 흑백 사진, 창가에 놓인 책들, 부엌 한쪽에 놓인 오래된 나무 도마. 모든 것이 누군가의 손길을 거쳐 이 자리에 있었다. 바바라가 이곳을 준비하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해봤다. 낯선 여행자가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작은 것 하나까지 신경 쓴 흔적들이 곳곳에 보였다.


소파에 걸쳐진 얇은 담요, 식탁에 놓인 매트, 화장실 수건까지. 누군가 살던 집이 아니라 누군가를 위해 준비된 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배려가 새삼 고마웠다. 낯선 공간에서도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집이라는 건 원래 이런 것이어야 하는 게 아닐까. 머물고 싶은 곳.


창밖 건물들의 창문에서 따뜻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 타국이어도 외롭지 않다는 감각.




이 도시에서의 첫날이 이렇게 조용히 시작되었다.

거창한 계획도, 특별한 일정도 없이.

그저 한 공간에 머물며 시간의 결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keyword
이전 02화공기가 다르게 흐르는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