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가 다르게 흐르는 도시

비엔나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길에서

by 최은희

비엔나 공항에서 나는 처음으로 멈춰 섰다.

정확히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인천공항에서처럼 발걸음을 재촉하는 안내방송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는 선명한 표지판도 없었다. 대신 'EU Citizens''All Passports'라는 간단한 구분만이 있었고, 그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심사 창구는 다섯 개뿐이었다. 그중 두 개는 EU 시민 전용이었고, 남은 세 줄에는 나 같은 외국인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직원들은 서두르지 않았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앞사람과 나 사이에는 한 걸음 이상의 간격이 있었다.


왜 이렇게 안 가까이 붙지? 줄이 이렇게 느려도 되나?


그 거리만큼의 여백이 어색했다.

나는 여권을 쥐고 서 있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막상 내 차례가 다가왔을 때, 직원이 고개를 젓고 다른 창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아, 여기가 아니었구나!


비엔나 공항에서 Ausgang 출구를 찾아가기


그 순간 깨달았다. 낯선 곳에서는 이렇게 작고 단순한 일조차 어려워진다는 것을. 내가 익숙한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예측 가능했다. 지하철 몇 호선을 타야 하는지, 몇 번 출구로 나가야 하는지, 언제쯤 도착할 수 있는지. 하지만 여기서는 ‘Ausgang’이라는 단어 하나도 나를 잠시 멈추게 했다.


출구라는 뜻을 알아차리기까지, 나는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모르는 것과 함께 머물어야 하는 시간들. 그런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 줄 몰랐다.



비엔나 노면전차가 지나가는 도심 풍경


숙소로 향하는 길에서 나는 창밖을 내다봤다.

누군가는 자전거를 천천히 타고 있었고, 누군가는 가방을 든 채 길가에 멈춰 서서 긴 하품을 했다. 차는 거의 보이지 않았고, 대신 트램이 ‘칙칙’ 소리를 내며 도심을 가로질렀다.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 창가에 기댄 사람들, 아무 이유 없이 느리게 걷는 사람들.


서울에서라면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급할 땐 지하철역에서 계단을 두 계단씩 뛰어오르고,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기 전에 미리 발걸음을 옮기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도 전에 ‘열림’ 버튼을 누르던 나에게 이 도시의 속도는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이상했다.

오래 있을수록 마음이 조금씩 편해졌다.


아,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구나.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몸으로 배우는 중이었다. 다음을 준비하지 않아도, 계획에 없던 일이 생겨도, 예상보다 늦어져도 괜찮다는 것을. 입국 도장이 ‘쿵’ 하고 찍히는 소리가 들렸을 때, 처음으로 안도했다.


이제 시작이다.


큰 소리 없이 시작되는 시간이 오히려 더 깊이 와닿았다.



트램에서 마주한 아이 셋과 엄마, 정겨운 삶의 한 순간


‘한 달 살기’라는 말에는 생각보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그건 단순히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도, 새로운 경험을 쌓는 것도 아니다. 익숙한 리듬에서 잠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살아보는 실험이다. 빠름에 길들여진 몸과 마음에 낯선 속도를 허용해 보는 시간이다.


한국에서의 나는 늘 다음을 준비하며 살았다. 다음 약속, 다음 일정, 다음 목표. 멈춰 서는 건 곧 뒤처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효율적이지 않은 시간은 죄책감을 만들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들은 불안했다. ‘원래의 나는 그렇지 않았는데,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살았지?’


하지만 이 도시에서는 줄을 잘못 서는 것도, 단어 하나를 몰라 잠시 멈추는 것도 그냥 하루의 일부였다. 실수해도 괜찮고, 모르는 것이 있어도 괜찮고, 느려도 괜찮다는 것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비엔나 한 달 살이 숙소의 동네 산책


그래서 이 한 달은 여행이라기보다는 회복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아주 개인적인 회복.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를 낯선 공간에서 조용히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공기가 다르게 흐르는 도시에서 나는 지금 천천히 스며드는 중이다. 이 도시의 공기는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보다 천천히 살아보려는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내어준다.


나는 이제 그 공기에 익숙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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