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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자버 Apr 26. 2023

20년 경력 팀장님이 회사 그만두던 날

"얘들아, 나 회사를 그만두게 됐어."

오래간만에 볕 좋은 2월 초, 잠깐 간식이나 먹자는 팀장님의 달콤한 제안에 쫄래쫄래 회사 앞 카페에 오순도순 모여있는데 별안간 폭탄 발언을 듣게 됐다. 퇴사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팀장님이었지만, 네? 지금이요? 계획 밖의 일이었다. 회사를 도망가도 내가 먼저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긴 팀장님은 훌륭한 광고회사 CD(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기도 하지만, 밖에서는 사랑받는 에세이 작가이시니 언제고 회사를 떠나셔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팀원인 내가 물어볼 정도였다. "아니, 팀장님 이 고생을 하면서 왜 아직도 회사를 다니셔요?" 그때마다 대답하셨잖아요, 팀원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계속 회사를 다니는 거라고!


팀장님과 내가 같은 대학교를 나오고 같은 MBTI에 같은 고향 출신이고 심지어 같은 고등학교까지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팀장님이 나를 신입 카피라이터로 뽑고 난 다음이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팀장님에 나를 자꾸만 대입해서 생각하게 된 것은 그러한 인적사항 때문이 아니었다. 그놈의 책임감 때문이었다. 쉼 없이 내 역할과 할 일을 찾아 의무감을 지닌 채 철컥철컥 앞으로 나아가려는 성질이 너무 닮았다. 대학 입시를 향해, 취업을 향해, 더 나은 회사를 향해, 회사 밖 나만의 프로젝트를 향해 끊임없이 굴러가는 모습에 주제넘은 감정이입을 해왔던 거다. 그런 팀장님이 갑자기 회사라는 굴레를 끊어내겠다니! 그 결심을 드디어 실행에 옮기게 된 현실 자체가 너무 놀라워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서 슬프진 않았다. 아직 팀장님께 배우고 싶은 게 많아서 아쉽긴 했지만, 언젠가 나도 저렇게 멋지게 퇴사하고 싶다는 생각에 순수하게 응원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한 달 뒤, 팀장님이 회사를 떠나는 날까지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잘된 일이니까! 앞으로 회사에 남을 내 걱정이나 하는 게 맞으니까! 그렇게 팀장님의 회사에서 마지막날에도 캠코더로 해맑게 일상을 기록했다. 환송회 술자리에서 정든 동료들이 눈물짓는 모습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그러나 남일처럼 캠코더에 담았다. 그렇게 마지막 날이 지나가고 팀장님께 영상을 전달하기 위해 메일 창을 켰다. 회사 밖의 일상을 응원하지만 그 어떤 성취가 없어도 괜찮다고, 그냥 오롯이 나에게 충실한 시간을 보내시라는 내용을 전했다. 그리고 나는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건 미래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이었다. 사실 실현 가능하다면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성취가 없어도 괜찮은 삶. 성적이 나오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은 삶. 한마디로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런 삶을 누리고 싶다. 그런데 아직은 용기가 없다. 정해진 틀이 답답하면서도 틀 없는 삶이 무섭고, 그 누구의 눈치도 보고 싶지 않으면서도 감시에 가까운 시선 없는 삶이 무섭다. 알을 깨고 나와 진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꿈을 이루기 위해 춥고 어둡고 배고픈 번데기가 되기를 결심하는 껍데기의 시간이다. 내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동시에 순수하게 두려워하는 시간, 껍데기의 시간.


메일을 쓰면서 펑펑 울고 나니 좀 멋쩍었다. 팀장님과 이별 때문에 슬퍼서 운 게 아니라 자기 연민에 푹 젖어 애처럼 울어버린 느낌이랄까. 그래도 속은 좀 후련해졌다. 내가 바로 4년 PD 경력 버리고 갑자기 신입 카피라이터가 된 사람 아니겠는가. 막연한 자유를 위해 조금은 어둡고 배고프고 추운 곳으로 와버렸다. 내가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되새기면 힘이 난다. 언젠가, 정말 언제일지 모르는 언젠가 나비가 되고 싶다.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길 바란다. 하지만 이런 내 꿈과 욕망을 남들에게 설득하는 일에는 또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 존재한다. 여전히 이 질문에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 잘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광고 회사에 왔어요?"


하... 그게 그러니까요...

설명하기 얼마나 어려우면 제가 이렇게 글을 다 쓰고 앉아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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