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한 아침이었다. 새벽 기도의 다짐은 명쾌했고 샤워 또한 평소와 다름없이 개운했다. 밤늦게까지 글을 쓰느라 잠은 조금 부족했지만, 비할 바 없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날로 예정된 중요한 약속 때문이었다.
굳이 어느 시인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를 처음 만난다는 것은 새로운 우주가 다가오는 것처럼 참으로 소중하고 고마운 일이다. 55년생 소녀와 61년생 소년, 그리고 71년생 막내의 첫 만남. 우리는 글로 만난 사이, 글로 만날 사이였다. 굳이 지연地緣과 학연學緣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머릿속으로만 상상해오던 이들을 직접 마주한다는 것은, 참으로 설레고 긴장되며 무지하게 기분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약속이 정해지던 보름 전부터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만남이 예정된 날, 좋은 기분으로 시작한 하루는 좋은 일들의 연속이었다.
아침 식사를 갈음할 계란 프라이는 한입거리에 알맞도록 잘 익었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바깥공기는 서울 나들이에 더할 나위 없이 최적화되어 있었다. 큰길 횡단보도에 섰을 때 신호등은 한 걸음도 서성이지 않도록 정확하게 파란 불로 바꿔 주으며, 정류장에 서자마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버스는 문을 활짝 열었다.
처음 보는 것이 당연한 터미널 청소 담당자가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가 하면, 세상 친절하기란 버스 기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운전 실력은 또 얼마나 뛰어난지 에어 서스펜션이 장착된 고급 리무진 뒷자리에 앉은 것처럼, 한 번도 그렇게 해 본 적은 없지만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이어폰은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만 엄선해서 듣기에 딱 좋은 크기로 귓가에서 흥얼거렸다.
처음 가보는 낯선 장소임에도 헤매지 않고 쉽게 찾을 수 있었고, 역시나 난생처음이지만 61년생 소년과 55년생 소녀도 단박에 알아보았다. 그들은 내가 상상했던 것 그 이상으로 그지없이 편안하고 따뜻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소녀의 추천으로 더없이 멋진 점심 장소를 안내받은 막내는, 식사비를 자기가 결제하겠다며 호들갑을 떨어댔지만, 배려심으로 평생을 가꿔온 소녀와 이해심 넉넉한 소년 앞에서는 그저 철없이 까불거리는 한 마리의 다람쥐에 불과했다. 음식은 명불허전 맛있었고 대화 또한 이심전심 즐거웠다.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계속되는 재미난 이야기들은 소년과 소녀, 그리고 막내 세 사람을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다정한 친구처럼 느끼게 해 주었다. 짧은 산책과 함께 대화는 계속되었지만,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언제나 아쉬운 것은 오직 시간이었다. 다음을 기약한다는 것만큼 서운한 것은 없다. 혹시나 이것이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의 모든 것이 좋았던 만큼, 앞으로의 만남도 당연히 그러할 것이라 생각하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리기로 했다.
아들은 내가 도착함과 거의 동시에 신사역 출구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지하철은 승강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는 압구정역 6번 출구에서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침 다섯 시부터 하루 종일 계속되는 좋은 일들. 이런 날은 정말 드물다. 당연히 복권이라도 사야 하는 것 아닐까? 공연한 상상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결혼 이십 주년 기념인데 뭘 먹고 싶어? 당신이 좋아하는 걸로 정해봐.”
그렇게 묻고 아내의 답을 기다렸다. 맥주가 곁들여진 분위기 좋은 장소를 당연히 예상했다. 치킨과 파스타 중에서 간택하는 일만 남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의 선택은 의외였다.
“한식을 먹어도 될까요?”
조금은 이상하다 싶었지만 특별히 토를 달지는 않았다. 무엇이든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우리를 데려간 곳은, 평소에도 손님이 많아서 꽤나 긴 시간 동안 차례를 기다리는 것으로 유명한 식당이었다. 하지만 순서를 예약하기 위해 리셉션으로 다가갔을 때 매니저는 잠시의 지체도 없이 곧장 우리를 꽤나 좋은 위치의 테이블로 안내해주었다. 세상에나. 이렇게 좋은 일들이 연속되는 날은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며칠이 채 되지 않는다. 분명하다.
직원들은 더없이 친절했고 음식 또한 소문난 대로 정갈했다. 하지만 아내가 식사하는 모습이 왠지 심상찮아 보였다.
평소에 그렇게 좋아하던 생선에는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았고, 샐러드 조금과 된장찌개 몇 술이 고작이었다. 맛나 보이는 요리는 죄다 아들과 내 앞으로 밀었다. 궁금했지만 역시 이번에도 묻지 않았다.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낮에 만난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주책을 부리면 어떻게 하냐고 타박했을 것이 뻔한 에피소드에도 아내는 그저 희미하게 웃을 뿐, 달리 말을 하지 않았다. 딱 한번만 더 궁금함을 참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의 커피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커피 마니아인 아내는 뜻밖에 과일 주스를, 아들은 요즘 유행한다는, 내가 이름도 알지 못하는 이상한 마실거리를 주문했다. 화장실에 다녀오니 음료가 이미 나와있었다.
나와 아들의 손을 맞잡고 있던 아내가 뜬금없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쳐다보았다. 아내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당신, 왜 그래? 결혼 이십 주년이라 감회가 새로워? 다음 생에는 나 말고 부디 다른 남자를 선물해달라고 빌고 싶어?”
퍽퍽한 농담을 애써 던졌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 아래로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 들어차기 시작했다. 이미 촉촉함을 넘어선 것이었다.
“황여사,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갑자기 왜 울어?”
아내의 뺨으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흘렀다. 아들도 나도 멍하니 아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은 채, 아내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오빠… 나… 암이래요.”
충격을 받으면 잔을 떨어뜨리는 것, 그것은 드라마에서나 보는 연출된 장면인 줄로만 알았다. 쨍그랑 잔이 깨지고 커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직원들이 황급히 달려오는 것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아내가 굳이 한식을 골랐던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무엇과도 비할 바 없이 좋은 일들로만 가득 찼던, 내 생生에 며칠 안 되는 운수 좋은 날, 2022년 11월 14일, 그날의 마지막 장면은, 역시나 내 생에 처음 경험하는 최악의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당분간 글을 쓰지 못합니다. 우선은 제 아내를 돌봐야겠습니다. 아내가 갑작스럽게 발병發病했는데이렇게 태평스럽게 글을 쓰고 처앉았냐고 타박하실 수도 있습니다. 옳으신 지적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보잘 것 없는 제 글을, 그래도 꾸준히 읽어주신 글 친구님들께 드리는, 제 나름의 작별 인사입니다.
글은 제게 있어 치유와 희망이었습니다. 치유의 희망을 안고 잠시 물러나 있겠습니다. 이별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감정의 간격입니다. 그 간격을 뛰어넘어 반드시 좋은 소식과 함께 돌아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