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제 Jan 31. 2024

자유를 갈망하던 아이

통금은 10시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친구들과 나가서 노는 게 잦아질 즈음

미성년자인 나는 당연히 친구들과 나가 놀기 전,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허락을 구해야 했다.

오늘 누구랑 누구랑 어딜 갈 거야-


허락을 구한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놀 수 있는건 아니었다.

내 자유로움을 방해한건 통금시간이었다.


통금.

이 얼마나 숨 막히고 억압적인 단어인가

물론, 겨우 14살밖에 안된 어린 딸이 시내에 나가 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게

그리고 오지 않는 딸을 기다리는 게 얼마나 속이 시꺼메지는 일인지는 이해하지만 말이다.


다행인지 당시의 나는 10시라는 귀가 시간에 의문 따윈 없었기에

부모님과 통금시간 가지고 실랑이하는 수고로움은 없었다.

엄마가 10시에 들어오라고 했으니까 10시까진 가야 해-

9시가 되면 난 늘 이렇게 말했고,

같이 놀던 친구들은 겸사겸사 집에 들어가거나 통금이 없는 친구들끼리만 남아서 따로 더 놀거나 그런 식이었다.


중학생이 노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나는 착한 아이였고, 그건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일탈이라고 해봐야 친구가 빌려온 언니의 MP3로 당시 19세 연령제한이 걸려있는 아이돌 오빠들의 노래를 듣는 것 정도였다.

(가사에 욕이나, 조금이라도 야한 단어가 들어있으면 19세 딱지가 붙어있었다.)




그렇게 3년.

중학생으로서의 마지막 날. 졸업식이 다가왔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우리는 3년 동안 정들었던 친구들과 흩어지는 걸 아쉬워하며

또, 고등학교에 가서도 잘 지내자 라는 마지막 작별 파티를 하기로 했다.


당시의 같이 놀던 친구 중 한 명은 특이하게도 중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였지만 자취를 하고 있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당시의 우리에게 그 내막 중요하지 않았다.

본인도 별 말 없기도 했고.

어렸던 16살의 우리들은 그저 크리스마스 파티를 돈도 안 들고, 어른들의 눈치도 안 보고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것에 그저 기뻐했다.


케이크를 파는 브랜드 중 아는 곳이라고는 파리바게트밖에 없었던 우리는 파리바게트 케이크와 무알콜 칵테일을 거금 4만 원을 들여 사고,

고등학생이 된다는 축배를 들었다.


분위기는 무르익고,  

통금 시간은 가까워졌다.




당시의 나는 믿는 구석이 세 개 있었는데,

첫번째는 나와 똑같이 10시에 통금이 있던 친구였고,

두번째는 이 파티가 아무리 재미있든 난 늘 그랬듯이 10시 통금을 지킬 거라는 자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마지막은 혹시나 내 생각이 바뀌어서 10시 통금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엄마한테 전화만 하면 이 통금시간을 미뤄주지 않을까 라는 오만한 착각이었다.


처음 느껴본 우리들만의 공간에서 한 우리들만의 파티는 황홀할 정도로 재미있었고

속 깊은 이야기 같은 것들도 제법 하면서 우리 우정 영원히를 외치고 있었다.

나는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아니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파티가 재미있었던 만큼 시간은 더 빠르게 다가왔다.

통금이 있는 멤버는 그 6명 중 나를 포함해 2명이었다.

나머지 4명의 친구들은 잠옷이라거나, 세안 도구를 가지고 왔으니 서로 자기 것을 빌려주겠다며 아쉬워하는 우리에게 졸라대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못 이기는 척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10시가 돼서 친구 집을 나선건 눈물바람의 나 하나뿐이었고.

난 그날 처음으로 부모님께 대들었다.

이전 01화 상처 드러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