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다니다 보면 누구가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마다 일에 대한 권태기가 온다고 한다. 물론 나 또한 그 누구나 중 하나이다. 때마침 다니던 회사는 반도체 장비에서 주 업종을 카메라 모듈(Module)쪽으로 변경하려고 신규 사업에 투자를 하는 시기였고, 당시 많은 회사들이 휴대폰용 카메라 모듈(Module)에 투자를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때 마음속에 있는 것은 두가지였다. 전혀 다른 일을 한번 해보자는 것과 반도체 장비 중 후공정 분야에서 좀더 큰 규모였던 H반도체로 이직하는 것. 그렇지만 H반도체로의 이직은 어려운 일이다. 나는 SY테크 당시만 해도 소속된 부서만 생산관리였지, 주로 하던 일은 ERP 시스템 구축과 개선, 그리고 싱가폴에 있던 계열사의 지원 관리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추가로 한가지 더 했던 일은 내부에 있던 작은 계열사의 현금 출납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렇다. 이 글을 읽는 혹자는 그럴 것이다. 아니 어떻게 전혀 연관성이 없는 그런 일을 한사람이 담당 할 수 있냐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여러 군대의 회사를 이직하면서도 각 회사에 입사한지 반년도 안되어 회사의 상장 전 ERP 시스템을 구축하는 프로젝트의 담당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여러가지 일을 4년 ~ 5년간 해 보았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이다. 이런 어지러운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지길 시작할 무렵
반도체 장비 업종에 겨울이 찾아온다. (Winter is Coming: 유명한 HBO사의 드라마에서도 나오고, 모건스텐리에서 반도체 업종을 두고 한말이 유명해지기도 했던 문장이기도 하다.)
무엇인가 선택을 해야 할 때 다른 일을 해보기로 했다. 몇 년간 제조업에서 일을 하다 보니 이번에는
신촌의 대학거리의 작은 기업에서 일을 해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고, SY테크의 ERP 구축 시 알고 지낸 개발자에게 연락을 해보기로 했다. 직원을 뽑는다는 말도 들었고, 1년간 같이 일을 해서 서로를 조금은 안다는 생각에 문의를 해 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같이 일하자는 연락이 왔고, 인천의 공단을 떠라 신촌의 작은 만화방으로 향하게 되었다.
새롭게 일하게 된 회사는 신간 만화가 출간되면 만화에 대한 커버 이미지 및 내용을 요약해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해당 데이터베이스의 정보를 만화 대여점에 제공하여 수익을 발생하는 회사였다.
이 회사의 주주는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만화책 출판을 담당하던 서울문화사, 시공사, 학산문화사 등이 주요 주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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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탈(逸脫): 정하여진 영역 또는 본디의 목적이나 길, 사상, 규범, 조직 따위로부터 빠져 벗어남. [국어사전]
너무 놀라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놀랄 일은 조금 있으면 다시 나올 테니 말이다. 제조업에서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정보제공 서비스업에서 무엇을 한단 말인가? 담당했던 일은 크게 두가지 인데 한가지는 구축된 데이터베이스의 테스터 (프로그램에 오류가 없는지 사용 테스트를 하는 것)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자금 운영 담당이면서 사장님을 보좌해서 가끔 주요 주주와 미팅을 하러 다니는 일이 주어진 업무였다.
주간, 월간 현금 흐름을 작성해서 입금될 돈과 나가야 할 돈이 문제가 없는지 점검하고, 지출을 하는 것이
업무이다 보니 은행에서 직원을 월급이 나가도록 관리도 해야 했고, 남아있는 현금으로 몇 달간 문제없이
회사를 운영 할 수 있는지? 필요하다면 주주들과 협의 추가 출자를 받아야 하는지 등을 검토해서 사장님께 보고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었냐고 묻는 다면 SY테크에서 내부에 있던 작은 계열사의 현금 출납을 담당했던 것과 ERP를 구축하며, 방송통신대학의 경영학과를 다니며, 회계에 대한 기초를 다시 배웠다는 게 어쩌면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잠시만, 아직 위에서 말한 놀라운 일은 조금 더 있다.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렇게 8명쯤 일하는 작은 사무실은 만화방에 차려진 사무실이다. 사방이 만화책이고, 매일 나오는 신간 만화를 매일 받아오는 회사이다. 그야말로 만화 천국이다. 그리고 매일 회사 구내 식당에서 먹던 밥과는 달리
신촌의 여기저기를 다니며 여러 음식을 점심에 먹는 즐거움 또한 너무나 재미 있었던 시간 이였다.
그!러!나! 모든 일이 늘 즐거울 수만 있겠는가? 신간만화 정보를 구축해서 데이터베이스 정보 제공 및 판매로 매출을 올리고 있었지만,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구축한 데이터베이스 판매 시 만화정보센터와 관련해서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주요 주주들의 추가 출자가 지연되면서 내부 프로그램 개발이 지연되는 문제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아마도 이때가 내가 합류해서 일하기 시작한지 5개월쯤 되었던 시기이다.
회사는 결국 돈의 흐름이 막히면 망하게 된다. 당장에 다음달 그리고 또 다음달 직원들 월급까지 문제가 생기는 심각한 상황이 되었을 때 사장님 그리고 나를 불어주었던 개발자 그리고 나 이렇게 세사람은 모여서 잠시 이야기를 했다.
다른 사람들은 기존 사장님이 투자 받지 않고 작게 할 때부터 같이 일한 직원이라 남기로 하고, 최근 투자 받으며 합류한 나와 개발자가 살길을 찾아 가는 것으로 협의가 끝났다.
개발자는 다시 ERP 시스템 개발 회사로 가고, 그럼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