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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20호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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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관 공일오비 Mar 15. 2024

불평등은 언제나 우리 곁에

편집위원 느루


사회과학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를 움직이는 모든 변수를 알고 있다고 가정할 수도 없으며, 특정 변인을 통제하여 인과관계를 추측해 보려 해도 그 추측을 현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자주 눈에 보이는 몇몇 변수들만을 뭉뚱그려서 나와 너의 다름을 구별하려 드는 실수를 범한다. 이런 구별짓기는 다름을 틀림으로 만들고,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배타성을 더욱 강화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우리에게는 구별짓기의 방법론이 이분법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어 보인다. 상대방 혹은 상대 집단의 서사는 깡그리 무시해 버린 채로, 단지 ‘내 세계에 더 이상 침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일념 하나로 구별짓기는 우리 일상을 잠식해 나간다. 


그러나, 남에게 존재하는 위험마저 ‘남의 것’으로 치부하고 선을 긋는다고 해서 그 위험이 ‘내 위험’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여기서 위험이란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위협하는 차원의 위험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목숨을 위협하는 차원의 위험을 의미한다. 이런 차원의 위험을 이 글에서는 ‘절박한 위험’이라고 표현하려 한다. 이런 ‘절박한 위험’은 원인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울뿐더러 단시간에 위험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조차 쉽지 않다. 


대체로 ‘절박한 위험’은 불평등의 그늘 아래서 곪아간 채로 발견되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절박한 위험’을 끄집어내려 하지도 않고, 불평등의 그늘을 없애려 들지도 않는다. 당장 나와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일뿐더러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꺼도 ‘당장의 일상’을 영위하는 데에 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평등은 언제나 우리 곁에’ 남게 된다. 


불평등의 귀책 사유를 사회와 구조가 아니라 개인에게서 찾으며, 불평등이 거대해져 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한다. 하지만 불평등이 만들어낸 ‘절박한 위험’ 또한 ‘언제나 우리 곁에’서 거대해진다. 이 위험마저 ‘남의 것’으로 치부하려는 순간 ‘남의 위험’은 곧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구조적 문제를 고쳤어야 한다는 목소리는 잊힌 채로 비로소 ‘나의 위험’이 되었을 때, 우리는 서로를 탓한다. 구별짓기의 총체적 실패와 문제를 직시하지 않으려는 게으름이 거대한 위험으로 다가올 때야 비로소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는 데에 매달리는 것이다. ‘절박한 위험’은 이때가 되어서야 그 실체를 드러내고 우리 삶에 침투한다.


한편, 돌봄과 노동은 생명이라는 필연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돌봄과 노동은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인간의 삶과 함께해 왔다. 따라서, 돌봄과 노동에서 존엄성이 사라질 때 비로소 우리는 위험을 직시할 수 있으며 이는 계층을 막론하고 누구에게든 위협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돌봄과 노동 현장에서의 위험을 직시하지 않고 공유하지 않으려 하며, 사회경제적으로 충격을 완화해 줄 만한 어떠한 제도적인 여유도 없는 우리가 맞닥뜨린 몇 가지 ‘절박한 위험’들을 짚어보기 위해서.





돌봄과 불평등: 정말 우리는 존엄하게 돌봐주며 동시에 존엄하게 돌봄받을 수 있는가


[고독과 존엄, 죽음의 불평등]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하야카와 치에 감독의 영화 [플랜 75]를 볼 기회가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 남동철 수석프로그래머는 영화를 이렇게 소개한다.


“<플랜 75>의 설정은 일본 사회가 직면한 하나의 문제를 제기한다. 초고령 사회로 접어들고 노인 인구가 너무 많아지자 일본 정부는 ‘플랜 75’라는 정책을 시행한다. 75세 이상 노인의 경우, 국가가 나서 안락사를 권장하는 것이다. 의료비와 사회보장 지출 등 노인을 부양하는 비용은 증가하지만 그들이 경제에 기여하는 바는 부족하다는 인식이 이런 정책을 가능하게 만든다. TV에선 안락사를 선택해서 행복하다는 증언이 나오고, 정부는 안락사를 선택한 노인에게 마지막 여행과 장례를 지원해 준다.”


영화는 단순히 ‘안락사를 지원하는 국가’를 다루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호텔 청소 일을 하는 비정규직 78세 여성의 삶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불안정한지, 동시에 약해진 사회경제적 지위가 어떻게 삶을 ‘보잘것없는 상태’로 이끄는지 세세하게 그려낸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는 곳에서 퇴거를 요구받고, 일자리를 구하려 해도 나이 때문에 거절당하는 그녀의 삶은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차라리 안락사를 택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사회가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노인들은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어서 행복함’을 강조하며, 마지막으로 10만 엔(약 100만 원)을 받아 돈 때문에 해볼 수 없었던 일들을 즐기고 생을 마감하려 한다.  


하야카와 치에 감독은 국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영화를 받아들이냐(에 관한 문제는) 관객들에게 맡기고 싶어 ‘영화를 이렇게 생각해 주세요’ 같은 것은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합니다만, 고령화 문제에 관련해서 말씀드리자면 출구가 보이지 않는 큰 문제에 우리가 직면해 있으며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분노가 국가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고령자라는 당사자들에게 분노의 화살이 향하기 쉽다는 것이 굉장히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생각하는 좋은 죽음은 다 다르기 때문에 일괄적으로 말씀드릴 수는 없는데요, 그러게요, 저는… 그 사람이 자신을 소중한 존재라고 느끼면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존엄이 있는 죽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누구나 다 나이가 들고 고령자가 되기 때문에 나와 관련 있는 문제로서 모두가 당사자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 하야카와 치에, [플랜 75] 영화감독

[플랜 75]에서 나타난 문제의식처럼, 차라리 안락사를 선택하는 것이 낫겠다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목소리는 우리 사회에서 ‘고독사’의 형태로 실현되고 있다. 10년에 한 번 꼴로 거대한 경제위기를 맞는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사회경제적 지위의 약화는 단순히 개인을 ‘먹고살기 힘들게’ 하는 결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지난 2017년부터 2021년까지, 한국에서 고독사로 사망한 사람은 총 1만 5천 66명이다. 그 중 50대 남성이 고독사 사망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혼으로 가족관계가 단절됨에 따라 근로능력 및 의지를 상실한 경우가 많아서 50대 남성의 고독사 사망 건수가 가장 많다고 추정은 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흔들림으로 인해 발생한 고독에는 우리는 감히 짐작조차 하기 힘든 인간사적 맥락이 뒤섞여 있다. 이런 인간사적 맥락에는 관계의 단절, 경제적 어려움, 심리적 문제 등 여러 차원의 문제가 배배 꼬여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간한 “2022년 고독사 예방 실태조사 연구 보고서”는 조사 대상 1인 가구의 22.4%가 고독사 중위험군 이상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고독사 중위험군 이상 범위에 포함되려면 설문조사에서 40점 이상의 점수를 받아야 하는데, 해당 설문조사에서 중위험군 이상 판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40점 이상의 점수를 받으려면 위 항목들에서 최소 4개 이상의 지표에서 ‘도울 사람 없음’, ‘소통 및 외출 횟수 없음’ 등의 답변을 해야 하는데, 이는 사회경제적 지위와 사회 연결망의 심각한 손상을 뜻함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직관적으로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고독사 중위험군 이상인 사람들 중 가구 소득이 200만 원 이하인 저소득층이 63.0%를 차지하니 자활사업이나 수급비 인상으로 경제적 지원을 해주고, 고독사 예방할 수 있도록 집집마다 활동 감지 센서를 달아주고, 명절에 기부 물품 들어오면 나눠주는 식으로 사람들의 안부를 확인하자는 대안들 말이다. 


사실 앞서 언급한 정책들은 이미 시행되고 있다. 매년 수급비는 오르고 있고, 고독사를 확인할 수 있는 활동 감지 센서들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이런 조치들이 불평등을 해소하고 사회연결망을 회복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활동 감지 센서는 고독사를 예방하기보다는 확인하는 수단에 가깝다. 그리고, 수급비를 올린다고 사람들의 생계가 정말 나아질까? 주민센터에서 일하면서 보고 들은 수많은 사연들을 생각해 보면, 저소득층이 주로 소비하는 필수소비재 물가가 너무 가파르게 올라서, 금융 지식 부족으로 인한 금융 범죄에 연루되어서, 알코올 중독이 심해서 돈을 관리할 수 없어서 등등 꽤나 많은 원인이 ‘경제적 불평등’을 만든다. 그리고 놀라운 점은 이런 경제적 불평등은 상당수가 사회 연결망의 붕괴, 그리고 돌봄의 부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는, 아니 어쩌면 인류는 수많은 불평등의 원인을 집단생활과 돌봄의 공유로 보완함으로써 지속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교육 수준에 따른 정보의 불평등을 공동체의 정보력이 메꾸고, 경제적 불평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돌봄의 빈자리를 공동체 구성원이 메꿔주는 식으로 인간 사회는 불평등을 애써 무시하고 존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회연결망이 무너지며 돌봄이 사라지고 있다. 이제 돌봄은 ‘당연한 것’의 차원을 넘어섰다. 남을 돌보고, 돌봄을 받는 것이 하나의 ‘능력’이 되었다는 생각마저 든다. 돈이 많든 적든, 무너진 연결망 아래에서 정말 필요할 때 즉시 돌봄을 받는 것이 난감해진 것이다. 그래서, 고독하지 않은, 존엄한 죽음을 맞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것을 ‘다른 사람의 문제’, ‘나와 상관없는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취약함, 삶의 우연성, 육체의 유한성,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개념은 결국 젊고 건강한 이들만을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개념은 언젠가 젊고 건강한 이들 또한 반드시 배신할 것이다. 다른 사회에 대한 상상력은 무엇보다 인간의 취약함을 사유하는 데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 김영옥, 메이, 이지은, 전희경 지음.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중. 


[간병비 줄이기 프로젝트?]


이러한 돌봄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한 국가와 민간의 노력은 대체로 ‘비용을 낮추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병원에서의 간병비 부담을 덜어주려고 하는 시도는 ‘비용을 낮춤으로써 돌봄 부담을 줄이려고 하는 시도’의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의힘은 2024년 총선 공약으로 ‘간병비 급여화’와 ‘간병비 연말정산 세액공제’ 정책을 들고나왔을 만큼 국민의 간병비 부담은 막대하다. 중앙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2019년에는 하루 7만~9만 원 정도였던 간병비가 이제 12만~15만 원 수준에 이르렀을 정도로 물가상승을 감안해도 간병비가 가파르게 상승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런 간병비를 급여화함으로써 국민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을 정책의 목표로 잡는 것은 사실 언뜻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곧바로 자신의 급여는 하루 24시간을 기준으로 일당 8만 원이며 일주일에 한 번씩 반드시 현금으로 정산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왠지 주눅이 들어,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제 머릿속은 자동으로 예상 입원 일수에 숫자 8을 곱하고 있었습니다. 총액은 제 평균 한 달 수입보다 많더군요. 부담스럽다고 느꼈던 것은 우선 프리랜서 출판 번역자로 제가 버는 돈이 워낙 적기도 했고, 또 간병비라는 항목을 지출하는 게 처음이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일당 8만 원이면 큰돈 같아도 하루 24시간 기준이라 시급으로 계산하면 최저시급에도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예상 간병 비용을 계산해 보고 살짝 놀랐지만 서둘러 머릿속에 떠오른 그 숫자를 지워버렸습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으니까요.” 

- 김지혜 지음, 소설 “자두” 중


그런데 정말 간병비 부담을 낮추는 것이 장기적으로 국가와 사회가 받아들일 돌봄 부담을 줄이고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의 존엄성을 확보할 방안이 될 수 있을까? 물론 지금 주어진 현실 아래에서, 간병비 인하 및 건강보험 급여화는 단기적으로 환자와 가족들에게 가장 도움이 될 만한 조치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국가에 ‘돌봄의 종착지가 요양병원이 되어버린 현실을 바꿀 수는 없을지’와 같은 의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가족을 요양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은 마음이 찢어질 듯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건강이 나빠져 요양병원에 입원하는 경우도 있지만, 치료가 불가능한 만성질환을 마냥 옆에서 간병하는 것이 정말 힘든 일이기도 하며, 당장 타지에서 생업을 이어나가야 하는 가족들의 입장에서 요양병원 입원 및 간병인 고용 말고는 뚜렷한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약사이자 칼럼니스트인 박한슬 작가는 <주간조선> 기고에서 요양병원 장기 입원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요양병원에 181일 이상 입원한 장기 입원 환자의 비율은 평균 49.1%”에 달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대부분의 장기 입원 환자가 치료가 불가능한 치매와 노쇠 등의 만성질환을 앓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대가족의 해체로 인해 가정 내 돌봄이 힘들어졌고, 이런 현실 때문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나쁘지 않은데도 사람들이 요양병원에서 길게 입원함으로써 건강보험 재정이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으니, 지역사회 통합돌봄과 같은 돌봄 안전망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 사회복지의 일선에서 흔히 보이는 요양보호사와 생활지원사들이 지역사회에서 활동하면서 어느 정도 돌봄 수요를 메꿔주고 있긴 하다. 하지만 하루에 여러 돌봄 수요자의 가정을 방문해 집안일을 하고, 가족이라도 하기 힘든 수발까지 들어주면서도 이들의 임금은 월 250만 원을 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요양보호사 자격이 있어도 힘들어서 일을 관두기 십상이고, 당연히 장기적으로 이런 형태의 돌봄은 지속 가능할 수 없을 것이라는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박한슬 작가가 언급한 것처럼, 장기적으로는 지역사회가 돌봄의 부담을 함께 분담하고, 사회경제적 위기가 닥칠 때마다 서서히 늘어나는 돌봄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돌봄 인프라를 갖출 필요가 있다. 치매와 같은 치료가 불가능한 만성 질환을 앓는 사람들의 돌봄 수요를 요양병원에 가지 않고서도 충족시킬 수 있도록 정책의 전환이 절실한 시점이다.


[사라진 돌봄, 잊힌 감각, 불평등의 증거]


한편, 돌봄의 부재는 많은 감각을 기억에서 지운다. 감각이 무뎌진다는 것은 곧 내가 느끼는 감각을 다른 사람들이 함께 느끼거나 이야기하면서 서로의 감각을 객관화할 기회를 잃는 것을 의미한다. 후각은 돌봄의 부재로 인해 가장 먼저 무뎌지는 감각이다. 흔히 말하는 홀아비 냄새, 곰팡내, 땀에 쩐내 같은 냄새는 예삿일이고 차마 형언하기 힘든 차원의 냄새까지, 돌봄이 부족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느낄 수 있는 일들이다.

이런 일들에 익숙해지다 보면 돌봄을 제공하는 봉사에도 양지와 음지가 구분된다는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구별짓기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불평등을 들춰내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 정치인들이 선거철만 되면 등장하는 연탄배달, 대학생들이 흔히 하는 교육봉사, 교회에서 하는 어르신 무료 급식소 같은 봉사활동은 희망과 미래를 바라보는 양지의 봉사에 가깝다. 양지의 봉사는 대체로 봉사자들과 기부자들의 감각을 그다지 자극하지 않는다. 양지의 복지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은 대체로 밝은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따뜻한 겨울을 보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양지의 봉사는 그 자체로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며,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될 고마운 도움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음지의 봉사는 그렇지 않다. 저장강박가구 및 중증 치매 환자 가구 청소 지원, 알코올중독 가구 방문 및 상담, 공폐가 철거 지원 같은 봉사는 차마 사진으로 남기기 힘들 정도로 현장이 참담한 경우가 많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과 해충들의 사체,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심각한 수준의 악취, 심하게 녹이 슬어서 폐기하려고 손을 대면 으스러지는 폐자재들까지. 이 글을 읽는 이들을 배려하기 위해 이 정도로 묘사하는 것뿐이지, 열거한 사례들보다 훨씬 심각한 사례들도 많다. 이런 환경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단 10초도 머물기 힘든 곳이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양지와 음지를 구분짓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인증샷’이라고 생각한다. 미디어는 냄새를 전달하지 못한다. ‘나 여기서 이렇게 땀흘려 봉사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보도자료로 뿌리고 SNS에 인증샷을 올릴 정도의 봉사는 ‘양지의 봉사’를 정의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기준이다. 


그래서 이른바 ‘양지의 봉사’를 보도하거나 SNS로 공유하고 홍보하는 행위들을 보면서 자조적인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시혜와 선의에 기댄 양지의 봉사는 그 자체로 불평등의 수직적인 구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수단에 그치는 것 아닐까 하는 자조 말이다. 음지의 봉사는 ‘당장 해결하지 못하면 나의 경계를 곧 침범할 것 같은’, 동시에 ‘그 누구도 이곳에서 웃으면서 봉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섬뜩한 감정과 함께한다. 불평등의 기둥을 따라 흘러내려온 우울과 어두움이 이곳에서 더 이상 흐를 곳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왜 불평등의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 아니, 불평등의 그림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외면하는 것 같다. 


왜 이 사람이, 이 건물이 아무에게도 존재의 필요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는지, 그 책임을 국가와 구조에 돌리지 못하는가. 왜 사라진 돌봄과 무너진 사회경제적 지위의 귀책 사유를 개인에게만 돌리려고 하는가. 그런 식의 접근법이 정말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 하는가? 이렇게 불평등을 의도적으로 외면해서 나아지는 현실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개인을 둘러싼 서사가 낳은 비극을 과하게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비극을 개인의 차원에서 해석하려 드는 순간 그 사람이 지나온 삶의 서사는 깡그리 무시해 버림과 동시에 그를 둘러싼 사회경제적 맥락은 어디 내다 버렸는지 개인에 대한 비난만 이어간다. 그런 식의 얕은 비난은 그 사람의 삶을 개선하는 데에, 냉소에 절여진 우리들의 비관적 사고방식을 고치는 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급자들이 이런 기부 물품 받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따위의 생각을 하는 것은 결국 그들과 나를 구분짓기 하려는 탈공동체적인 사고인 동시에 현실을 전혀 개선하지도 못하는, 정말 해로운 생각이다. 어떤 방식으로라도 도움받고 싶어서 주민센터에 온 사람들, 특히 노인들은 신청서 하나 작성하는 것도 버거운 것은 당연하고 공무원들의 친절한 설명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 그런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을 천성이 게을러서, 남에게 빌붙어 살려고, 자생의 의지가 없어서 따위의 천박한 논리로 퉁치는 순간 불평등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지게 된다.


또한, 약자에 대한 시혜적 시선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잘사는 사람이 못사는 사람을 연민하고 동정하는 것이 돌봄의 동인이 되는 순간 돌봄 관계는 수직적으로 정의된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의 서사와 맥락을 당사자가 아닌 이들이 파악하고 도움을 주려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왜 독거노인이 되었는지, 집안의 누가 사기를 당해 이혼을 당하고 가족관계가 단절되었는지, 무슨 일을 하다가 사고를 당해 어떤 돌봄이 필요한지 파악하기는 굉장히 어렵다. 이런 이유에서 명절만 되면 돌아오는 지역 은행과 기업들의 선물 세트 후원, 그리고 구청장과 기업 사장이 선물 세트가 잔뜩 실린 트럭 앞에서 현수막 걸고 웃으며 사진 찍는 방식 따위는 정작 돌봄이 필요한 이들에게 그다지 실질적인 도움이 아니다.


돌봄의 부재는 불평등 아래에서 커져만 간다. 관계의 단절과 돌봄의 부재를 시대의 흐름이라고 냉소하고 넘어가기엔 당장 우리 이웃의 삶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기술 발전과 정부의 선심성 정책에 기대어 돌봄의 부재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궁극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왜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발생하는지, 그 이면에 담겨 있는 구조적 문제를 고민하고,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있는 ‘불평등 의식’을 어떻게 밖으로 끄집어낼 수 있을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면에서 돌봄의 부재는 당장 우리 곁에 있는 위험이자, 불평등을 직시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지점이다.


불평등은 언제나 우리 곁에 숨 쉬고 있으며, 돌봄의 부재와 감각의 상실은 불평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고름일 뿐이다. 그래서 더더욱 국가와 공동체는 돌봄을 제공하는데 있어 ‘시혜와 선의’의 자세에서 벗어나 같은 한 인간으로서, 헌법과 법률이 수호하는 존엄함을 지켜달라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안전한 노동과 불평등: 생과 사를 구별짓기


[노동은 생각보다 우리 곁에 있고 동시에 우리 곁에 있지 않다]


우리가 철저한 객체로서 목격하는 노동은 대체로 ‘우리 곁에 있지 않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축만으로도 우리들의 노동은 구별될 수 있으며, 그 구분은 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의 넘어서는 안 되는 선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그렇게 일터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의 연봉과 노동계급은 ‘물어봐서는 안 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소진은 ‘계급 없는 사회에서 계급을 드러내기 -다시, 사적인 것을 정치화해야 할 때’라는 글에서 서로의 계급에 대해 “‘묻지 않기’ 관행으로 인해 잔인한 낙관주의는 유지되며 강화된다”라고 말한다. 그 낙관주의란, 노오-력하면 언젠가 계층 상승이라는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잔인한 기대를 일컫는다. 이런 낙관주의적 세계관에서, “사회적 구조로부터 비롯되는 불행의 원인”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 곧 미덕이 된다. 이런 사회에서 ‘노동’과 ‘계급’에 대한 의문이 설 자리는 사라진다.


서로의 계급에 대해 묻지 않음으로써 다른 사람의 노동은 철저히 객체화되며 타자화된다. 다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지 ‘묻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가 흐릿해져 간다. 다른 사람의 노동에 대해 묻지 않는 것이 하나의 ‘예의’이자 ‘도리’가 된 사회가 꼭 나쁘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되려 계급에 대해 묻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사회를 재단하고 문제시하는 것 또한 새로운 차원에서의 편협함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묻지 않기’는 ‘위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노동계가 그토록 오랫동안 언급해 왔던 ‘위험의 외주화’는 무엇에서 비롯되었는가. 원가절감을 위해, 생산성 향상을 위해 하도급을 끌어다 쓰고, 정규직 노조가 위험하다고 주장한 일들을 결국 하청이 맡게 된 것과 다르지 않지 않은가. 그 과정에서 하청이 맡게 된 일들은 모두가 알지만 묻지 않으려고 하는 노동이 되어버린다. 이처럼 다른 사람의 노동을 묻지 않는 것은 단순한 무관심의 차원을 넘어서 다른 사람이 노동 현장에서 마주할 수 있는 위험조차 외부화할 수 있다. 노동 현장 위험관리의 총체적 부실은 다름 아닌 ‘서로의 노동에 대해 묻지 않기’라는 불문율에서 온다.


불문율이 가져온 노동 현장에서의 침묵은 다른 사람의 노동을 ‘우리 곁에 있지 않은 것’으로 만든다. 하지만 그렇게 아무리 애써 다른 사람의 노동을 궁금해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의 노동과 그 노동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우리 곁에 있다. 우리 곁에 있는 노동을 우리가 의식하는지, 의식하지 않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뉴스에 지겹도록 나온 6411번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빌딩 청소노동자들의 노동이 ‘우리 곁에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동시에 청소노동자들이 노동 현장에서 마주하는 위험 요인 또한 ‘우리 곁에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노동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노동이 마주할 위험의 존재와 함께한다. 우리가 애써 외면해 왔던 ‘다른 이들이 노동 현장에서 마주할 위험’들은, 우리와 그들 사이에 그어져 있는 경계를 넘어 모두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위험한 현장에서의 노동을 거부할 권리]


우리 산업안전보건법 제52조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위험이 있을 시 노동자가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일을 멈추고 대피할 수 있도록 ‘작업중지권’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작업중지권을 노동자의 자의로 발동하면 손해배상 소송을 당할 위험이 있다. 시사인의 보도에 따르면, 전형배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노동조합이 강한 현대차에서도 안전 우려로 라인을 세우면 손해배상 소송을 당한다. 노조가 없는 기업의 노동자나 특수고용직에게 (작업중지권은) 현실적으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다. 사실 작업중지권에 대한 논의는 몇 번 이뤄졌다. 온열질환으로 인한 쿠팡 물류센터 노동자의 사망, SPC 제빵사 사망사건에서 또한 ‘안전하지 않은 노동환경에서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을 더욱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구체적인 논의가 법제화로 이어지진 못했다. 이와 관련해서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권창영 겸임교수는 “작업중지권의 법리”라는 연구에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지난 2013년 수행한 작업중지에 관한 사례조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대체로 작업중지권을 수용하는 범위와 의식 수준의 차이가 기업체 규모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으나, 여전히 열악한 편임을 지적한다.


“첫째. 작업중지권은 기업 규모 및 노동조합 유무에 따라 그 사용에 큰 편차를 보이고 있다. (중략) 일부 대기업의 경우 작업중지권의 남용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정도로 산업안전 의식은 높아졌고,기업 측도 이를 수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소규모 이하의 작업현장이나 건설현장을 포함하여 비정규 근로자들이 다수 일하고 있는 작업현장에서 작업중지권은 ‘그림의 떡’과 같이 사문화된 권리였다.
둘째, 작업중지권의 활용 실태를 보면 사고 예방보다는 인사사고 등 중대재해 발생 이후에 행사되는 특징을 보인다. (중략) 특히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대다수 비정규, 영세중소기업 근로자의 경우 위험상황을 인지했다고 해도 작업중지권을 행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 산업현장의 현실이다.” 
- 권창영, “작업중지권의 법리” 중


[변화를 변화라고 말하지 못하니]


이처럼 위험을 회피할 권리가 사문화된 현실 아래에서, 또 다른 대안은 아예 노동 현장에 위험이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가 강력하게 감독하고, 안전보건조치를 규정대로 하지 않았으면 경영자를 처벌하는 것이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하 중처법)은 그런 면에서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다.


2022년 5월, 경기도 고양시 요양병원 증축 공사 현장에서 하청 노동자가 작업 중 5층 높이에서 추락했다. 이는 중처법 적용 첫 사례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검찰은 원청 대표를 기소했다. 2023년 4월, 의정부지법 고양지원에서 있었던 중처법 위반 1호 선고에서 원청 대표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다. 놀라운 지점은 1심 판결 이후 검찰과 피고인이 모두 항소를 포기해 중처법 1호 판례가 1심에서 종결되었다는 것이었다. 어이없게도 이 지점에 대한 주류언론의 보도는 없다시피 했으며, 소식을 듣고 인터넷을 뒤져본 후에야 검찰이 1심에서 항소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시 판결을 보도한 매일노동뉴스에 따르면, 의정부지검 고양지청은 원청 대표에게 징역 2년을 구형했으나, ‘피고인과 유족이 합의해 처벌을 원치 않았으며’, ‘내부 항소 기준에 따라 사실오인과 양형부당을 다툴 여지가 적다고 해석했다’고 입장을 밝혔다. 재판부는 ‘건설 노동자들이 인위적으로 안전 난간을 철거하는 등의 관행’, 그리고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위로금을 지급하여 합의한 점’ 등을 감형 사유로 밝혔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2022년 9월 검찰총장 인사청문회 당시 ‘기계적 항소가 피고인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데 공감하며, 지양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또한 ‘법원의 선고가 양형을 충족해도 사회적으로 더 높은 형을 받아야 할 범죄는 항소하되, 선고가 양형기준에 못 미쳐도 구체적 내용을 살펴 항소할 이유가 없는 건 하지 말라’는 구체적인 지침이 있었다는 중앙일보의 보도 또한 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기는 지점은, 노동계와 재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던 중처법 적용 1호 기소 건에서까지 ‘기계적 항소를 지양하자’는 지침이 적용되었어야 했냐는 것이다. 충분한 법리검토와 사실관계 확인을 거쳤더라도, 이런 식의 결말이 과연 기업들에게 어떤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 아쉬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중처법이 산재를 예방하는 데에 효과적이지 않는다는 설익은 비판은 2023년 초반을 전후로 소위 ‘주류 언론’에서 쏟아졌다. 조선일보는 2023년 1월 27일 자 사설에서 “기업이 현장 안전 관리를 강화하기보다는 방어적 행동에만 치우치고 있다”고 하며, “현장에 그물 치고, 신호수 배치하고, 위험 주의판을 단다고 중대 재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기업들이 형사처벌을 의식해 안전 관리 매뉴얼 작성, 절차서 마련, 형식적 교육에 치중하느라 법률 컨설팅을 하는 로펌들만 돈을 번다는 평가도 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이 기사를 읽으면서 ‘저런 형식적인 조치라도 취하도록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서 다행이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선일보가 지적한 것처럼, 작업장 벽에 ‘안전보건 경영방침’ 붙인다고 노동 현장의 안전이 확보되진 않는다. 그런데, 정말 많은 기업들이 단순히 ‘경영자’의 책임 회피만을 위해 로펌에서 컨설팅 받고 안전관리자 선임하려 하는가? 그 과정에서 암묵적으로 수행되지 않았던 안전 조치들이 시정되고, 안전을 위협하던 노동 현장에서의 관행이 사라지고 있다면, 그것을 정말 ‘의미 없는 변화’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까.


중처법 시행 이후 꽤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기업들이 앞장서서 산업안전 컨설팅을 받아 사업장의 위험요소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기업들은 중처법 시행령 규정에 따라서 안전관리자를 선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미디어가 앞장서서 ‘중대재해를 예방하는 데에 아무런 소용이 없는 중처법’이라고 깎아내리는 것이 타당한가? 오히려 산재 사건이 일어나면 기사 몇 줄 써주던 소위 ‘주류언론’들이 중처법 적용 사례를 기획 기사로 다뤄주고, 산재가 발생하면 경영주에게 큰일이 일어난다는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은 중처법 제정이 이뤄낸 소기의 성과에 가깝다. 고용노동부가 ‘중대재해 사이렌’을 만들어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바로 알기’ 따위의 책들이 서점 한 편을 장식하는 것이 정말 산업안전의 확보와 거리가 먼 행위들이라는 말인가. 중처법마저 없었다면 결코 이뤄지지 않았을 변화들이다.


하지만 여전히 끼임, 추락으로 인한 산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고 있다. 2023년 3분기(누적) 기준 재해조사 대상 사고사망자는 여전히 459명에 이른다. (이건 놀랍게도 전년 동기 대비 51명이 감소한 수치다.) 여전히 하루에 1명 이상은 일터에서 목숨을 잃는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런데도 중처법이 우리 현실에 맞지 않고, 재계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악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노동현장에서의 위험은 곧 공동체의 위험으로 전가될 수 있으며, 노동현장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안전 수칙들로 인해 노동 현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던 시민의 목숨도 위협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정말 중처법 도입 이후의 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들이라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20호 공동기획이자 맺음말: 20만 원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령 그런 거다. 한 사안에 대해 대립하는 두 가지 입장인 A와 B가 있다고 하자. B를 지지하는 근거를 바탕으로 B가 필요하다고 하면, A의 옹호자들은 ‘그럼 A는 필요 없다는 것인가?’ 따위의 반론을 펼치는 것이 흔히 보인다. 납작하게 보면 이런 논의는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비판’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납작한 평면을 조물조물 만져보면 대부분의 사안은 ‘이분법에 대한 비판’이라는 칼로 대뜸 잘릴 수 없는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사안들을 물로 칼 베듯이 ‘A는 틀렸고 B는 옳다’고 단정하는 식의 토론은 이제 무섭다. 어려운 이해관계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더 나은 대안을 찾으려는 시도는,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쉽고 단순한 관념으로 포섭하려는 이들의 유혹 아래 물거품이 되곤 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을 다룰 때가 그렇다.


공일오비 20호를 맞아서 모든 편집위원들이 ‘20’을 주제로 잡고 하나씩 글을 쓰기로 했다. 원래 쓰려고 했던 ‘20’에 대한 글을 쓰다가 노트북이 다운되어서 저장된 글이 다 날아간 후 주제를 고쳐잡기로 하다가, 사람들은 ‘20만 원’을 어떻게 소비하는지 써보려고 했다. 사실, 나와 내 친구들은 어떻게 20만 원을 소비하는지 궁금하다는 막연한 질문으로 글을 시작했다. 하지만 무한한 생각의 굴레는 어느덧 ‘모두에게 20만 원이 가지는 액면가’는 같은데, 20만 원을 소비한다는 행위가 갖는 무게는 사람마다 너무 다르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가 쓰는 20만 원의 무게와 다른 사람이 쓰는 20만 원의 무게가 천차만별인데, 감히 그 무게를 소재로 글을 쓸 자격이 내게 있냐는 반문이 먼저 들었다. 다행인 점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점에 있었다. 평소에 KBS 김원장 기자의 글을 즐겨 읽는데, 그는 지난 주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1억 원은 누군가에게는 딸에게 주는 손목 시계의 값이지만 누군가는 보이스피싱을 당해 한강으로 향하는 목숨같은 값이다. 중력이 다른 별에 사는 사람들의 몸무게를 비교하는 게 의미 없듯이 1억 원은 사람마다 각자의 무게를 지닌다. 자꾸 이 생각을 하면 경제 기사를 쓸 때 머리가 너무 복잡해진다.
성숙하다는 것은 내 주변의 누군가 느끼는 심연의 슬픔을 공감하는 것이다. 그런데 경제 기사는 이것을 수치로 표현할 수 없다. 경제 기사에 등장하는 1억 원은 금방 형해화 되어 그저 숫자의 의미만 남는다. 생명값이나 시계값이나 그냥 1억 원이다. 그러니 영끌로 1억 원 대출을 받아 시흥에 남양주에 평택에 아파트를 산 젊은 부부가 집값이 1억 원 내렸을 때의 슬픔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들에게 1억 원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값이다."

CPI니 명목GDP니 아무리 떠들어도 그게 시민들의 삶을 그려줄 수 있는 설명력 있는 지표가 맞을까. 언론인들이 공허하게 떠드는 경제 지표는 정말 시민의 삶을 잘 보여줄 수 있을까. 국가와 권력자는 x.xx% 경제가 성장했다고 떠드는 것을 시민들이 얼마나 공허하게 받아들이는지 제대로 이해나 해줄 수 있을까. 회의적인 의문들이 머릿속을 스치면서 도저히 나는 이 글을 제대로 쓸만한 ‘깜’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지식의 두께가 두껍다고, 조금 높은 자리에 있다고, 나이가 많다고 경제적 불평등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누군가의 삶을 ‘공감하려는 노력’과 ‘어떤 사람’의 삶을 직접 살아내면서 얻은 ‘흉터’들은 분명 다르다. 다른 사람의 삶을 공감하려고 노력해도 흉터를 완전히 이해하고 짐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불평등의 문제에서 당사자성은 그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산이라고 생각한다. 그 산의 높이를 얕잡아보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이 갇힌 우물의 깊이는 더욱 깊어지며, 오만의 높이는 하늘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편집위원 느루 (hushpond@yonsei.ac.kr)



참고문헌 (인용 순서대로 정렬)


남동철, 2022 부산국제영화제 [플랜 75] 프로그램 노트. https://www.biff.kr/kor/html/archive/arc_history_view.asp?pyear=2022&s1=&page=8&m_idx=60962&kind=history

티앤씨재단, "75세 노인의 자살을 지원합니다" | 영화 '플랜 75' 하야카와 치에 감독 인터뷰. 2024.02.09. https://www.youtube.com/watch?v=2PCKPabh9PE&pp=ygUd7ZSM656cNzUg7ZWY7JW87Lm07JmAIOy5mOyXkF0%3D

한겨레, 정인선 기자. 50대 남성, 술 그리고 26.6일…법의학자가 분석한 ‘고독사’. 2024.01.15.

보건복지부,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고숙자·안 영·황남희·이아영·최현수. 2022년 고독사 예방 실태조사 연구. (2022). https://www.mohw.go.kr/board.es?mid=a10411010100&bid=0019&act=view&list_no=1479983&tag=&nPage=1

김영옥, 메이, 이지은, 전희경.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 봄날의책, 2020.

중앙일보, 서지원 기자. "월 500만원 써요"…11% 폭등한 간병비가 무서운 진짜 이유. 2023.06.26.

이주혜. “자두”. 창비, 2020.

주간조선 2777호, 박한슬 작가. 요양병원 장기 입원의 딜레마. 2023.09.28.

이소진, ‘계급 없는 사회에서 계급을 드러내기 -다시, 사적인 것을 정치화해야 할 때’.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여름. 문학과지성사, 2023.

권창영. (2023). 작업중지권의 법리. 법학평론,13(),9-84.

시사인, 전혜원 기자. 폭염 노동, 과학적 관리가 안 되고 있다 [극한 기후, 극한 노동 ⑥]. 2023.07.28.

매일노동뉴스, 홍준표 기자. 중대재해 1호 판결, 검찰·피고인 ‘항소 포기’. 2023.04.14.

중앙일보, 강찬호 기자. 이원석 총장 취임 뒤 '항소 포기' 잦아진 검찰..이유는?. 2023.03.29

고용노동부 보도자료. 2023년 9월말 산업재해 현황 부가통계 “재해조사 대상 사망사고 발생현황” 잠정결과 발표. (2023). https://www.moel.go.kr/news/enews/report/enewsView.do?news_seq=15773

조선일보 사설. [사설] 아무 실효 없었던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1년. 2023.01.27.

김원장 기자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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