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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제 Jan 31. 2024

개척자가 되는 길

무계획이 계획

첫 반항은 나름의 수확을 가져다주었다.

반항의 수확이었는지,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좀 풀어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고등학생이 된 나는 여느 인문계 고등학생이 그렇듯 11시까지 하는 야간자율학습과 새벽까지 가는 독서실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는 부모님의 적응을 도왔고 이해를 부르기엔 충분했다.




그래도 여전히 안 되는 게 하나 있었다.

외박.

12시에 들어오든, 새벽 1시에 들어오든 뭐라고 하진 않겠지만

잠은 집에서 자야 한다는 확고한 철학 때문에 외박만큼은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되는 거였다.

중학교때와 비하면 확실히 자유로워졌지만

나는 마음 한구석에 늘 의문과 갈증을 품고 있었다.


'어차피 늦게 들어오는 것에 대해 제재를 딱히 안 하는데, 외박이 아니라 아침 7시에 들어와 놓고 늦게 온 거라고 하면 되는 게 아닐까 '

같은 식으로 머리를 굴려대곤 했지만,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자유는 싸우고 쟁취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럼 누구와?

부모님과 싸워서 쟁취해 내야 할까


앞서 말했듯이 난 착한 아이였고, 부모님의 고충을 이해하는 장녀였기에 싸우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사실대로 말해보자면 중학교 때만큼 크게 불만 같은 건 없었다.

아니 불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약간 애매한... 불만? 


완강하게 날을 세우며 싸우기에는 내게 주어진 자유와 내가 가진 불만은 약간 애매했다. 

그럼 어쩌지?




기회는 고등학교 3학년.

대학교 입학 원서를 쓰는 수시 기간에 찾아왔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앞둔 어느 날 교실엔 작은 소란이 일었다.



"우와 그럼 너 이제 K대생이야?"

"야 옆반에 누구는 Y대 붙었대"

"쌤들 플랜카드 만드는 소리 벌써 들린다"



수시 합격 발표 날이었다.

K대니, Y대니 하는 상위권 대학에 합격한 이야기가 내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명문대가 아니면 어떠한가.

휴대폰 문자메시지로 날아온 수시 합격 문자를 소중하게 붙잡고, 난 구석에서 홀로 쾌재를 불렀다.


기회.

이건 기회다.

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

합격한 대학교는 두 곳이었는데, 하나는 집에서 20분 거리의 대학교였고, 다른 한 곳은 기차로 3시간 걸리는 다른 지역의 대학교였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전자의 대학은 등록금만 내면 바로 합격이었고, 후자의 대학교는 면접이 있었기에 사실상 완전한 합격은 아니었다.

면접에서 떨어지면 그냥 탈락. 재수 확정인 것이었다.


고민 또 고민

면접 준비는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고, 

재수는 더더욱 생각해보지 않은 분야였다.


부모님께 말씀드리면 당연히 전자의 대학을 가라고 할게 뻔했다.

나는 그렇게 두 대학교 수시합격 사실을 숨긴 채 조용히 혼자 고민하고 있었다.




"네- 여기 oo대학교인데요."



고민은 끝나지도 않았는데, 대학교에선 독촉(?) 전화가 걸려왔다.

걸려온 전화는 예치금 납부 전화로 

예치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등록 의사가 없는 걸로 판단, 다른 예비 추가합격자에게 기회가 돌아간다.


즉,

지금 내가 이 전화기에 대고, 예치금을 내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대로 기회는 넘어간다는 것이었다.

고민할 시간은 짧았고, 

그때 난 아주 멋있는 계획이 떠올랐다.



"어.... 저... 등록 안 할게요"



때론 무계획이 계획일 수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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