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14호 02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희관 공일오비 Apr 13. 2021

희생과 적대를 넘어

[당신들의 천국] 편집위원 물결

회복, 포용, 도약?


‘내년에는 좀 다르겠지’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비껴나갔다. 코로나19 대유행의 국면 속에서 맞이한 2021년은 여전히 낯익은 풍경 속이었다. 집에 머물라는 건조한 명령만이 메아리치고, 인내심 없이 명령을 어긴 이들에게 비난이 쏟아지는 그런 풍경. 이 풍경에서 가장 숨 막히는 것은, 매일 수 백 명을 가볍게 웃도는 확진자 수로 인해 삶이 온라인으로 내몰리고 있지만 그곳이 지금 가장 빠르게 혐오와 분노의 정동이 공유되는 장이라는 사실이다. 여전히 코로나19 관련 뉴스에는 중국인의 입국부터 막았어야 했다는 제노포빅(xenophobic)한 댓글이 달리고, 어떤 이들은 백신 접종을 하루 빨리 시작하지 않는 정부를 한탄하며 식민주의적 패배감을 표하기 일쑤다. 방역대책본부 브리핑의 실시간 채팅창 또한 원색적인 비난이 점령한지 오래다.


한편 이 댓글 창들에도 코로나19 정국에 곧 전환점이 오리라 희망을 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백신 접종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새로운 감염병을 종식시킬 최후의 대안으로 언급했던 백신은 온갖 과학 역량이 총동원된 결과 불과 1년이 안된 시점에서 개발, 사용 승인 과정을 마쳤고, 1월까지 36개국 1,2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백신 접종을 받았다. 이는 코로나19 피해 규모를 생각하면 아직 턱없이 부족한 숫자지만, 그럼에도 세계는 올해 안에 일상을 회복할 것이라는 상상으로 한껏 고양되어 있는 듯하다. 유럽 최다 사망자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영국은 1월까지 2만 명의 접종을 완료하며 감염병을 서서히 물리치고 있다는 희망을 드러냈다. 거리 두기와 확진자 격리 등 기본적인 조치마저 실패하며 미국을 최악의 혼란으로 이끌었던 도널드 트럼프도 첫 백신 접종 이후에 “미국과 전 세계에 축하를 보낸다”라며 이른 승리감을 드러냈다. ‘핀셋 방역’에 대한 정치적 혼란을 거치고 있는 대한민국 정부도 유난해 보이긴 마찬가지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월 발표한 신년사에서 백신 접종 시작을 예고하며 2021년이 ‘회복의 해’, ‘포용의 해’, ‘도약의 해’ 가 될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이 거창한 수사들이 설레발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감각일까? 수많은 이들이 앞서 지적했듯, 전염병의 확산은 인간의 이동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사회적인 현상이다. 팬데믹이 백신만으로 손쉽게 해결될 리 없으며, 정치적, 사회적 영역에서의 해결이 필수적이라는 뜻이다. 이 난국을 과학기술의 힘만으로 손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은 지금 이곳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억압, 착취, 불평등의 문제를 가릴 뿐이다.


감염의 위험을 확대, 증폭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을 되묻지 않은 채 발화되는 ‘회복’, ‘포용’, ‘도약’ 같은 수사는 허무맹랑하다. 우리가 정녕 팬데믹을 해결하고 싶다면, 나는 우선 다음의 질문을 되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통과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사태에 대응하는 방식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달려있다. 이 상황의 원인과 문제를 무엇으로 보는지가 그에 따르는 해석을 형성하고, 선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질문에 답하는 시작점으로 우리가 팬데믹 속에서 목격했던 몇 가지 장면들을 꼽으려 한다. 그리고 그 장면들을 겹쳐놓으면서 팬데믹이라는 경험을 읽어보려 한다.


이미 도래한 재난


장면1.

2020년 2월, 청도대남병원에서 한국 최초의 코로나19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가 20년 이상을 폐쇄병동에서 지냈으며, 사망 당시 몸무게가 42kg이었다는 사실에 모두가 새삼스레 충격에 빠지는 동안, 바이러스는 이미 병동에 퍼졌고 결국 그곳에 입원해있던 정신장애인 104명 중 102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그제야 정부는 이들을 다른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치료를 마친 95명 중 91명은 또 다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고 전해진다.


장면 2.

2020년 12월, 장애인거주시설 신아원은 관계자 3명과 거주인 2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뒤 코호트 격리조치 되었다. 그러나 코호트 격리 조치로 인해 감염 확산이 일어났고, 거주인 114명 중 56명이 감염되었다.[1]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7개 장애인권단체에서 이 사태를 두고 ‘긴급 탈시설’을 촉구하자 서울시는 탈시설 지원을 약속했지만, 약 3주 만에 “신아원 거주인에게 지원할 임시 거주공간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신아원 재입소가 불가피하다”고 하며 약속을 파기했다. 지역사회가 5인 이상 집합 금지 명령으로 유난할 때, 거주인 58명은 시설로 돌아가야 했다.


장애인거주시설 신아원 앞에서 활동가들이 사다리를 목에 걸고, 정문을 쇠사슬로 묶어 봉쇄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거주인들이 분산조치 사흘 만에 시설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였다. 일일 확진자가 1000여명에 육박하던 시기에 거주인들을 단체 시설로 돌려보낸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이지만, 활동가들이 저렇게 다급한 요청을 보내야 했던 이유는 무엇보다 이 사건이 하나의 커다란 반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2월, 입원 환자 대부분이 확진되며 감염에 대한 폐쇄병동의 취약함에 경종을 울렸던 청도대남병원의 환자들도 치료가 끝나자 너무나 ‘당연하게’ 시설로 돌아가야 했다. 격리되고 방치되어 맞이한 죽음, 살았다 하더라도 다시 시설로 돌아가야 하는 삶. 이러한 사태는 왜 반복되는 것일까.  


청도대남병원에서의 집단감염 이후, 보건복지부는 ‘장애인거주시설 코로나19 관련 대응 방안’에서 “지역사회 접근성이 낮고, 무연고자가 다수인 시설 이용자의 특성을 고려할 때 자가격리가 불가능한바, 감염자의 경우 별도의 코호트 격리 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침을 발표했다.[2] 코호트 격리는 감염자가 발생한 시설을 통째로 봉쇄하는 조치로, 감염원을 시설 내부에 봉쇄하면서 외부로의 확산을 막아보겠다는 시도다. 그러나 이 조치가 지워버리는 것은, 시설은 봉쇄되지 않아도 이미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청도대남병원 사망자의 사망 소식과 함께 그가 입원 중이었던 폐쇄병동의 열악함이 언론에 공개되자 사람들은 지역 사회로까지 감염이 퍼지지 않을까 유난이었지만, 걱정과 달리 바이러스는 인접한 요양병원이나 요양원, 방문자나 가족에게로 퍼져나가지 않았다. 폐쇄병동의 철문은 굳게 닫힌 채, 전 세계가 신종 감염병으로 부산스럽던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3] 


연구자 박정수는 코호트 격리의 실패를 선언하며 묻는다. 왜 어떤 이들은 폐쇄성과 밀집성이 집단 감염의 요인이라고 지적될 때에도 함께 갇혀있어야 했을까.[4] 이 선명한 역설에도 불구하고 코호트 격리가 집단 거주 시설에 대한 방역대책으로 운위되는 데에는 ‘건강, 비장애, 생산성’이라는 가치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건강, 비장애, 생산성이라는 기준에 맞춰 짜인 사회에서 장애인은 보호/관리의 대상으로 규정되어 시설에 갇혔다. 이들에게 재난은 시설의 모습으로 ‘이미’ 도래해 있었다. 이 재난 위에 또 다른 재난이 겹쳐지자 전염된 장애인이 있는 시설은 코호트화되었고,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로 활동지원서비스가 마비되어 시설 밖 장애인의 생존은 위태로워졌다.


코호트 격리의 중간 과정에 대한 통계가 없다는 사실[5]은 건강, 비장애, 생산성이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이 국가의 보호로부터 얼마나 비껴가는지 재차 확인시켜준다. 정부가 집단거주시설에 대한 코호트 격리 운운한지도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코호트 격리된 집단시설이 총 몇 곳인지, 그곳에서 발생한 환자가 몇 명인지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한다. 이 정보의 공백 사이로 지난해 12월 한 달간 코호트 격리된 전국 요양병원 14곳에서 확진자 996명이 발생했으며, 이 중 사망자는 99명이라는 사실만이 조용히 사그라든다. 이들이 갇혀서 어떤 위험을 감수해야 했는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그 굴곡들은 온종일 유난하게 업데이트되는 감염병 현황판 속에 기입되지 못한다.


생존투쟁의 장


장면 2.

2020년 12월, 장애인거주시설 신아원은 관계자 3명과 거주인 2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뒤 코호트 격리조치 되었다. 그러나 코호트 격리 조치로 인해 감염 확산이 일어났고, 거주인 114명 중 56명이 감염되었다.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 7개 장애인권단체에서 이 사태를 두고 ‘긴급 탈시설’을 촉구하자 서울시는 탈시설 지원을 약속했지만, 약 3주 만에 “신아원 거주인에게 지원할 임시 거주공간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신아원 재입소가 불가피하다”고 하며 약속을 파기했다. 지역사회가 5인 이상 집합 금지 명령으로 유난할 때, 거주인 58명은 시설로 돌아가야 했다.


장면 3.

지난 3월 구로구 콜센터에서는 근무하는 직원 216명(상담사는 180여명) 중 94명이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 한편 이 사태를 두고 콜센터 노동자들은 ‘터질 것이 터졌다’는 반응이다. 이들 노동자들은 앞뒤 간격이 50cm도 안 된 채 (50센치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일이백 명이 비좁게 붙어 일하는 그곳을 두고 “콜센터는 닭장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나마 집단감염 사태 이후로 고도로 밀집한(된) 노동환경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러한 사태 이후 감염된 상담사들이 “제대로 된 처우(치료, 보상, 유급휴가 처리 등) 및 적절한 노동환경 개선을 경험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 외 다른 콜센터들의 전반적인 노동환경 개선이 이루어졌는지 제대로 확인된 바 없다”[6]고 한다.


한편 재난을 이미 경험하고 있던 이들은 비단 장애인만이 아니다. 사태는 노동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장애인들은 시설 내부에 완벽하게 갇히지만 노동자들은 계속해서 집 밖으로 나가길 종용 받고 있다는 것일 터이다.


콜센터 노동자들은 아파도 쉴 수 없다. 상담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부분의 콜센터에선 아프다고 연차를 마음대로 쓸 수 없는 분위기다"라고 증언한다.[7] 하루에 몇 통의 전화에 응대했는지, 통화는 얼마나 했는지, 고객평가에서 몇 점을 받았는지가 치밀하게 기록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임금이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이들이 하루를 쉬기 위해서는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올 크고 작은 손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전 지구적인 코로나19의 유행에는 늘상 '뉴 노멀', '언택트'와 같은 수사가 따라붙는다. 그리고 이 수사들은 서로 대면하지 않음에도 지속적으로 굴러가는 경제에 대한 낙관과 고양감에 맞닿아 있다. 재난에 당면한 우리가 나름의 돌파구를 찾아가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돌파구를 바이러스가 불러온 새로운 세계라고 손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뉴 노멀’이나 ‘언택트’라는 말과 함께 공유되고 있는 낙관을 걷어내면, 모두가 타인과 유지해야 하는 물리적 거리감에 낯설어 할 때에도 그 간격을 벌릴 수 없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선명하게 보인다.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들도,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도 취약한 환경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을 피할 수 없었다. 이중의 재난 속에서 이들은 죽었고, 죽고 있다.


인류학자 서보경은 청도대남병원에서 죽어간 코로나19 사망자의 죽음을 숙고하며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 잠시 이를 받아 적어본다. “그의 적은 과연 코로나19라는 신종 감염병이었을까? 그는 사회적 배제와 고립이라는 긴 죽음의 순간들에서 무엇과 싸우고 있었을까?"[8] 이 질문이 짚어내듯, 사회적, 경제적으로 취약한 이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죽음의 자리로 밀려나고 있었다. 이들의 생명이 유지된다고 해서 살아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코로나 정국에서 '생명'과 '생존'의 의미는 확연하게 구분된다. 생명이 보건의료적 개입을 통해 보호 혹은 관장되는 삶이라면, 생존은 '삶의 영위'라는 문제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분할은 낯설지 않은데, 인간적 삶/동물적 생존의 구분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서양의 논자들에 의해 익히 말해져 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셸 푸코는 근대적 통치의 기술로서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 즉 생명권력biopower을 지목한 바 있다. 그는 이 권력이 인구라는 집단적 수준에서 생명의 보호와 증진을 겨냥한다고 역설한다. 생명권력이 “인구의 수, 발병률, 사망률, 출산율 등 통계학적 지표가 국가의 목표에 맞춰 최적화 되도록 조절”[9]한다는 것이다. 이는 바꾸어 적자면 권력이 인구적 차원의 ‘최적화’와 무관한 존재들은 ‘죽게 내버려’둘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생명과 생존의 분할은 국가 통치의 기저에 자리해 있다. 앞서 적은 질문, ‘생명이 유지된다고 해서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이러한 분할 위에서 던져지는 질문이다. 코로나19라는 위기 에서 국가는 생명에 대한 보호를 우선했다. ‘K-방역’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사망자 수로 그 ‘성공’을 전방위에 홍보할 동안, 누군가의 생존은 제대로 논해지지 못했다. 생명은 보장하되 생존은 각자도생의 몫으로 여전히 남겨두는 것, 이것이 코로나19가 드러내는 통치성의 본령이다.


하지만 지금 생명과 생존의 경계선을 문제 삼는 것은, 그것을 폐기할 수 있다거나 폐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별개다. 생명과 생존의 문제를 분할하는 시스템 속에서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예컨대 포털 사이트에 ‘생존권’ 혹은 ‘생존투쟁’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해보라. 화면에 뜨는 단어들을 대강 옮겨 적으면 이렇다; 전세버스 기사, 중소상인, 노래방 업주, 여행사, 영화계, 헬스장, 간호사, 민주노총. 문제는 생존이 눈앞의 과제로 던져진 이들은 한정된 자리에서 자신의 생존권을 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단적으로 헬스장 업주들이 실내체육시설의 제한적, 유동적 운영을 요청할 때 “2.5단계 이상에도 PC방은 운영하고, 식당, 마트 등은 밤 9시까지 영업 가능, 카페는 테이크 아웃이 허용, 편의점은 24시간 영업하고 식사와 음료를 먹을 수 있으며 도서관도 제한적으로 운영된다”[10]는 사실이 동원되었던 것처럼, 이 생존투쟁의 장에는 각각의 생계와 노동이 맞붙는 자리가 있다. 이 각투角鬪가 어떤 복잡하고 불편한 관계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지 생각할 때, 지금 우리가 “생존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사회, 생존이라는 절대적 명령 앞에 다른 모든 가치가 무시되는 사회의 등장을 목격하고 있다”[11]는 진단도 그리 틀려 보이지 않는다.


생계를 위한 이들의 싸움을 ‘밥그릇 지키기’라며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 ‘밥그릇 지키기’라는 말이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 그 토대를 질문해보려는 것이다. 이 충돌의 원인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이 충돌을 각자의 ‘밥그릇 지키기’로 의미화하는 논리의 회로는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이런 질문들을 안은 채 다음 장면들로 넘어가 본다.


또 다른 팬데믹


장면 3.

지난 3월 구로구 콜센터에서는 근무하는 직원 216명(상담사는 180여명) 중 94명이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 한편 이 사태를 두고 콜센터 노동자들은 ‘터질 것이 터졌다’는 반응이다. 이들 노동자들은 앞뒤 간격이 50cm도 안 된 채 일이백 명이 비좁게 붙어 일하는 그곳을 두고 “콜센터는 닭장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나마 집단감염 사태 이후로 고도로 밀집한 노동환경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지만, 이러한 사태 이후 감염된 상담사들이 “제대로 된 처우(치료, 보상, 유급휴가 처리 등) 및 적절한 노동환경 개선을 경험했는지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 외 다른 콜센터들의 전반적인 노동환경 개선이 이루어졌는지 제대로 확인된 바 없다”고 한다.


장면 4.

동물복지형 양계장으로 알려진 화성시 산안마을에서는 37년 동안 조류독감이 발생한 적 없다. 그러나 12월 22일, 인근 농가(1.8km)에서 조류독감이 발생하자 방역당국은 산안마을의 모든 비감염 닭을 예방 차원에서 살처분할 것을 명령했다. 주민들과 동물복지 단체의 강력한 반대에도 결국 2월 19일에 살처분은 집행되었다. 살처분된 닭들을 실어가는 트럭 앞에서 마을 주민들과 활동가들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닭들의 생명 또한 우리와 다르지 않기에”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서있었다.


‘콜센터는 닭장이다’, ‘닭들의 생명 또한 우리와 다르지 않기에’라는 문구를 나란히 두고 읽는 것은 어떤 경험인가. 전자는 구로구 콜센터 집단감염 이후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서비스일반노조 콜센터지부가 주최한 기자회견에서 들려온 한 콜센터 노동자의 발언이다. 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일해야만 하는 노동환경을 지적하기 위해 경유한 ‘닭장’은 콜센터의 물리적인 여건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감시, 통제의 폭력까지를 유비한다. '닭장'은 이들이 노동해야 했던 환경이 얼마나 ‘비인간’적이었는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인 셈이다.


후자는 조류독감이 발생한 농가로부터 1.8km 떨어져 있었다는 이유로 살처분된 닭들의 시체를 실은 트럭 앞에서 산안마을 주민들과 동물권 단체 활동가들이 들고 있던 슬로건이다. 이때 ‘닭들의 생명 또한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표현은 공장식 축산이라는 감염병의 뇌관 속에서 인간보다 빈번히 팬데믹에 직면하는 동물들의 생존권을 국가가 보호하길 요청하는 수사이다.


콜센터 노동자는 닭이 아니라는 말, 닭도 인간과 다름없다는 말. 서로 경합하는 두 개의 슬로건을 유심히 살펴보자. 둘은 어디에서 겹쳐지고, 어디에서 갈리는가. 즉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 차이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 거듭 생각한다면, 이 질문의 답은 '인간'의 자리에 놓여 있다. 인간의 지위를 인정받으려는 이들의 호소는 ‘동물’의 처지에 위치되지 않으려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여기서 콜센터 노동자가 인간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강조되는 반면에, 인간도 동물이라는 사실이 은폐되는 것도, 연구자 송다금이 지적했듯 '인간'의 범주가 생존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때문일 것이다.[12] 


여기에는 어떤 희생이나 적대가 ‘무한 루프’처럼 작동하고 있다.[13]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배제하는지, 그 암묵적인 구획에 대한 폭로가 또 다른 존재를 배제하면서 이루어진다. ‘콜센터는 닭장이다’가 열악한 노동 환경을 효과적으로 폭로할 때에도 인간과 동물 사이의 위계가 반복된다. 이 무한 루프, 그러니까 소위 ‘밥그릇 싸움’, 혹은 한정된 장에서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갈등의 (재)생산의 기저에는 국가-자본주의가 있다. 자본·권력의 끊임없는 생산·유지를 위해 ‘인간(남성)’, ‘건강’, ‘비장애’라는 기준을 설정하고 그에 부합하지 않는 존재들을 배제하는 것. 거기에서 국가-자본주의는 멈추지 않고 이 사태의 위에서 우리를 기만적으로 굽어보며 경쟁할 것을 명령한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미 발터 벤야민은 파시즘 폭주 전야에 그것이 “새로이 생겨난 무산계급화한 대중을 이 대중이 폐지하고자 하는 소유관계는 조금도 건드리지 않은 채 조직하려 하고 있다”[14]고 적었다. 지금이나 그가 살던 시절이나 갈등의 배후-“소유관계”-는 드러내지 않으면서 갈등을 부추기는 권력은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새롭지 않기에 더욱 끈질기게 묻게 된다. 생존에 내몰린 사람들이,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는 사람들이, 타인의 생계를 지목하지 않고 혹은 자신은 동물이 아님을 호소하지 않고 서로 만날 방법은 없을까. 이 희생과 적대 너머를 상상하기 위해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연결되어 있는,


코로나19가 열어젖힌 생존투쟁에서 자꾸만 누적되는 희생과 적대는 인간/비인간이 서로의 존재감을 발견하면서도 곧바로 현실의 한계가 맞물리는 지점이다. 이때 현실의 한계란 예컨대, 생존권에 대한 콜센터 노동자들의 요청을 가로막고 들리지 않게 했던 무엇, 그리하여 ‘콜센터는 닭장이다’라고 말해야만 비로소 들리게 만든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동물을 거치지 않고서는 폭력을 말할 수 없도록 강제하며, 심지어는 그것을 어떤 방관도 허락하지 않는 강력한 폭로로 만드는 복잡한 현실 말이다.


이 복잡한 현실 앞에서 나는 일라이 클레어가 쓴 『망명과 자긍심』의 한 부분을 떠올린다. 다중 쟁점multi-issue 정치를 주장하는 일라이는 장애인권운동과 교도소인권운동이 실은 매우 유사한 권력의 구조를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적는다.  


“나는 장애 활동가에게 교도소 인권 활동가를 소개하고 싶다. 그리고 독방 감금과 강간, 사형수 수감 시설의 이야기를, 형사법 체계에 만연한 불의를, 아프리카와 라틴계 남성·여성·트랜스들trans people의 수감률이 충격적일 만큼 높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그리고 교도소 인권 활동가에게는 장애인 수용 시설, 장애인 공동생활 가정group home, 정신과 병동, 국영 병원의 이야기를, 방치와 징벌, 강간, 권력 남용에 대한 이야기를, 장애인을 시설로 밀어 넣고 가두는 수많은 압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여러 공동체와 쟁점을 가로지르며 이어지는 대화-폭력, 격리, 강제 불임 시술, 생체 실험, 시설의 잔인함과 무관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고통스럽겠지만 지극히 중요할 것이다. 이러한 대화는 장애를 야기하는 동시에 장애인을 가두는 서로 맞물린 권력 구조를 폭로할 것이다.”[15]


그는 이 대화를 통해 장애인이면 장애인, 수감인이면 수감인만을 다루는 단일 쟁점single-issue 정치가 서로의 의제에 서로를 깊숙이 새겨 넣는 다중 쟁점의 정치로 나아갈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복잡한 억압의 총체를 효과적으로 폭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유사한 맥락에서 인문학자 신지영은 코로나19에 켜켜이 드리워져 있는 이중의 재난이 “'소수자’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교차되는 억압·배제 속에 놓인 ‘모두’의 환경”[16]이라고 적는다. ‘환경’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이, 이 세계를 이루는 복잡다단한 관계 속에서 나/우리의 행동은 너/그들에게 전해지고, 그것은 다시 나/우리에게 변화의 물결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우리가 서로 맞물린 권력의 구조, 혹은 하나의 환경 속에 놓여있다는 말은, 서로 간극을 벌려야 했던 시간 속에서도 우리가 얼마나 긴밀하게 삶의 조건을 공유하고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이 글을 쓰는 나는 비장애인이며, 팬데믹 와중에 노동자였던 적도 없고, 인간 동물이라 부를 수 있지만 비인간 동물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도록 한 것은 나 또한 이 희생과 적대의 연쇄에 강하게 연루되어 있다는 감각 때문일 것이다. 내가 집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고 있을 때마저도 시설, 콜센터, 그리고 양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채로 이 폭력의 구조 어딘가에 서 있다는 감각. 그것이 나로 하여금 무엇을 써야 하는지 모른 채로 컴퓨터 앞에 앉아 이 시간이 어떤 의미인가를 곱씹어 보게 만들었다고, 아니 그러지 않을 수 없게 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연결의 실감 속에서 차이는 적대나 반목을 넘어 대화를 요청하는 계기가 된다.


글을 열며 우리가 무엇을 통과해, 어디로 향해가고 있는지를 물었다. 갈수록 혼란스럽게 흘러가는 코로나19 정국에서 우리가 어디에 도달할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코로나19를 통과하며 한 가지 분명해진 것은, 우리가 아무리 타인과 거리를 벌리려 노력해도 결국 타인의 숨결을 느끼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서로가 이 “교차되는 억압·배제”에 어떻게 놓여있는지를 찬찬히 숙고하면서 변화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해방과 변혁이라는 말이 참 요원하게 들리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을 찾을 수 있다면, 이는 낱낱이 흩어져 있다는 의식이 아닌, 오로지 우리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다중 쟁점의 정치 속에서만 찾아질 것이다.


편집위원 물결 (eunbitmulgyeol@gmail.com)


[1] 1월 12일 기준.

[2]  이가연, “복지부, 장애인거주시설 코로나19 대응 방안으로 “코호트 격리하라””, 비마이너, 2020.02.24.

http://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14384

[3] 병원 측은 한 달 동안 출입이 없었다고 발표했다.

[4] 박정수, “코호트 격리는 실패했다”, 비마이너, 2021.01.08.

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0568

[5] 나경희, “현황 파악조차 되지 않는 요양병원 코호트 격리”, 시사IN, 2021.01.26.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797

[6] 김관욱, 「“과일 바구니, 식혜, 붉은진드기 그리고 벽”: 코로나19 사태 속 콜센터 상담사의 정동과 건강-어셈블리지」, 『한국 문화인류학』, 2020, 39-40쪽

[7] 이승훈, ““근무환경 닭장, 전염병에 취약할 수밖에”... 콜센터 노동자들의 한숨”, 민중의 소리, 2020.03.11. https://www.vop.co.kr/A00001474215.html

[8] 서보경, 「서둘러 떠나지 않는다면-코로나19와 아직 도래하지 않은 돌봄의 생명정치」, 『문학과 사회 하이픈』, 2020년 가을호, 33쪽.

[9] 정정훈, 「감금의 질서, 수용시설의 권력기술-형제복지원과 인권의 재맥락화」, 『도시인문학연구』, 2019, 118-119쪽.

[10] 국민청원, “코로나 시대, 실내체육시설도 제한적, 유동적 운영이 필요합니다.”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95180 

[11]  박이대승, 「예외상태의 정상화, 혹은 예외로서의 정상-팬데믹 이후의 법과 국가」, 『문학과 사회 하이픈』, 2020년 가을호, 42쪽

[12] 송다금, 「구조되지 못한 동물, 도착하지 못한 난민」, 『문학3』, 2019년 3호.

[13] 송다금, 위의 글.

[14]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 길, 2007, 147쪽

[15] 일라이 클레어, 『망명과 자긍심』, 현실문화, 2020, 30-31쪽

[16] 신지영, 「중첩된 재난과 팬데믹 연대-한일 장애 활동가 및 간호사 구술을 중심으로」, 『역사비평』, 2020, 122쪽



이전 01화 015B 14호 여는 글 및 목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