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부르크가르텐, 멍 때리기 좋은 오후

비엔나 왕궁정원의 고요한 초록 속에서

by 최은희

계획에 없던 길이었다.


62번 트램을 타고 빈 오퍼(Wien Oper) 역에서 내려 오페라하우스를 지나치다가, 문득 발걸음이 멈췄다. 괴테의 청동 동상이 보였고, 그 옆으로 공원 입구가 열려 있었다. 특별한 목적지도, 해야 할 일도 없었다. 그냥 들어가 보기로 했다.


"독일 사람이 왜 여기 있지?"


하지만 그런 궁금함도 잠깐이었다. 여행에서는 때로 모든 걸 이해하려 하지 않는 편이 좋다.


"들어가 볼까?"


그냥 받아들이고, 지나가고, 기억하면 된다.




왕궁정원 입구의 괴테 동상(좌) / 공원 분수대 옆 로브 참나무


부르크가르텐에 들어서자 공기가 달라졌다.


아스팔트의 열기는 사라지고, 나무 그늘 아래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도시의 소음을 지워내고 있었다.


여름 끝자락의 나무들이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오동나무는 보랏빛 꽃을 지우고 길쭉한 초록 열매를 달고 있었고, 계수나무의 하트 잎들은 바람에 살랑거렸다. 왈츠의 경쾌한 리듬 같았다. 린든나무의 자그마한 열매들이 동글동글 매달린 모습이 반가웠다. 작년 스웨덴에서도 봤던 나무를 이곳에서 다시 만나니 묘한 기분이었다.


"이 나무는 얼마나 오래됐을까? "


가장 오래 바라본 건 플라타너스였다. 양버즘나무라고도 부르는 그 나무의 두툼한 줄기에는 담녹색과 연회색 수피가 겹쳐 얼룩을 이루고 있었다. 이끼까지 어우러져 만든 자연의 무늬. 이 나무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어쩌면 우리 부모보다도 먼저 이 자리에 서 있었을 것이다.


왕궁정원의 플라타너스(양버즘나무)


넓은 잔디밭 곳곳에는 사람들이 앉아 저마다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는 할머니, 아이를 안고 낮잠에 빠진 아빠, 도시락을 나누는 직장인들. 백발의 노부부는 나란히 앉아 말없이 오후를 음미하고 있었다. 햇살 아래 누운 연인들, 둥글게 모여 앉은 친구들의 웃음소리. 조깅하는 사람, 유모차를 밀며 아기를 안고 가는 젊은 엄마.


“저 엄마의 하루는 얼마나 바쁠까.”


모두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이유로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빈 벤치를 찾아 앉으려 했다. 그런데 막상 앉으려니 이상하게 불편했다.


"그냥 앉아만 있어도 되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는 게 어색했다. 핸드폰을 꺼내 볼까, 책이라도 읽을까. 손이 자꾸 가방 쪽으로 갔다. ‘시간 낭비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바쁘게 살아온 습관이 이렇게 몸에 배어 있었구나.


비엔나, 초록의 부르크가르텐 풍경 (왕궁정원에서)


그때 옆 벤치의 할머니가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손에 든 빵 한 조각을 내밀며 독일어로 뭐라고 말했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따뜻한 눈빛만으로 충분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고, 할머니도 웃으며 자신의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그냥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나무 그늘 아래서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초록 잎들의 향기, 풀잎의 습기, 사람들의 온기가 섞인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호흡이 깊어졌다. 바람이 뺨을 스치는 감촉, 벤치의 온도, 발밑 흙의 부드러움까지. 평소라면 놓쳤을 모든 감각이 또렷해졌다.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5분 이었을지, 30분 이었을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는 걸 잊고 있었다.


"아, 이런 여백이 필요했구나."


이렇게 비어 있는 순간이 오히려 마음을 가장 가득 채워주고 있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물러 있다는 것. 이런 게 진짜 살아있다는 느낌일까.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물기 (부르크가르텐에서)


해가 기울어 그림자가 길어졌다.


바람이 시원해지고 나뭇잎들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옆 벤치의 할머니는 이미 떠났고, 새로운 사람들이 그 자리에 앉았다. 모두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지금 이 순간이 충분히 아름다웠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부르크가르텐을 떠나며 생각했다. 여행에서 가장 소중한 건 새로운 곳을 보는 게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현재를 경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빠르게 지나치지 않고 천천히 머무르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 부르크가르텐이 내게 건넨 선물이었다.


keyword
이전 03화낯선 풍경 속에 나를 놓아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