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문득 멈춰 서고 싶었다

새로운 리듬을 찾아서, 비엔나 한 달 살이

by 최은희

7월이 왔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그리고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학교가 조용해지고 강의실 불이 꺼진 오후, 문득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다. 이번 여름은 무엇을 하기보다는 '하지 않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늘 그랬듯이 매일 할 일로 빼곡했다.


정답 없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만들어 내는 일. 학생들을 만나고, 디자인을 설명하고, 평가하고. 그 안에서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그 바깥에서 잊혀가는 나를 문득 떠올리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비엔나 거리의 부드러운 아침 풍경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다.

잘 정리된 책상이 아닌,

낯선 도시의 창가에서.

느긋하게, 조금은 흐트러진 상태로.

무언가 내 안에 쌓여갈 틈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비엔나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뭔가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 쉬기 위해 선택한 도시. 클림트의 도시도, 모차르트의 도시도 아닌—그저 천천히 걸어도 괜찮은 곳.


반듯하고 조용하고, 생각보다 온화한, 작은 숙소에서 한 달을 보내기로 했다. 그 공간은 아침마다 커튼 사이로 부드러운 햇살을 들여보냈다. 창밖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렸고, 가끔 새소리와 종소리가 겹쳐서 들려왔다.



싱싱한 루꼴라, 토마토, 꾸덕한 그릭 요구르트로 차린 아침 식사


무언가를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들.

자연스럽게 눈이 떠진 시간에 천천히 식사를 준비했다. 접시 위의 토마토가 반짝였고, 진한 살구 주스의 온도까지 기억나는 날들이었다.


나를 돌보는 식사, 길을 정하지 않은 산책, 예정 없이 들어간 카페와 서점들. 잘못 내린 트램에서 우연히 마주친 거리 풍경까지. 그 모든 것이 '살아야 한다'는 의무에서 조금 멀어진 상태로, 그냥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쓸모 있게' 살려고만 했는지도 모른다. 뛰어난 성과가 있어야 하고,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야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무의미한 시간이라 여기는 세계에서. 나는 조용히 한 달쯤, 멈춰 서 보기로 했다.



돌아보면 그 한 달은 내가 나에게 허락한 가장 긴 쉼이었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을 보았고, 나를 위해 준비한 식탁에서 무뎌진 감각이 깨어났고, 익숙하지 않은 도시 속에서 익숙한 감정들을 다시 꺼내볼 수 있었다.


왕궁정원 Burggarten에서 만난 커다란 오동나무


걷는 걸음은 예전보다 느렸지만,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졌다. 나는 그 속도를 '나의 리듬'이라 불러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기계처럼 바쁘게 움직이던 날들 사이에서, 비로소 나에게 맞는 속도를 허락받은 기분이었다.


이 글은 그런 리듬 속에서 쓴 기록이다. 디자인을 가르치는 내가, 오히려 삶의 균형과 색감과 구조를 다시 배우게 된 시간. 비엔나의 공간들이 내게 일깨워준 감정의 결들. 가르치는 자로 살아온 내가 다시 '느끼는 사람'으로 돌아간 여름의 기록이다.




누군가에게는 멈춤이 필요한 시기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아무 계획도 하지 않은 하루가 절실할 수도 있다.


'그냥 그런 하루'라고 넘겨버렸던 날들이, 사실은 마음의 중심을 다시 맞추는 시간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다시 살아볼 힘이 생기지 않을까.


만약 이 조용한 기록이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틈을 만들어,

그 사이로 햇살 한 줄기가 들어올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겠다.


이 여름은 지나갔지만,

나는 아직 그 안에 잠시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 여름을 꺼내어, 당신에게 건네고 싶다.


프로이트 뮤지엄 근처, Cafe Sentepe에서


비엔나의 7월, 한 달의 기록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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