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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썅맘이 되기까지

by 지푸라기

나는 이제 40대가 된 k장녀이다. 어릴 때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고 있다며 확신했고, 그 확신이 내게 오기傲气를 한껏 솟아오르게 했는데 이것이 돌아보니 내 인생에서 '신의 한 수'였다. 결핍이 탄생시킨 남들이 우러러보는 대단한 성공까진 아니더라도 소소하게 내 스스로 목표한 것들을 이루는 성공은 분명 있었다. 13평 남짓 아파트에서 연탄불 피우며-지옥 같은 집구석에서-사는 동안 단 한 번도 그 연기에 내 고귀한 생명을 내어 줄 생각을 해 보지 않았던 것은 분명 신께서 불쌍한 날 보호하신 것임이 틀림없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싶어 부럽다는 말을 그 누구에게도 뱉지 않았던 독한 년이 나 장녀언이다. 심지어 어쩌다 친구에게 편지 쓰다 나도 모르게 적어놓고는 흠칫 놀라 종이가 갈기갈기 찢어질 때까지 지우개로 박박 지웠던 기억. 그래도 남겨진 그 자국은 아마 내 마음이지 않았을까. 이런 오기를 난 참 다행스럽게도 공부에 부렸다. 국민학교 시절 IQ검사 후 지극히 보통인 내 머리를 갖고 난 노력으로 승부를 볼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참으로 일찍이도 깨달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쉬는 시간에 문제집 펴고 공부했었고, 점심시간 전 미리 점심을 까먹고 점심시간에 재수 없게 엉덩이 붙이고 안 뗀 녀언이 바로 나였다. 그렇다고 이성에게 눈길 한 번 안 주고 삐딱선 안 타봤냐, 또 그건 아니다.


어쨌든 이런 독함으로 내 인생 첫 성공을 얻었다. 인 서울 이름 있는 대학 들어가면 축하받을 일이었던 당시 기준, 내가 고3 때 목표했던 대학인 한국외대 중국어과 편입은 어쨌든 내 오기로 오롯이 얻은 처음 결실이었다.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 인생이 남들이 죄다 선택하는 빠른 직선길보다 조금 때론 더디게 둘러가는 길로 가게 된 것이.




그렇게 신의 한 수인 줄로만 알았던 결핍은 내가 결혼이라는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할 때 어찌나 냉택 없게 내 판단력을 흐리던지, 난 이 사실을 결혼 후 핫어미가 되고 처음 겪어지는 일들을 맞닥뜨리면서야 알게 되었다. 빼박캔트, 망우보뢰, 일단 이런 거라 해 두자. 그것들은 지금 떠올려 볼 때 여전히 가슴 아픈 일들, 반대로 웃음 짓게 되는 일들 또는 웃음까진 아니더라도 적어도 가슴 시리지 않다면 좋은 일들로 구분된다.


내 이름의 상相을 중국어로 발음하면 씨앙, 좀 더 센 호흡으로 내뱉으면 결국 '썅'에 이르게 되는데, 내가 극도로 화날 때 유일하게 내뱉는 욕이라 너무 반가운 거다. 내 기분대로 입혀지는 다른 느낌에 내 웃음과 슬픔을 담아 보았다. 상미 vs. 썅미, 특히 후자에 아무리 꾹꾹 눌러 담아봐도 여전히 삐져나오는 슬픔은 아쉽지만, 다시 꺼내진 슬픔을 보며 눈물이 나지 않는 단단한 마음은 너무나 반갑고, 감사하다. 얼룩덜룩이 아닌 알록달록한 것들은 내 삶에 단순한 경험 그 이상일 테니, 난 그렇게 맞이한 40대가 누구보다 참으로 애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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