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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제 Feb 04. 2024

딸이 둘이라는 것

우리의 방

그리고 지금.

난 그 공간이 철거되는 현장을 눈에 담고 있다.


천년만년 이곳에서 살 순 없지. 천년만년 대학생일 수도 없다.

시간은 흐르고, 학교는 졸업장이라는 것을 손에 쥐어준 채 나를 사회인으로 내몰았다.

명분은 사라졌고, 이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5년이란 시간은 실로 어마어마한 시간이었다.

시간만큼 늘어난 짐들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니, 여전히 그대로인, 아니 오히려 더 작아진 방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집은 거실 하나에 화장실 하나. 방은 세 개로 큰방과 중간방 작은방.

무난한 구조의 옛아파트였다.


이쯤에서,

가족 구성원을 소개해 보자면

5인 가정.

아버지와 어머니, 나, 3살 차이 나는 여동생. 그리고 할머니가 계셨다.

금수저 아닌 보통의 벌이, 보통의 중산층의 가정집에서 이 가족 구성원으로 배치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경우의 수를 꼽자면.

큰방은 부모님이 쓰는 안방으로, 작은방은 할머니 방으로, 그리고 중간방은


우리의 방이었다.




내가 중학생 동생이 초등학생일 무렵이었다.

우리는 방 한편에 책상, 옷장 등을 놓고 한 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슈퍼 싱글 사이즈의 침대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둘이 같이 쓰던 매트리스였다.


뭐,

크게 불만일 건 없었다.

잠들기 전 동생과 나누던 대화는 우리 자매의 우애를 나름 돈독하게 해 주었고, 아주 어릴 적부터 이렇게 커왔기 때문에 딱히 불편하지도 않았다.


다만,

문제는 내가 대학교를 졸업 후, 5년간의 자취를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시간은 흐르고 아이는 자란다.

방은 그대로였다. 슈퍼싱글 사이즈의 매트리스도 그대로. 책상과 옷장도 그대로

그대로이지 않은 건 나와 내 짐들 뿐이었다.

5년간 차곡차곡 모아 온 옷가지와 가방 신발, 각종 인테리어 소품이나 책 등등. 작은 방에 억지로 욱여넣고도 모자라 리빙박스에 대충 정리한 채 베란다에 봉인해 두는 지경이었다.


간신히 폭발할 것 같은 짐을 해결하고 나니.

동생의 방학이 다가왔다.




기존에 있던 짐들과 내 짐, 동생이 기숙사에서 가져온 짐들로 방은 더욱 체계를 잃었다.

수직으로 대충 쌓아놓은 구조가 나름 정리를 한답시고 해놓은 최선의 방법이었다.


철 지난 옷은 꺼낼 일이 별로 없으니 큰 상관은 없다.

작은 인테리어 소품이나 아기자기한 조명도 넘어갈 수 있었다.


적응이 안 된 건 그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는 침대였다.

25살과 22살의 어엿한 성인 여성 둘이 비집고 잠들기에는 침대는 너무 작았고 우린 이미 각자만의 자유를 맛 본 상태였다.


그래도 적응을 잘 한쪽은 동생이었다.

아직 대학생 신분이며, 방학이 끝나면 돌아갈 곳이 있는 동생.

그리고 이미 사회인으로 내몰아진 나.


아무런 준비없이 '사회인'으로 내몰아졌기에,

나는 새벽녘에 유난히 더 무겁게 느껴지는 부담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 밤새 뒤척이기 일쑤였고, 작은 침대는 그 뒤척임 마저 쉽게 용납하지 못했다.


나는 그 갑갑함이 마음에서 오는 건지, 좁은 침대에서 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갑갑한 새벽, 숨 쉬는 것조차 무거운 압박감에 버거워질 때쯤이면 나는 그저 베개와 이불을 챙겨 들고 거실로 나가 소파에서 잠을 청했다.


그마저도

새벽 4시가 되면 어김없이 들리는, 지팡이를 끌며 화장실로 향하는.

정갈하게 목욕을 하고 나와서는 한 손에 염주를 쥐고 다 쉰 쇳소리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는 그 성실하고도 간곡한 새벽기도 소리에 늘 잠을 깨곤 했다.

한 번 잠을 깨면, 멈추지 않는 간곡한 기도소리에 베개로 귀를 막아보기도, 머리를 반대쪽으로 돌려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고 나는 새벽녘 멍하니 소파에 앉은 채 집을 둘러보곤 했다.


내가 갈 곳이 아무 데도 없구나.




일요일 저녁.


첫 방영한 한 예능프로그램, 처음 방영했을 때의 그 충격을 잊을 수 없다.

집을 구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는 사람들의 사연을 받아 대신 집을 찾아주는 주말 저녁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매 회 다양한 가족 구성원이 등장했고, 이사를 가는 사연도 이유도 다양했다.

독립을 꿈꾸던 내가 그 프로그램에 매혹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재미있게 보다가도 으레 표정이 찡그려지는 결정이 있었다.



"거실 하나에 방 세 개! 화장실도 두 개나 있는 이 집! 큰방은 부모님의 오붓한 안방으로, 중간방은 사춘기 아들을 위한 방으로 나머지 다른 방은 연년생 자매의 방으로!"


"안쪽 방은 부모님이 사용하는 침실로! 2층에 있는 방은 형제 방으로!"


"방 하나는 수험생 아들이, 다른 방 하나는 중학생 자매가 쓰면 되겠네요~"



"전세도 아니고 매매라면서, 애 둘을 같은 방에 넣으면 다 커서는 자기 방이 없잖아"

"와 중학생인데 방 하나를 같이 쓴다고?"

"왜 꼭 같은 성별이면 방 두 개가 필수가 아니라 방 하나로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 저거 봐 애초에 방 두 개짜리만 구했잖아"


그렇게 볼멘소리를 해대곤 했다.




새벽이면

소파에 앉아 멍하니 집을 둘러보다가 결국 티브이를 틀고

집을 구해준다는 주말 예능 재방송을 튼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면, 신나게 떠드는 출연자들에 반해 뜨거워지는 눈가를 꾹꾹 눌러가며 울음을 참는 내가 있다. 

그렇게 울음을 참아보다가 문득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장소도 없어졌구나, 내가 있을 곳이 없구나 하는 서러운 마음을 주워 담다 지쳐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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