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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7호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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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Sep 19. 2022

복수의 흐름

[넘실대다] 편집위원 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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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들 2


소설가 정지돈의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은 이해할 수 없는 감성으로 가득한 에세이 매대를 극도로 기피하는 내가 최고로 꼽는 몇 안 되는 에세이 중 하나다. 이 책은 정지돈이 혼자서, 또는 그 친구들과 함께 도시를 산책하며 생각하고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쓰인 것인데, 텍스트를 정신없이 읽어내려가던 중 어느 대목에서인가 그가 좋아하는 서울의 카페나 식당, 바의 이름들을 나열해둔 것을 마주했던 게 또렷이 기억난다. 신이 나서 상호명마다 밑줄과 동그라미를 치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왜 다 알려줬지? 정지돈과 그 친구들의 안목은, 이렇게 말하자니 자존심이 좀 상하지만, 질투 날 만큼 멋지기 때문에 나는 그동안 탐내온 비밀의 일부를 손에 넣은 기분이 들었지만서도 그가 아끼는 공간들의 이름을 자기 책에서 선뜻 공개한 것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문제의 문단이 홀수 페이지에서 짝수 페이지로 넘어가 있었던 게 화근이다. 그러니까, 페이지를 넘겨 마지막 가게 이름에 동그라미를 치고 나니 이런 문장이 나타난 것이다. “이중에는 유명한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으며 프랜차이즈도 있고 중간에 업종이 바뀐 곳도 있지만 공통점은 하나다. 모두 사라졌다는 것이다.”(208) ……. 나는 가본 적도 없는 공간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감정으로… 밀려오는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나는 뭐든지 잘 잊어버리는 인간이라 지나간 것에 크게 연연해 하는 편이 아닌데 이상하게 도시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다 지나가고 없어진 것, 진작에 사라져버린 것들이 자꾸 떠오른다. 배신이니 뭐니 했지만 실은 나도 이제 없는 소중한 공간의 기억들을 얘기하는 데에는 도가 텄다. 이를테면 송도에서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던 삼 년 전의 나는 트리플스트리트 C동에 자리한 카페 이코복스 2층의 남동쪽 창가 자리를 그렇게 아끼는 사람이었다. 살짝 높고 좁은 듯한 회전의자, 통창 코앞에서 쉴 새 없이 번쩍이던 건너편의 아디다스 전광판, 사악한 가격에 비해 맛은 없었던 맹맹한 아이스커피와 계단을 올라오면 잔뜩 넘쳐 있었던 따뜻한 커피들, 자주 함께 가던 친구 나란히 앉아 공부했던 것들 혼자 앉아 읽던 책과 가끔 조금 울고 싶었던 날들…


끊임없이 떠오르는 기억들을 나열하고 있자니 정지돈이 어떻게 상호명을 적어두는 데 그칠 수 있었는지 조금 신기해졌다. 아무튼 작년 여름, 기대에 부풀어 오랜만에 트리플스트리트에 걸음하기 전만 해도 그곳은 언제까지고 나를 위해 비어 있는 자리일 줄 알았다. 카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포차들로 가득해진 시끌벅적한 거리를 목격했던 그날 정말이지 난 까무러칠 뻔했다. 도시란 이런 곳이다. 매정하게 흘러가는 세계. 도시를 이야기할 때 사라진 공간들을 말하지 않으면 그것은 도시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 도시를 도시로 만드는 것은 변화와 속도감이고, 그렇게 다음이 끊임없이 도래하는 곳이 도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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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무언갈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순간 애도는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론상 모든 도시민들은 매일 사라진 공간들을 애도하며 살아야 한다. 그들이 변화를 필요조건으로 하는 도시를 의식적으로 경험하고 받아들였다면 말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도시의 흐름 사이에 우뚝 서서 주변을 둘러보면… 막을 틈도 없이 건물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가게들이 눈 깜짝할 새 문을 닫고 사람이 집이 거리가 동네가 매일같이 종적을 감추는데 멈춰 서서 그걸 알아보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리고 이런 크고 작은 공간의 상실은 언제나 비슷한 종류의 허무감과 함께 온다. 변화를 피할 수 없다고는 해도, 그게 꼭 이런 식이어야 하나?


그러니까 가본 적도 없는 을지OB베어가 강제로 철거되고 그 간판이 있던 자리에 “힙지로 호프광장” 같은 되도 않는 이름이 내걸린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포차 거리가 되어버린 트리플스트리트 C동에서 맞닥뜨렸던 그 황당함과 허무함이 되살아나는 걸 온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아끼던 공간이 흔적도 없이 감쪽같이 삭제된 자리에 또 다른 멋진 곳이 들어서길 기다리기는커녕 이미 어디선가 수없이 본 것 같은 투명한 목적의 공간이 맥락도 없이 복제되고 있는 꼴을 이렇게 바라보고만 있어야 한다니… 제임슨이 언젠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핵심은 그 목적이 사진에 있다는 것이라고 썼을 때 이런 날이 올 것도 예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최근의 장소들은 공간 그 자체보다 사진, 엄밀히 말해서는 이미지에 천착하고 있다. 고작해야 ‘힙’ 같은 표현이랑 인스타그램만 뺏으면 아무것도 안 남는 시체들이겠지만.


이런 곳들은 신기하게도 금세 생겨나고 금세 사라지는 데 거리낌이 없다. 어차피 다 똑같이 생겨서는 망했다고, 새로 생겼다고, 기간이 끝나서 사라졌다고, 아쉽다고, 들. 나 모르게 그러면 좀 좋겠다 싶지만 처음부터 허물 것을 예정하고도 번쩍번쩍하고 요란하게 쌓아올린 명품 브랜드의 대형 팝업 가건물 같은 것들은 애써 외면하기도 어렵다. 이런 것도 콜하스가 말한 정크스페이스의 일종일까? 어쨌든 제임슨 말마따나 이런 건축은 사진을 어떻게 찍어도 절대 그 전체를 담을 수 없게 생겨먹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사람들이 그런 특징을 즐기거나 이용하고 있기까지 하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편하니까. 보이는 부분만 멋지면 된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다들 꾸미는 것도 매끈한 척하는 것도 다 포기하고 그냥 보이는 모든 것에 멋지다는 표현, 정확히는 힙하다는 표현을 갖다 붙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렇다고 믿게 됐다.


문제는 이렇게 불평하고 나면 내가 했던 말에 내가 걸려들고 만다는 거다. 원체 끊임없는 변화와 속도를 전제로 하는 곳이 도시라면 현재의 전환들엔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나. 나의 애도와 투쟁이 도시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부한 채 과거에 남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일 수 있을까. 역사나 전통, 보존의 가치 같은 단어를 도입하지 않고도 이 토할 것 같은 속도감에 시비를 거는 게 가능한가. 우린 도대체 이게 아니라면 뭘… 도시의 어떤 다음을 원하고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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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빙 둘러 움직여나 보자. 에드워드 양의 <타이페이 스토리>는 급속도로 도시화되는 80년대의 타이페이 한가운데에 선 젊은이들을 담아낸 멋진 영화다. 연인 관계인 두 주인공 아룽과 수첸은 이 영화에서 각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에 안주하려는 인간상과 그에 대비되어 도래할 미래에 발맞추어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바꾸어가는 인간상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흔히들 해석되고 그게 의도된 바인 것 같기도 하지만, 나는 솔직히 작품을 보며 그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들었다. 둘 중 무언가가 지향할 만한 태도로 제시되었다기보다는 그냥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구나 생각하게 하는 정도라고 할까. 그러니까 내가 느끼기에 <타이페이 스토리>에 담긴 것은 거대한 변화 속에서도 저마다의 궤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잠재적 흐름들의 몇몇 양태였다. 이 점이 정말 좋았다.


<타이페이 스토리>에 그려진 것과 마찬가지로 작금의 도시 변화는 많은 경우 자본주의의 흐름에 그 방향성을 내맡기고 있다. 들뢰즈와 과타리의 공저 『안티 오이디푸스』에 따르면 욕망의 흐름은 사회에 접속되어 일반적으로 그 사회에서 통용되는 특정한 코드에 따라 생성되고 배치되는데, 특이하게도 자본주의는 선험적인 허용과 금지의 제약이 없는 체제이기에 이 사회 속에서 모든 욕망은 어떤 믿음이나 규범 등에 한정되지 않고 자유를 얻는다. 문제는 이러한 ‘탈코드화’ 또는 ‘탈영토화’가 “화폐 형식을 띤 추상량들의 공리계”(245), 즉 돈을 통한 더욱 잔혹한 코드화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자본주의 속에서 욕망의 흐름들은 해방되지만, 오로지 자본이 허용하는 조건하에서만 그러하다.


그런 두 사람의 관점에서 욕망을 단 하나의 결정적인 결여, 곧 스스로 어머니의 욕망이 될 수 없고 아버지의 이름에 의해 이를 저지당하는 최초의 결여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파악하는 정신분석학은 그 자체로 본질적인 것이자 복수의 흐름으로 존재하는, ‘생산하는 욕망’을 억압하는 자본주의의 도구적 명목에 불과하다. “기성 질서 속에 저장되지 않는 낯선 흐름들을 흐르게”(208) 하는 욕망은 그 존재만으로도 사회 속 위계와 권력의 구조를 위태롭게 한다. 그러나 욕망을 가족관계의 결핍 속에 욱여넣어 재코드화하고 그 혁명적 가능성을 차단하고 나면 자본주의의 한계, 모든 것을 허용하는 체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욕망을 오이디푸스적인 것으로 왜곡하고 억압함으로써만 수용할 수 있다는 한계이자 기만은 가려지는 것이다.


변화와 속도감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들이 도시를 구성하는 다양한 욕망 기계들의 고유한 흐름과 에너지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자기 고유의 흐름”(29)을 지닌 욕망 기계들은 다른 기계들과 특정한 관계를 맺으며 흐름을 생산하고 절단하고 연결한다. 그런데 수상쩍게도, 쏜살같이 스쳐가는 도시의 어떤 공간들은 어디로 도착할는지조차 모를 방향을 향해 하나같이 비슷한 모습으로 돌진하는 중이다. 어째서? 들뢰즈와 과타리가 준비한 비판의 화살은 자본주의와 정신분석학을 겨눴지만, 내가 보기에 핵심은 이것들이 ‘흐름을 가로막는’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근본적으로 혁명적인 욕망의 흐름이 견디지 못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그건 코드와 체제의 화석화 아래에서 단일하게 고정되는 일이며, 지금의 도시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여겨지는 ‘새로운’ 것들은 실은 언제까지고 똑같을 모양새로, 흐름들을 오도가도 못하게 꾹 찍어누른 채, 스스로의 욕망이나 공간을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욕망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욕망을 향해 봉사하고 있다. 그게 뭔지는 들뢰즈도 과타리도 우리도 다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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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타이페이 스토리>는 타이페이라는 도시에 관한 그 어떤 명시적인 주제의식도 드러내지 않은 채 인물들의 움직임을 따라다니는 데 집중할 뿐이었지만, 영화에 담긴 몇몇 흐름들이 ‘타이페이 스토리’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순간부터 한눈에 담을 수 없던 복잡한 도시의 형상이 눈앞에 뭉게뭉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겐 타이페이가 눈을 마주하지 못하는 불안한 연인들을 지탱할 뿐인 삭막한 무대로 여겨졌을지는 몰라도. 그러나 바로 그 어긋난 흐름들이 교차하고 연결되고 충돌하고 빙 둘러 우회하는 과정의 이야기를 지켜보고 있자니 도시는 사실 이 모든 것이구나 생각하게 되었고, 아룽과 수첸의 욕망이 그린 궤적이 완전히 달랐다고 해도 그들이 같은 마음으로 타이페이라는 도시를 사랑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거라고 믿었다. 나도 꼭 그런 마음으로 서울을 사랑해봐서 다 알 것 같았다.


아무튼, 도시 곳곳을 흘러가는 욕망들을 추적하며 생각하게 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먼저 수첸처럼 다가올 다음을 바라보는 자의 시선에서, 욕망의 흐름을 해방하는 공간을 기대하고 요구하고 직접 꾸려갈 것. 하나의 가치를 향해 단일하게 재코드화된 욕망은 이제 그 본질과 멀어진 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 허구일 뿐이다. 욕망은 복수의 흐름이므로 모든 것을 간편하게 프랜차이즈화하는 억압의 기획에 맞서 싸워야 한다. 내가 살아가고 경험하는 공간과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체험들은 결코 단순한 숫자나 조잡한 이미지 따위로 축소될 수 없다. 분명 그것들보다 훨씬 더 좋은 다음의 가능성이 웅크리고 있다고 믿는다.


다음으로, 저도 모르게 타이페이라는 거대한 도시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었던 아룽과 수첸 두 사람 모두의 시선에서, 나는 이야기들이 계속되길 바란다는 것. 도시를 도시로 만드는 것은 변화와 속도감, 그리고 흐름과 이야기이다. 무엇보다 흐름과 이야기는 누군가의 욕망, 구체적으로는 그의 애정 어린 기억을 축에 두고 빙빙 휘돌며 시작되는 일이 잦다. 그리고 도시를 사랑하는 그런 마음은 금세 여기저기로 옮아서 이곳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든 원치 않든 어느 순간 애정의 흐름에 휩쓸리게 된다. 그러므로 뒤죽박죽 수많은 흐름이 교차하는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지켜져야 할 어떤 방향성이란 게 있다면, 그건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만이 흐름을 만든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무언가 흘러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가 되고 도시가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아룽처럼 지나간 과거를 하염없이 되돌아보는 자의 관점에서, 상실은 텅 빈 결핍이나 한심한 미련만을 불러일으키는 경험이 아니라는 것. 애도 역시 하나의 흐름이다. 그것은 애도하는 이가 만들어낸 욕망의 흐름이기도 하지만, 그가 어쩔 수 없이 애도의 요청에 휘말리게 된다는 점에서 지나간 대상이 남긴 욕망의 잔물결이기도 하다. 다 없는 것, 이제 떠난 것에 관해 얘기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이런 이야기들만이 도시와 우리를, 사라진 공간과 현재의 공간과 도래할 공간을, 많은 것들의 무수한 조합과 흐름을 살게 한다고 믿는다. 애도는 멈춤이 아니라 방류다. 이제 무언가가 다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흐름들 1


사무엘 베케트의 텔레비전 단편극 <쿼드>는 빨강, 노랑, 파랑, 하양 젤라바를 입은 네 명의 아무개가 일정한 규칙과 타악기 리듬에 따라 구부정하고 또 무기력하게 무대를 휘젓는 <쿼드 1>, 넷 모두가 흰 젤라바만 입고 <쿼드 1>보다 더 느린 속도로 적막한 무대를 돌아다니는 <쿼드 2>로 구성된 짧은 영상이다. 각자는 사각형 무대의 한 꼭짓점에서 모서리를 스치듯 걷다가 다음 꼭짓점에서 돌연 몸을 돌리고, 무대 중앙을 가로질러 대각선의 꼭짓점으로 향한다. 매 순간 네 사람은 다른 모서리에 있지만 그 궤도는 같다.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이들이 무대 중앙을 지날 때 ‘위험지대’라 일컫는 정중앙의 지점을 슬쩍 피해 저 너머의 꼭짓점에 당도한다는 것이다. 아무개들은 그곳을 밟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민첩하게 몸을 틀어 위험지대를 피한다.


지난학기가 시작될 무렵, 그러니까 내가 한창 <쿼드>에 빠져 있었을 때를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새로이 다가올지도 모르는 무언가에 대한 기대와 불안, 그리고 실망을 거듭하는 중이었던 것 같다. 정권이 바뀌었고, 예상한 적 없는 경로로 모르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었으며, 해오던 것들과 해본 적 없는 것들을 모두 잘하고 싶었다. 통제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영역에 압도될 때마다 나는 그냥 유튜브에 들어가 <쿼드>를 켜서 아무개들의 움직임을 몇 번이고 멍하니 돌려봤다. 그러면 왜인지 모든 게 괜찮아지는 듯한 느낌이 찾아왔다.


특별히 슬픔에 빠져 있었던 건 아니다. 세상이 이렇게 된 데에 대한 회의는 진작에 겪은 지 오래다. 이 년 전쯤. 일주일을 내리 울며 여름을 보낸 그때 뭔가 나아질 거란 기대는 전부 버렸고, 비관 역시 그닥 쓸모 있는 태도는 아니란 것도 깨달았었다. 말하자면 관조와 약간의 냉소를 지키는 동시에 순간순간 해야 할 일들에 참여하고 믿어온 것들을 위해 노력하는 삶이 양립 가능하다는 걸 배운 시기였다. 그 이래로 사는 게 버겁다거나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방황은 느낀 적이 없었는데, 세상이 너무 크고 미래가 까마득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에 사로잡히자마자 <쿼드> 없이는 그 막막함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다행히 여름이 오고 2년 만에 다시 수영장에 다니기 시작하고부터 <쿼드>는 내 유튜브 시청목록에서 점점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무언이든 한순간에 맹렬히 뒤바뀌는 계절. 세계의 본질을 ‘욕망’으로 파악하고 그 욕망이 스스로 이루어내는 생성, 배치와 조합에 따라 모든 것이 설명된다고 본 들뢰즈와 과타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내 욕망의 흐름이 이 계절에 비로소 방향을 튼 셈이다. 새삼스레 소개하건대 수영은 내 사유와 정체성, 신체적 체험의 가장 큰 축을 차지하는 요소이자 다양한 측면으로 이루어진 나를 온전히 포괄한다고 믿어지는 유일한 활동이다. 그러나 그 중요성만으론 어째서 수영이 <쿼드>의 자리를 빼앗게 되었는지, 어떻게 내 흐름의 배치와 지형을 바꿀 수 있었는지는 아직 설명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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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공일오비 편집위원들과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을 읽고 세미나를 진행하다가 현재 스스로를 이루는 정체성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나누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는데, 그때 난 내 정체성과 신체적 체험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대뜸 수영을 꼽았었다. 수영이 좋고 멋진 이유는 매 순간의 동작과 흐름이 나의 현재를 잇고, 끊임없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수영장에서만은 다가오는 다음이 이어질 뿐 미래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내 몸이 지탱하는 현재의 무게가 미래의 도래를 잊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온다는 생각을 늘어놓고서 나 혼자 동떨어진 이야길 한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지만, 그때 편집위원이었던 만타가 내 수영 이야기에서 자긍심이 느껴진다는 말을 해줘서 정말 기뻤던 기억이 있다.


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이자 정치 이론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그의 세계적인 논문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에서 후기자본주의 내지는 다국적 자본주의 시대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지금은 “지금까지의 자본주의 중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이며, 자본이 아직 상품화되지 않은 영역으로까지 놀라울 정도로 확장되고”(97) 있는 시기라고. 디지털 기술/기계 혁명과 더불어 이러한 전 지구적 팽창은 이전 시대와의 근본적 단절을 낳았으며, 세계 바깥에서 세계와 거리를 두고 그 세계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은 완전히 불가능하게 됐다. 한눈에 담을 수 없는 세계를 완벽히 재현해내거나 적어도 일관된 체계 안에서 설명하기 위한 시도 자체가 가로막힌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는 순간 그동안 내가 시달렸던 어떤 숨가쁨, 미래는커녕 지금 당장 우리가 어디에 있고 무엇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기분 같은 것에 비로소 정확한 설명이 덧붙고 있다고 느꼈다. 칸트가 한때 대결할 의지조차 잃어버리게 만드는 완전한 타자인 거대한 자연 앞에서 느끼는 압도적 감각에 ‘숭고’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을 빌려 제임슨은 우리가 내던져진 이 세계로부터 거의 강제적으로 숭고가 발생한다고 쓰는데, 아마도 이 숭고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세계를 대할 때 처음부터 떠안고 있었던 다소간의 체념과도 비슷한 녀석일 테다. 그 해결책으로 제임슨이 주장하는 것은 “인식적 지도 그리기 미학”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스스로의 위치나 그 전체를 지도 그릴 수 없는 소외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 거대한 세계의 관계망 속에서 주체를 재발견하자는 셈이다.


지금 생각하기로는 수영이 내게 ‘인식적 지도 그리기’의 실천을 일깨워준 간접적인 수단이 아니었을까 싶다. 제멋대로 굴러가는 세상에 대고 할 말이 나날이 사라져서 더 이상 힘을 다해 글로 쓸 것은 없겠다 싶은 요즈음도 수영만 하고 나오면 수영 기록과 그날의 일기를, 읽은 것들과 보고 들은 것, 생각하고 행동한 것들을 정신없이 적어내려가고 있는 날 발견하게 된다. 하나의 지도가 뭉게뭉게 생성되는 것이다. 오직 나만의 거대한 축을 중심으로, 그러나 각각의 이야기들이 저마다의 고유한 흐름을 잃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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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진된 인간』은 질 들뢰즈의 철학적 에세이로, <쿼드>를 포함한 베케트의 네 텔레비전 단편극 비평이자 해제인 이 책에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은 개념들과 함께 내용을 전개한다. “그 자체로 가능한 사건이 고려의 대상이 된 공간 속에서 실현되는 것”(53)이 가능성이다. 또한 번역자의 해제를 참조했을 때, 그것은 이미 주어진 실재와 닮았지만 아직 현실화되지는 않은 파생물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것의 실현은 선택과 배제를 통한 실재의 재현이자 클리셰이기에 ‘창조’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존재의 한계를 규정하는 이 가능성이 남김없이 모두 실현되고 나면, 완전히 소진시키면 무엇이 남는가? 이때 대두되는 것이 바로 ‘잠재성’으로, 그때부터는 비로소 적극적 행위를 통해 잠재성의 역량이 현실화되기 시작한다. 가능한 것을 끝장내는 순간 잠재해 있던 새로운 것의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로부터 <쿼드> 속 아무개들은 소진된 인간들이고, 이들이 “직선으로 나아가면서 가능한 모든 방향을 다 주파”(43)하며 공간을 소진시킴으로써 끝끝내 순간적인 이미지들만을 존재하게 하는 창조적 주체들이라고 쓴다. 어쩌면 아무개들의 반복적인 움직임으로부터 내가 지루함이나 무력감 대신 모종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스스로의 신체를 소진시키며 끌어올린 이미지의 잠재된 역량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끝을 모르고 팽창하는 세상에서 가능의 무게에 압도된 채 더는 그 어떤 실현을 향한 의지도 발휘할 수 없었던 자, 들뢰즈식으로 표현하자면 ‘피로한 인간’에게 소진된 인간의 에너지는 너무나도 먼 것이었다. “피로한 인간은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다. 그러나 소진된 인간은 더 이상 가능하게 할 수 없다.”(23~24)


소진된 인간은 흐름 속에 기꺼이 몸을 내맡길 수 있으면서도 그 흐름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존재이고, 다른 흐름들과 조화롭게 얽히며 하나의 전체를 이루어내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추측해보건대 내가 <쿼드>의 아무개들이 부러웠던 건 그들이 매 순간 스스로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무개들의 무/의식적인 움직임만으로도 가능의 소진이 잠재의 실현으로 뒤집히는 것을 보며 난 내가 원했던 게 바로 이런 삶이라고 생각했다. 찌꺼기에 집착하지 않는 창조자의 삶, 다음을 확신하고 흐름의 연속을 긍정할 줄 아는 삶을 살고 싶었다.


<타이페이 스토리>에는 수첸의 동생 링이 언니와 함께 높은 건물의 옥상에서 도로를 내려다보며 이런 대사를 하는 장면이 있다. “여기선 전부 내려다볼 수 있어. 근데 저 사람들은 나를 못 봐.” 다소 주관적이고 비약적인 해석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 대사를 듣는 동안 왜인지 미래의 관점을 상상하게 됐다. 저 위에는 미래의 눈이 있고 미래는 모두를 보는데 아무도 미래를 못 본다. 그리고 미래도 미래를 못 본다. 미래는 쓸쓸하고 미래는 거기에 있고 미래는 언제나 미래일 뿐, 현재의 연장은 늘 비슷하고도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예측 불가능한 곳을 향해 미래와는 무관하게 제 힘을 지닌 채 나아간다. 변화의 목격자들은 때로 흐름 한가운데 멈춰 서서 미래의 눈을 하고 아래를 바라보지만, 대체로는 흐름의 움직임 속에 함께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건 한참 뒤에 어디 있을지에 대한 게 아니다. 먼 미래의 청사진은 가끔의 희망과 나아감에 물론 좋은 계기가 되어줄 수 있으나 그렇지 않을 때면 그냥 무력한 나를 또렷이 부각시키는 환상밖에 안 된다. 늘상 손에 쥐고 있을 것은 이다음, 내가 어디로 향하고 어디를 밟을지에 대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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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수영장에 있는 동안 물의 흐름을 의식하려고 해본 적이 있다. 그날의 수영일지를 열어 보면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접영 세 바퀴를 끝낸 후엔 뒷사람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풀 벽에 가만히 기댔다 완전히 지친 채로 헐떡이고 있었는데 수영장 여기저기서 만들어진 흐름들이 내 몸을 흔들흔들 움직이게 하는 게 느껴졌다 휩쓸리지 않을 만큼만 힘을 주며 발을 땅에 딛고 물살을 실감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뭔가 낭만적인 것들이 떠오르든가 감상에 젖든가 해야 할 것 같지만 그냥 못하는 사람일수록 흐름 영향이 덜한 가운데 레인에서 돌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물 바깥으로 머리만 내놓고 꼬물꼬물 움직이는 모습이 갑자기 귀여워서 조금 웃었다”.


그런데 실력이 그때보다 좋아져서 수영장 중앙의 3레인 반에 속하게 되었을 때에는 이쪽이 훨씬 힘들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풀 정가운데에서는 거의 모든 흐름을 직접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요한 수면에서 믿을 것은 내 몸밖에 없다는 감각, 나아가기 위해서는 내 힘을 길러야 한다는 느낌 같은 것들이 몹시 생소했다. 재미있는 점은 3레인에 올라온 지 한 달 반쯤 지난 지금은 또 마음이 변해서 몇몇 생각들이 뒤엉켜 있다는 건데, 하나는 역시 다음은 와 봐야 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나로부터 시작해 어디론가 향해갈 흐름들의 방향을 책임감 있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수영장 한가운데에도 미세한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흐름 속에 있는 감각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흐름을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마음이 복잡한 나날이다.


특히 최근에 수시로 고민하고 있는 지점은 세계와 지구의 흐름이 어떻게 인간의 흐름을 버텨낼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다. 얼마 전엔 친구의 추천을 받아 BBC와 HBO의 공동 제작 시리즈 <이어즈&이어즈>를 단숨에 보았는데, 2019년부터 2034년까지를 빠른 속도로 흘러가며 설득력 있게 세상의 붕괴를 그려낸 작품이었다. 6부작의 짧은 영상들 속에서 다뤄진 문제들을 조금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전염병과 이상 기후, 포퓰리즘의 정치권 장악, 핵전쟁, 폭발적인 난민 증가, 치솟는 실업률과 빈부 격차, 뱅크런… 가장 무서운 것은 이 모든 게 지금의 지구 상황을 몇 개의 키워드로 요약해보세요, 라는 요청에 대한 대답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할 거란 사실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드라마 속에서나 그려졌던 가능들은 하나하나 현실화될 것이다.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모양으로.


Years and years, 나는 이 시리즈의 제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면서도 씁쓸했는데, 그것이 정말로 먼 미래가 아니라 매 순간 우리가 직면할 다음을 겨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모든 징후가 더는 지금의 흐름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는 걸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무한한 확장의 꿈은 어느 순간 빵 터져버릴 팽창의 두려움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내 흐름의 책임은 수영장뿐만 아니라 나의 생활공간과 그 너머 모든 곳으로까지 뻗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쿼드> 속 아무개들이 위험지대 앞에서 급히 몸을 돌려 흐름의 배치를 바꾸던 것처럼 방향을 틀기 전엔… 그 어떤 다음도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편집위원 퓨 (rachopin329@naver.com)




참고자료 2

렘 콜하스, 프레드릭 제임슨, 『정크스페이스/미래 도시』

에드워드 양, <타이페이 스토리>

정지돈,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질 들뢰즈, 펠릭스 과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분열증』


참고자료 1

사무엘 베케트, <쿼드>

사이먼 셀란 존스, <이어즈&이어즈>

일라이 클레어, 『망명과 자긍심』

질 들뢰즈, 『소진된 인간』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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