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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부리 임산부

by 지푸라기

신혼 1년을 즐기고, 아이를 갖기로 했다. 그러나 1년 되기 몇 개월 전부터 암암리에 임신 준비를 했던 것은 사랑이 넘쳐서인가 아니면 뒤로 호박씨 까는 거였나. 시험공부 밤새 하고도(심지어 국민학교 시험을) "너 시험공부 많이 했어?" 라이벌 그녀의 질문에 "아니." 쿨내 진동했던 학창 시절 장녀언처럼. 그때의 시험은 아마도 어르신들의 기대에 부응하느냐, 못하느냐였을 것이다. 짧은 기간 동안 매번 보지 못한 두 줄로 거의 광녀가 될 뻔했으나 거뜬한 척 양가의 축하를 받으며 난 엄마가 되었다.

멀리 배정받은 고등학교의 통학용 봉고 덕에 아이러니하게도 멀미로부터 겨우 해방됐다고 생각했었는데, 입덧은 그야말로 하루종일 매일을 언제 도착일지도 모를 차에 몸을 실은 느낌이었다.


멀미는 돌아오는 거야!


지속적으로 뿜어내는 구역질 때문인지 턱 밑 쪽이 붓기 시작했다. 거익태산이로다. 하필이면 아이의 중요 기관이 형성되어 가는 시기여서 우리는 신중해야 했고, 동네병원보다는 남동생이 근무하는 분당 서울대 진료를 선택했다. 정확한 병명은 없었으나 염증으로 보인다는 진단 결과와 함께 태아에게 영향이 갈 수 있어 항생제를 쓰지 않고 그저 처치를 늦추는 수밖에 없다 하셨다, 교수님께서. 뭐, 괜찮았고,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괜찮치 않아졌다. 속절없이 커지는 혹에 막무가내로 덤벼오는 우울함은 이내 내 정신 곳곳에 한 자리씩 꿰차버렸으니깐.




나는 어느새 '혹부리 임산부'가 되어 있었다.


보이지 않지만 생명을 위협하는 혹보다는 나은 거 아냐? 내 상황보다 안 좋은 상황을 비교하며 마음의 위안을 삼기에는 처음으로 닥친 시련을 시간에 의지한 채 꾹 살아내기에도 버거웠다. 머리를 묶는 것은 집에서나 가능한 일이었고, 자연스럽게 거울을 멀리 하게 됐다. 그냥 혹의 존재를 잊은 채, 그 누구도 어떤 방법으로든 내 최면을 어그러뜨릴 일 없는 나 홀로 집의 시간도 시작되었다. 솔직히, 신랑이 퇴근해 위로랍시고 던진 말들은 미안하지만 전혀 도움도 되지 않아 떠올려지지도 않고, 그가 내 혹에 어쩌다 눈길을 주기라도 하면 내 최면은 곧 깨지기 십상이었다. 누군가가 인생에서 처음 겪는 일로 힘들어한다면, 그 깊이와 너비는 누구도 감히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가까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짧게 힘내라는 위로면 충분하고, 그저 살아있는지만 확인해 준다면 아마 후자의 고마움은 기억되지 않을까 싶다. 신랑을 원망할 필요는 없고, 그 캄캄한 터널을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나온 나를 꽉 안아주고 싶을 뿐이다.


혹부리 영감님이 생각났다. 내가 40년을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던져보지 않았던 질문. '혹부리 영감님 혹도 처음에는 나처럼 시작되었을까?' '그 큰 혹을 자신의 몸으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경부 종물(목 부위에 염증으로 생긴 종기나 체내에 생기는 몽우리)은 일반적으로 2주의 약물 치료가 필요하고, 그것에 반응이 없다면 악성 종양 검사 후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 순간부터 혹부리 영감 전래동화에 등장하는 두 영감님 모두 내겐 리스펙트 그 자체이다.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나에게 혹이 달린 이상 내 눈에는 그들의 혹만 보일 수밖에 없더라. 이것이 현실이다.


이제 머리를 풀어도 정면에서 내 왼쪽 혹이 보일 정도로 부풀어 오를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 수백 번 되뇌어봤자 밖에서 마주치는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내려가 내 혹에 멈추면, 그때부터 난 세상 누구보다 비참한 정녀언이 된다. 나 외대 나온 여자야! 남들의 불쌍한 눈빛이 바뀔만한 내가 가진 카드를 내밀어 보고도 싶었다. 입덧도 없이 지나가는 임산부도 많던데 나는 왜 심한 입덧으로도 모자라 혹까지 달린 걸까?

찾아온 고난의 이유는 신 이외에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고난을 극복하고 나면 그것을 겪은 인간도 비로소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왜라는 따짐과 원망은 에너지 낭비일 뿐, 그 이유를 꼭 알아야겠다면 죽기 살기로 그 고난을 견디면 되는 것이다. 당시 내겐 그보다 더 간절히 안전하게 지켜내고 싶은 아이가 버티는 이유의 전부였다. 내 생명보다 더 귀히 여기는 생명을 위해 못할 건 없었다.


3개월의 긴 시간이 지나고 내 혹은 참 허무하게도 교수님께서 만든 작은 틈새로 한껏 품었던 고름을 내뿜으며 사라졌다. 펑 과 동시에 혹부리 임산부가 되었던 꿈에서 나도 같이 깨어났나 싶었지만, 내 경부에 남은 흉터는 꿈이 아니었다고 반짝인다. 성형외과에 가서 지워야 하나 싶으면서도 조심스럽게 묻는 사람들에게 자신 있게 동화 속 주인공이 되었던 사연으로 너스레 떠는 나를 계속 보고 싶기도 하다. 그렇다. 분명 엄마로서 처음 얻은 값진 승리였다. 인생의 모든 고난에는 이유가 있다는 말을 믿는다. 내가 자신이라 착각했던 오만에서 한 계단 내려올 수 있게 되었고-앞으로 몇 계단 더 내려와야 하는 줄은 몰랐지만, 아니, 끝이 없을 줄은-늘 신경 쓰던 주위 사람들의 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나다움도 장착했다. 훗날 아들에게 배신감을 느낄 날이 온다 하더라도 이 영광의 흉터를 무기 삼아 대적하진 말아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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