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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우 Oct 24. 2022

이가 빠졌다

그 이 말고 다른 이


   최근 들어 문서 작업이 꽤나 많았다. 하루 일과 중 고작 몇 시간을 빼놓고는 키보드에 손을 얹은 채로 보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버튼 한 개가 말을 듣지 않았다. 한글의 창제 원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스물 여덟 개의 나랏 말쌈 중 유독 하나만 혹사당할 리 없는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어제 저녁 무렵에는 글을 쓰다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와보니 그 석이 저 혼자 입력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말썽장이는 다름 아닌 ‘ㅣ(이)’ 버튼이었다.

   이유는 수 없지만 판이 눌려진 다음에 다시 튀어나오지 않고, 러다보니 일정 간격을 유지하는 바코드처럼 'ㅣ'가 계속 찍혔으며, 그걸 발견하고선 화들짝 놀라 버튼의 모서리를 서너 번 탁탁거려 뽑아냈더니 그제야 겨우 광란의 자동 입력을 멈추는 것이었다. 오타 지우면 되는 것이니 큰 문제 아니었지만, 리듬을 타고 물처럼 흘러야 하는 타이핑의 순간에 매번 ‘ㅣ’에서만 턱턱 걸리니 나중엔 짜증을 넘어 화가 나기 시작했다.


   결국 글쓰기를 멈추고 수리 도구를 챙겼다. 이리저리 눌러도 보고, 밀어도 보며 나름 용을 쓰던 참이었다. 그런데 무얼 어떻게 건드렸는지 모르지만 버튼이 그만 툭 하고 튕겨 나갔다. 말 그대로 이(ㅣ)가 빠져버린 것이었다.


이가 빠졌다. 진짜다.


  구석으로 달아난 'ㅣ'를 발견하고 집어 드는 순간, 이걸로 아내를 웃겨야겠다는 생각이 냉큼 들었다. 옳지. 바로 그거지.


   키보드의 사진을 찍으면서, 서울에 있는 아내에게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막 잠이 들려던 때였는지 졸린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네,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황여사, 있잖아. 좀 전에 이가 그만 빠져버렸어.”

   “네에?”

   예상했던 대로 아내의 놀란 목소리가 천장에 올라붙었다.

   “어쩌다가요? 빨리 병원에 가봐요. 빠진 이는 잘 챙겨야 해요. 우유에 넣어 가세요. 에휴, 이제 겨우 오십 넘었는데 벌써부터 이가 빠지면 어떡해? 큰일이네.”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입을 틀어막고 한 손으로 'ㅣ'가 빠진 키보드의 사진을 전송했다. 아내의 박장대소를 기대했음은 당연했다.


   잠시 후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아내의 싸늘한 한마디가 내 멱살을 움켜었다.

   “어이, 아저씨."

   "......"

   "사진처럼 진짜로 이 빠지고 싶어? 정말 그렇게 해 줘?”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가 뽑혀나간 틈으로 바깥 공기가 자유롭게 드나드는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영상 통화도 아닌데 손을 저어가며 그런 게 아니라고, 그냥 당신을 웃겨주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수습하느라 땀을 흘렸다. 조심하라는 경고를 남기고 아내는 전화를 뚝 끊었다. 식겁했다.


   딩동. 오분도 채 지나지 않아 휴대폰 화면에 메시지가 떴다. 아내의 재다짐인가 싶어 살짝 긴장을 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황 여사님이 주문하신 컴퓨터 키보드가 내일 고객님께 배송될 예정입니다. 로켓 배송.'


   아아, 역시나. 수내동 원펀치 황 여사는 참으로 관대하신 분이다.

   고마워 여보, 정말 사랑해. 그리고 이젠 엉뚱한 장난, 절대로 안할게요. 진심, 진짜 진심입니다. 

   빠진 이를 들고 여전히 킥킥대는 나의 다짐이었다.




* 이 글은 원래 다른 글의 뒷부분에 붙었던 것인데, 아무런 생각없이 심각한 제목을 붙이는 바람에 많은 분들이 놀랐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저 역시 공감했기 때문에 원문에서는 즉시 삭제했습니다. 하지만 그냥 버리기엔 쪼오금 아까워서 짧은 콩트로 재편집했으니 저의 장난도 용서해 주시고, 이 글도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 Image by Michael Larsson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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