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를 회상해 보자면
당돌함 그 자체였다.
지금이야 혼자 가는 여행이 어려운 게 아니지만
고등학교 3학년, 19살의 나는 혼자 다른 지역을 가보기는커녕 혼자 밥을 먹거나 카페를 가는 것도 해보지 못한 그저 우물 안 개구리였다.
그런 내게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지역에 가야만 하는 미션이 생긴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차여행이라니!
그것도 면접을 위해서 말이다.
면접은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었는데 다행히도 나는 오후반이었기에 전날 가서 자고 와야만 하는 참사를 피할 수는 있었다.
뭐, 오후반이라고 하더라도 시간이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면접 시간은 2시.
집에서 기차역까지 가는 시간, 기차를 타고 가는 시간. 도착해서 학교까지 가는 시간 등등을 합하면 새벽부터 일어나서 준비해야 할게 뻔했다.
새벽부터 어딜 나가냐고 물어보시던 부모님께는....
면접을 보러 가는 친구에게 깜짝 파티로 응원해 주고 오기로 했다는 장황한 거짓말을 늘어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허접하기 그지없는 거짓말인데 부모님은 그저 친구들끼리 놀려고 거짓말을 하나보다 정도로 생각하신 듯했다.
부모님께 들키지 않았던 것은 아마 친구들의 공이 컸을 것이다.
역사 내 보관함에 미리 가방을 넣어두고 오자는 치밀한 아이디어와
플랜카드와 선물상자를 동원해 전날 미리 기차역에 도착해서 사진을 찍어놓는 깜찍한 짓.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건
이 모든 계획을 알고도 함구해 주겠다는 의리의 약속까지
모두의 도움과 응원을 등에 업은 나는
새벽 다섯 시.
정갈하게 교복을 챙겨 입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첫 여행에 긴장한 게 무색할 정도로
대한민국의 교통 수준은 높고, 또 편리했으며
길을 잃은 여학생에게 사람들은 친절했다.
택시로 6000원.
대학교에 도착했고, 난 시간 맞춰서 무사히 면접 대기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면접은 막힘없이 술술 이루어졌다.
급하게 준비한 면접이었지만, 다행히도 나름 자신 있는 분야에 대한 질문이 주를 이뤘고
3시간 동안 기차에서 숙면한 덕인지, 맑은 정신으로 또박또박 대답도 잘 해냈다.
면접이 끝나고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왜 그런 기분이 있지 않은가
이건 됐다. 싶은 확신
판단은 끝났고, 나는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도와준 친구들에게 감사문자를 보내곤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면접은 예상대로 합격이었다.
부모님은 수능까지 다 보고 나서도 가타부타 말이 없는 나를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 주셨다.
성적이나 대학에 딱히 연연하시지 않는 성격도 있었지만
혹시나 아이가 수능을 망했을까- 지원한 학교에 떨어진 건가 그래서 말을 하지 않는 건가 하는 조심스러움이 포함되어 있는 배려였다.
그 배려를 난 폭탄으로 갚기로 했다.
"대학교 붙었어. 등록금만 내면 돼"
의아해하는 부모님께 대학교 팸플릿과 면접 합격 통지서를 내밀어 보였다.
[여수캠퍼스-]
여수.
여수.
전라남도 여수.
그때 당시를 회상해보자면
엄마는 아직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며 혀를 내둘렀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여자애 혼자서 그것도 미성년자가 그렇게 덜컥 결정을 하느냐고,
살던 도시도 아니야, 근교에 있는 곳도 아니야
연고도 없고 한 번도 가보지도 않았던 저 땅 끝 전라남도 여수라니.
그날 엄마의 전화기는 불이 났더랬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여럿 말들 중 기억에 남는 말을 꼽아보자면
얌전한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원래 이런 애들이 큰 사고 치는 거다- 라거나
사춘기 때 속 안 썩이더니 다 커서 속 썩인다- 라거나
나와 사촌들은 다들 한 살 터울로 다 비슷비슷한 또래들이었는데
외가, 친가 통틀어서 대학교를 이렇게 멀리, 30분 거리도 아닌 3시간 거리에 가는 애는 내가 처음이었다.
엄마는 종종 우리의 교육이나 훈육, 사춘기 애들 키우면서 드는 고충 등을 외숙모와 통화하면서 풀곤 했다.
어차피 큰애는 많아봤자 4살 차이밖에 안 나니, 어떻게 보면 학부모의 대화이기도 했다.
상담을 해봐도 자식을 멀리 보내본 사람이 없으니,
엄마는 갑자기 찾아온 자식의 독립 소식에 머리를 끙끙 싸매곤 했다.
나는,
엄마에 대한 마지막 배려로써
집 근처 대학교에 합격했었지만, 상의도 없이 냅다 가지 않겠다고 선언 한 사실은
숨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