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의 의미
“밥 먹자~”
우아하게 차려입은 주인의 목소리에 와다다 강아지가 뛰어온다. 강아지는 사료를 보고 허겁지겁 맛있게 한 그릇을 비운다. TV에서만 볼 수 있는 판타지 같은 장면이다.
실제론 이렇다. TV 속 광고보다 더 예쁜 흰 그릇에 사료를 담아 전용 식탁에 내려놓으면 그때부터 예쁘지 않은 모습이 연출된다. 먹이려는 자와 안 먹겠다는 자의 치열한 기싸움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서 배고플 텐데 오늘도 넌 밥을 먹지 않는다. 분명 난 꼬르륵 소리도 들었던 것 같은데 밥 먹자는 말에 사뿐사뿐 다가와 식탁을 쓱 훑어보더니 그대로 되돌아간다. 더 맛있는 걸 달라는 분명한 의사 표시다.
밥을 하도 먹질 않아서 예전엔 고구마와 닭가슴살 등을 항상 사료에 섞어줬었는데 수의사 선생님이 간식도 줄이고 사료만 주라고 하셔서 요즘엔 사료만 주고 있다. 원래도 잘 안 먹었는데 사료만 주니까 당연히 밥을 더 안 먹는다.
“마루야” 이름을 불러도 넌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애타게 부르면 못 이기는 척 그냥 와서 먹어도 될 텐데 꼿꼿하게 자리를 지킨다.
다이어트를 하려면 어떤 운동보다 안 먹는 게 최고라고 하던데 네가 몸매를 유지하는 비결이 여기 있었다. 난 배고프면 뭐라도 주워 먹을 텐데 넌 배고파도 맛있는 걸 찾는 고상한 미식가 타입이다.
이럴 때 특단의 조치가 있다. 가짜 먹방을 하는 것. “누나가 먹는다”라는 말과 함께 아주 자연스럽게 뚝딱거리며 사료를 먹는 연기를 한다. ”아 맛있다“라는 추임새도 더해서.
관심도 없던 너는 내가 먹는다고 하니까 급하게 뛰어오더니 먹지 말라며 으르렁거린다. 내가 갖긴 그렇고 남 주긴 아깝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사람도 먹방을 보면 평소에 생각도 없던 배달 음식을 시키고 싶듯이 강아지도 식욕이 생기는 것 같다. 냠냠 거리며 먹는 척을 하는 내가 얄미운지 밥그릇을 머리로 감싸곤 조금씩 밥을 먹기 시작한다.
넌 절대로 빨리 먹지 않는다. 우아하게 한 알씩 한 알씩 맛을 보다가 입맛이 돋으면 한 입씩 천천히 오도독오도독 씹어먹는다. 씹어야지라고 생각하지만 항상 잘 씹지도 않고 삼켜버리는 나와 정반대다.
한바탕 소란 뒤에 깔끔하게 그릇을 비운다. 어차피 다 먹을 거면서 왜 그렇게 안 먹겠다고 투정을 부리는지 알 수 없다. 꼭 밥을 두고 경쟁을 해야지만 밥맛이 생기나 보다.
식사가 만족스러운지 혀로 입을 핥고선 날 쳐다보며 꼬리를 흔든다. 다 먹었으니 간식을 달라는 뜻이다. 안 주면 줄 때까지 쫓아다니며 꼬리를 흔든다. 이런 건 정말 정확하다. 빚을 진 적도 없는데 빚을 갚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간식을 주면 푹신한 방석으로 도도도 달려가 엎드린 뒤 두 손으로 잡고 야무지게 씹어 먹는다. 최근엔 간식 양을 줄여서 물고 달려가다가 다 먹어버리는 때도 많다. 그러면 넌 있었는데 없어진 간식에 의아하며 다시 돌아온다. 간식 준 적이 없다면서.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유를 이해할 순 없겠지만.
변해서 싫은 것은 하나 더 있을 거다. 매일 저녁 약을 먹어야 하는데 올리고당에 가루약을 섞어서 입안에 넣어주면 꿀떡 삼킨다. 약을 먹이려면 억지로 입을 벌려야 하는데 이 자세를 꽤 불편해한다. 이것 또한 어쩔 수 없다.
매일 같은 것을 먹어야 해서 질릴 수 있다는 걸 이해한다. 식탁에 여러 음식을 올려 두고 우리가 먹고 있으면 애절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함께 하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안다. 가끔 식탁 의자에 올라와서 그 의미를 표현하는 것도.
하지만 내 마음과 행동을 같게 할 순 없다. 그리고 그게 쉽진 않다.
어쩌면 어색해도 우리가 가짜 먹방을 계속하는 것이, 식사가 마칠 때까지 지켜봐야 네가 그릇을 비우는 이유가 서로 마주 보며 같이 밥을 먹고 싶단 마음이지 않았을까.
너도 우리집 식구니까.
식구(食口):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