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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신과 간호사 KokoA Jun 29. 2024

사람이 만드는 병

잔인한 생물

무겁고 무서웠던 처음들의 경험.


-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심(心)이 아니라

병(病)이 붙었는지 알게 되는 것(향수병)

- 머릿속에 뛰어다니는 양이 너무 많아서

질끈 감았던 눈마저 뜨게 되는 것(불면)

- 기본적인 사칙 연산이 헷갈리는 것(인지 저하)

- 종이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없는 것(집중력 저하)

-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감정기복)

- 언제 죽어도 괜찮은 것(자살사고)


그 처음들에 가려져 보지 못했던 가장 끔찍한 것.

사람이었다.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각각의 모진 인적.


외국인이라는 점을 약점 잡아 노동 계약을 어기고 착취하던 재일 교포 사장.

친구를 가장한 적이었던 사람들.

신규 간호사라 아무것도 모르던 내게 답답하다며 머리를 때리고 소리를 지르던 선배 간호사.


내 병, 우울증은 사람이 만든 것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 사람이 만든 것.

가장 가까웠던 가장 먼 사람. 전남편.

내가 향수병에 허덕일 때도 외로움에 사무칠 때도

나를 외면했던 사람.

재일 교포 사장에게 착취당할 때도

친구를 가장한 적의 공격을 받을 때도

지켜주지 않았던 사람.

내 주변으로 다정한 무관심의 벽을 쌓아 올려

나를 고립시켰던 사람.

당신을 좋아하니까 그 벽 안에 갇혀 있어도 좋으니

사랑만 달라 구걸하게 만들었던 사람.


우울은 모든 걸 축소시킨다.

생각, 시야, 가치관, 내가 머리와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들좁게 좁게 만든다.

우울이 차지한 내 마음의 공간은 두발을 모아

오를 수 있을 만한 발판만큼의 공간.

그 좁은 공간에서는 다른 시선으로 볼 여유 같은 건

없어서 나는 그 사람 편에 있었다. 두둔하고 옹호했다.

그래도 내게 사랑이라는 걸 알려준 사람이라고.


우울이 떠나자 내가 머리와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두 발을 모은 발판만큼에서 두발을 벌릴 만큼 늘어났다.

늘어난 만큼 생겨난 공간에 새로 차는 경험들 중 가장 강렬했던 것은 나에게 함부로 했던 사람들, 상처 준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적개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사람이 싫다.

이렇게까지 잔인한 생물이라니.


우울이 남긴 후유증.

믿고 싶으면서도 믿고 싶지 않다.

사랑하고 싶으면서도 사랑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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