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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7호 0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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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Sep 19. 2022

#2 수직으로 이동하기

[넘실대다] 편집위원 퓨

난 신도시를 좋아한다. 네모지고 평평한 도시들. 누군가는 신도시의 모든 경관이 똑같다고, 계획적이기만 하고 재미는 없다고 미워하지만 거기만큼 살기 편한 곳은 또 없는 것 같다. 가장 좋은 것은 신도시의 바로 그 납작함과 평평함 때문에 자전거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점이다. 송도에 살던 시절엔 왠지 편할 것 같다는 마음에 별 기대 없이 개인 자전거를 기숙사에 가져다 두었었는데, 서울에서는 거들떠도 안 보던 이동수단이 하나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도시에 대한 총체적 인식과 체험, 그 안에서 내가 마주하고 만들어가는 이야기들이 완전히 뒤바뀌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이게 다 송도의 어딜 가나 길 한편을 널찍이 차지하고 있던 자전거도로와 평평한 바닥 덕이다.


물론 그 이후로는 서울에서도 기회만 되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어디까지나 ‘기회만 되면’, 이다. 그러니까 기회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자전거를 구하고 적절한 자리에 갖다두는 일을 쉽게 해낼 수 있을 것. 둘째, 자전거를 타야만 더 빨리 갈 수 있는 길이며, 무엇보다, 자전거를 ‘타도’ 갈 수 있는 길일 것. 첫 번째 조건은 비교적 쉽게 충족된다. 집 근처에서라면 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 된다. 내 자전거를 가져가거나 당장 찾을 수 없는 곳에서라면 공유 자전거를 빌리면 된다. 값도 싸고 대여소도 군데군데 많이 있어서 어렵지 않다. 내가 믿기로는 이 공유 자전거 사업이 도시의 아주 많은 부분을 좋게 만들었을 것이다. 상상 이상으로 많은 부분을.


문제는 두 번째 조건이다. 많은 경우 이 조건은 자전거를 탈 계획을 포기하게 만들기보다는 자전거를 이미 타고 있는 것을 후회하게 만든다. 최근에 있었던 끔찍한 경험을 얘기해볼까. 그날은 신도림역 언저리에서 친구와 신나게 놀다가 목동에 국어 과외를 하러 가야 했던 날인데, 지도를 찍어보니 환승 없이 버스를 타면 40분이 걸리는 길이 자전거를 타면 2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다는 정보가 나왔다. 바로 마음이 혹했다. 오 이거 완전 이득 아냐? 게다가 마침 안내되는 자전거 경로 대부분이 도림천과 안양천에 붙어 있던 것을 보고 나는 망설임 없이 따릉이를 빌렸다. 도시 하천 옆에 조성된 자전거도로만큼 매끈하고 편한 길이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난관은 천이 끝나는 지점에서 찾아왔다. 분명 출발할 땐 아주 완만하고 깔끔하게 닦인 경사로를 따라 편하게 자전거를 타고 천을 향해 내려갔던 것 같은데… 한참 페달을 밟아 도착한 곳에 올라갈 길은 도통 보이지 않았다. 아주 가파르고 울퉁불퉁한 돌계단뿐이었던 것이다. 어찌어찌 왔던 길을 조금 되돌아가서 경사로를 이용해 절벽의 절반쯤은 올라갈 수 있었어도, 물가를 벗어나 도로를 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계단을 넘어야 했다. 몹시 당황스러웠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난 도대체가 진짜로 사용하라고 만든 것인지 알 수 없는, 계단 끄트머리의 자전거용 경사로에 바퀴를 받치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수직의 계단을 올랐다. 곧 만나게 될 익숙한 도로의 광경을 염원하며.


그런데 정작 눈앞에 나타난 것은 차들이 쌩쌩 달리는 양평교 위였다. 목동 구역으로 완벽히 진입하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했던 것이다. 다행히 목적지에 가까운 쪽에 올라선 터라 아래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또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복잡하고 까마득한 계단… 도저히 따릉이를 들고 내려갈 힘이 없었던 나는 그 좁디좁은 인도에서 자전거를 돌려 목적지의 반대 방향으로, 즉 다리 저 건너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저쪽엔 완만한 경사로 하나쯤은 있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도 경사로는 없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거의 울면서 자전거를 꼭 붙든 채 위태롭게 계단을 내려가야 했다. 간신히 근처 대여소에 자전거를 반납했고, 이젠 한 번 가로지른 그 다리 위로 다시 걸어 올라갈 차례였다.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다.


그 이후로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는 수직의 계단을 도로 올라, 오직 자동차에게만 친절한 양평교를 다시 가로질러, 잘못 헛디디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은 수직의 계단을 내려가, 간신히 원하는 곳에 도착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똑똑히 기억하는데, 분명 지도 속 안양천의 막바지에서 목적지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5분이었다. 여유를 두고 출발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버스를 탔더라면 시원하게 도시를 구경하다 편하게 목동에 내려 맛난 커피까지 마시고도 남았을 시간이 수직으로 이동하는 일에 전부 먹혀버린 것이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다. 자전거를 타도 갈 수 있는 길이어야 한다는 두 번째 조건의 충족 여부는 대부분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알게 된다. 아! 이 길은 자전거로 갈 수 없는 길이구나! 이미 자전거로 왔지만.


이쯤이면 예상할 수 있을 테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지도 어플리케이션에서는 모든 길이 완전한 평면이다. 그러니까 그 어떤 경로를 검색해도 수직 방향으로의 이동은 고려되지 않는 것이다. 길만 그런가? 건물도 많아 봤자 높이 정보뿐이다. 거기에 엘리베이터가 존재하는지, 바퀴 달린 탈것이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경사로가 있는지는 배리어프리맵을 따로 찾거나 직접 가보지 않는 이상 전혀 알 길이 없다. 나 스스로가 바퀴 달린 탈것과 종종 함께 다니게 된 이래로는 그놈의 수직 이동이 얼마나 원망스러운 것인지 매 순간 생각하게 되었다. 왜 쓸데없이 여기에 턱을 만들어놨지? 왜 이곳엔 계단밖에 없지? 걷기도 힘든 이런 가파른 길에 바퀴가 굴러갈 수나 있나? 여의치 않을 땐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자전거도 이 모양인데 휠체어나 유모차는?


우리 머리 꼭대기에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카메라나 GPS 장치는 분명 유용하다. 평면의 지도에서는 무엇이 누가 어디에 있는지 금방 눈에 보이고, 이곳과 저곳의 거리, 여기서 저기로 가는 가장 쉬운 방법 같은 것들을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알아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기술과 지식이 실제와 별로 가깝지 못하다는 거다. 두께를 고려하지 않는 납작한 시야는 많은 것을 지운다. 끊임없이 어딘가를 오르내려야만 하는 우리네 삶을, 좀처럼 막힘 없이 매끄럽기만 할 수는 없는 길과 지형들을, 굴곡지고 울퉁불퉁하게 수직의 방향으로 뻗어나간 세계들을, 때로 그 앞에서 멈칫하고 저마다의 가능한 궤적을 찾아 우회하는 바퀴의 경로와 이동의 역사들을. 확신하는데, 삶이나 인식과 동떨어진 기술은 별로 좋은 기술도 쓸모 있는 기술도 아니다.


이제 나는 좀 궁금하다. 두 발의 힘을 사용해 바퀴를 굴려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게 고작인 이 물건이 내 삶에 들어왔을 때 나의 체험과 이야기들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면, 그 바퀴가 진입할 수 있는 길들이 확대되었을 때 나는 또 어떤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될까? 기술이 수직으로의 복잡한 이동들을 바라보고 세계에 존재하던 수직의 장벽들이 또 다른 기술들로 허물어지기 시작할 때 우린 어떤 다음을 마주하게 될까? 추측하건대 그건 공유 자전거 사업 같은 것보다도 훨씬 더 도시와 삶의 많은 부분을 좋게 만들 것이다. 상상 이상으로 많은 부분을. 적어도 지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이거다. 한 사람의 길을 좌우하는 기회와 경험들은 수직에 대한 대책이 있는 장소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결론, 두께를 아는 도시가 진정 좋은 도시다.



편집위원 퓨 (rachopin32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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