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가, 들어왔다.
전라남도에 왔다. 한껏 긴장해 꼬부린 몸을 간간이 휴게소에서 펴가며 네 시간 여를 달렸다. 멀리 왔다는 반증처럼 가로등도 없는 서해안 고속도로 어디쯤 좌우로 드넓게 확 트인 시야에, 아, 평야에 왔구나.
산등성이에 갇혀 오밀조밀하던 곳에서 벗어나 온 사방이 트인 곳을 내달리니 시야에 가뭇한 사람 사는 땅과 약간 흐릿한 먹물을 풀어놓은 듯한 하늘의 경계가 모호하게 보였다.
오른쪽 골반이 약간 뻐근하도록 힘을 줘 액셀을 밟았다. 연신 우리가 언제 이렇게 함께 멀리 온 적이 있었나 하며 새삼 감회가 묻어나는 찬탄을 날리는 엄마가 보조석 손잡이를 꽉 움켜잡으시길래 속으로 배시시 웃으며 나 혼자 가는 길이 아닌데. 하며 속도를 조금 줄였다.
바람이 많이 부니 20% 감속 운행하라는 싸인이 뜬다. 바람을 내쳐 맞으며 달려, 달려 남쪽으로, 남쪽으로. 목포가 100km 전방, 곧 엄마가 나고 자라신 영광, 함평, 작은 동네가 나타날 것이다.
인터체인지를 통과해서 동네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엄마가 어릴 적 학교에서 자주 소풍을 다니셨다는 절이 근방에 있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곳에서 가볼 만한 유적들을 소개하는 큰 현판이었다. 우리 엄마가 학창 시절 간식거리를 싸가지고 소풍을 다니시던 곳이 이젠 '이곳에서 제일 볼만한 곳이니 들르려거든 여기에 한 번 가보시오'라고 하는 곳이 되었다. 일상이 화석처럼 굳어 역사가 되었다.
굽이 굽이 지나가면서 안내 이정표에 나오는 익숙한 이름들에 엄마가 호들갑을 떠신다.
"여기가 옛날에 우리 학교 아이들이 꽤나 많이 살던 곳이었어."
"여기서부터 거기까지 학교를 다녔다고요?"
"그땐 걸어 다녔지."
그때가 도무지 언제인지 나는 피부로 체감할 수가 없다. 세대가 세대를 넘어 풍등이 바람에 떠밀려 오듯이 내 마음속에 둥- 하고 날아 들어온다.
어제 출발 전 예약해 놓은 숙소에 도착했는데, 엄마가 연신,
"여기는 밀재야, 밀재.
요쯔음에 언덕배기가 여기 밖엔 없지.
내가 밀재에 있는 모텔에서 자게 되다니."
하고 연신 소녀처럼 까르르하신다.
꼭 어제만 같은 오늘, 새벽. 꿀잠을 자고 일찍 깨 이렇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으니, 마치 노르웨이의 숲에 있을 법한 가지가 새하얗게 손을 뻗은 앙상한 나무들이 참 멋지다.
어제, 그제만 해도 내가 함평, 밀재라는 곳에서 잠에 깰 줄 알았을까. 뒤돌아 주무시는 엄마가 깨지 않게 작은 조명을 켜고 이 순간을 기록하고 있으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참 재미있는 일이다.
연속성 없는 일련의 하루하루가 쌓여 맥락이 되고, 그 맥락에 주제가 드러나는 순간이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도통 아무것도 모르겠는 이 순간을 즐겨 만끽하니,
내 좁은 가슴 안으로 야트막한 언덕 아래가 보이는 탁 트인 전경이 물밀듯 밀려오는 듯하다.
작은 탁자에 앉아 웅크린 내 안에 남도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