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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제 Feb 03. 2024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가장이라는 것

통금.

갓 성인이 된 팔팔한 20살과 피 끓는 청춘들에게 통금이라니

이제는 지긋지긋하기까지 했다.


기숙사는 2시가 되면 잠겼고, 6시에 열렸다.

그 사이에 지문을 찍고 들어오면 외박으로 간주되어 벌점 2점.


그 이상한 룰에 반항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기숙사 벌점제도는 일정 이상 벌점이 쌓이면 봉사나 청소 등으로 벌점을 깎아주는 방법이 존재했는데, 그 청소가 좀 귀찮고 은근히 시간을 잡아먹는 일인지라 대부분 순응을 했더라지.


그래서 새벽 2시. 기숙사 앞 벤치에는 

선택을 앞둔 사람들로 북적였다.

6시까지 기다리던지, 아니면 그냥 벌점을 받고 들어가던지.


혹은 벌점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누군가'가 지문을 찍고 들어갈 때 같이 들어가는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난 주로

그 '누군가'였다.


'ㅇㅇ단과대학 벌점 수석', '지문 봉사자', '새벽 3시에 홀연히 나타나 지문을 찍고 문을 잡아주는 은인'


1년의 기숙사 생활.

영광의 타이틀과 함께

나는 총 30점의 벌점, 4번의 벌점 청소, 2번의 기숙사장과의 면담이라는 쾌거를 이루고

화려한 퇴실을 선택했다.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20만 원.

내 진정한 자취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지은 지 20년도 넘어 보이는 빌라는 외관에서도, 내부에서도 그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자주색 몰딩과 알 수 없는 패턴의 빛바랜 색의 벽지.

노란색 장판과 전기보일러.

밤새 데워지는 물은 아침에 샤워를 조금이라도 오래 하면 따뜻한 물이 안 나오고,

방바닥은 따뜻하지만 공기까지 데워지진 않기에 겨울엔 코가 시린 채로 잠을 자야만 했던 

내 첫 자취방이었다.


총체적 난국이면 어떠한가

난 마치 그 방이 지상낙원 파라다이스인 양 자유를 누렸다.


밤늦게 배달음식을 시켜 먹어도, 샤워 후 속옷바람으로 돌아다녀도, 밥 먹고 설거지를 안 해도, 양말을 뒤집어서 벗어놔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그 자유.




그러던 어느 날 새벽이었다.

싱크대 가득 담겨있는 설거지거리를 못 본 체하고 방으로 들어가 빨래 더미 속에 손을 넣어 빨아놓고 개어놓진 않은 잠옷을 찾아 갈아입었다.

이부자리에 피곤한 몸을 뉘이고 잠들기 전 루틴처럼 핸드폰을 켜자, 미처 줄이지 못한 핸드폰 불빛에 눈을 찌푸렸다.

인기척...(?)이 느껴진 건 그쯤이었다.

핸드폰 불빛에 미약하게 형체가 보인 어떤 것




새벽 1시 21분이었다.

검지 손가락만 한.

(한 마디도 아닌 그냥 검지 손가락만 했다.)

불빛을 비추면 눈이 마주칠 법한 사이즈

걸어(?) 다닐 때마다 발소리도 들렸다.


그 새벽 옆집이고 윗집이고 아랫집이고

신경도 못 쓴 채 소리를 지르고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 길로 난 편의점으로 향했다.

동네 편의점을 네 군데를 돌며 바퀴벌레 퇴치약을 종류별 사들고, 집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했던가, 싱크대 속에 처박혀서 탑처럼 쌓여있는 설거지거리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여분의 그릇과 숟가락까지 모조리 싱크대에 들어가 있었으니 말이다.

빨래와 청소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환경에, 벌레가 나오지 않는 게 이상했다.


1인 가구라는 것.

그 말은 내가 하지 않으면 집안일은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아무렇게나 벗어던져놔도 이튿날이면 곱게 개켜진 채로 침대맡에 놓여있던 보송보송한 빨래라거나, 밤늦게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먹고 남은 쓰레기를 그대로 식탁 위에 올려놓고 들어가도 다음날이면 깨끗하게 분리수거가 되어 있던 것.

당연하게도 이는 거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수고로움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이었다.


그동안 신나게 자유를 맛봤으니 이제, 책임질 시간이었다.


1인 가구의 가장이 되는 순간이었다.




피눈물 나는 경험을 토대로

자취 생활을 하며 내가 세운 나름의 규칙이 있다면


설거지, 빨래, 청소는 제때제때 하기.

특히 음식물 쓰레기는 바로바로 처리하기.

날 잡고 청소하자 라는 마음 버리기 정도였다.


그렇게 5년.

나는 프로 가장, 프로 자취러라고 불려도 무방할 정도로 훌륭하게 성장했다.

아직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친구들 중, 날 보고 대단하다고 칭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난 대단한 사람이나 독한 사람 따위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

다만 책임을 회피할 수도, 누군가에게 전가할 수도 없이 

모든 문제를 오롯이 혼자 온몸으로 맞부딪혀야 하는 사람.

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나는 나만의 작은 집에서 내 손으로 오롯이 꾸미고 가꾼 집에서 캔들을 켜놓고, 푹신한 베개와 인형들로 꾸민 작은 공간 속에 파묻혀 핸드폰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손톱을 깎거나 하는 한가한 시간들을 즐기고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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