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자면, 40대인 나는 학창 시절 베프의 유무를 그 기준으로 뒀을 때 철저한 외톨이다. 나이가 들어 초중고등학교 시절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친구들과 만나 한판 수다를 떨고 싶은 순간이 찾아올 때면 혹은 sns상 누군가의 그런 사진들을 훔쳐볼 때면, 나는 어김없이 이 사건이 떠오른다.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 가장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내가 신혼집 컴퓨터 방에서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모니터를 앞에 두고 열폭하는 모습이다. 29살- 그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그득 담은 내 결혼 커트라인 30세를 1년 앞둔 해-나는 결혼을 했고, 지긋지긋하게 울며 겨자 먹기로 다니던 외국계 회사를 당당하게 때려치우고 그 당시 분명 한가로운 오전 시간을 뱃속의 아이와 함께 네이트온 단톡방에 기꺼이 내어주고 있었을 터였다. 중학교 친구들로 이루어진 모임의 나를 제외한 3명의 구성원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고향인 청주를 아직 벗어나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오는 나만 느끼는-그들은 내 얘기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알 수 있는-소외감은 무리에 속해 본 여자들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 생각된다. 예를 들면, 나만 빼고 그들끼리 이미 공유된 사사건건 앞에 매번 "그랬어?"라는 뻘쭘하고도 찜찜한 뒷북 담당과 매번 모임의 장소가 청주여서 쌓였던 서운함. 아마 이것들이 내 화를 증폭시킨 간접적인 원인들이지 않았을까.
내가 제일 먼저 결혼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하게 될 친구들이 있었던 상황 아래, 대한민국 여자들이라면 대부분 시댁으로부터 얼마나 도움(=돈)을 받고 하는 결혼인지 아닌지에 자신의 위치를-상승 혹은 하락-재정비하기 한창 바쁠 때였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 나는 이미 시댁에서 받은 돈 없이 신랑이 모았던 돈으로만 전셋집을 얻었고, 부족한 돈은 대출을 받아 출발!로 일단落 지었음에도 내 마음속에서는 일단增-일단이 증가한-사태가 발생했던 것임을 친구들 덕에 뒤늦게 깨달았다.
"시댁에서 집 사주신대. 대출받아 시작할까 봐 조마조마했잖아."
"어머, 잘 됐다!"
"축하해!"
"좋겠다...."
다들 자기들과 같은 제2차 신분상승에 합류한 것을 웃는 얼굴로 축하해 주었지만, 누가 봐도 딱 울상이 된 나는 그날의 태교 따윈 깔끔하게 포기했다.
"너도 시댁에 집 좀 사달라고 다시 얘기해 봐. 며느리가 뱃속에 손자도 품고 있는데, 이제 충분히 그럴 자격 있는 거 아냐?
오늘의 축하 대상자인 그 친구의 이 말이 신분상승이 뭐 별거냐 퉁친 내 마음을 순식간에 꺼내 바닥으로 내동댕이 쳤다. 일단, 내 시댁 재정상태가 다시 얘기해 봤자 일도 소용없을 만큼 좋지 않고, 그들은 처음부터 시댁에서 집 받을 자격이 되는 데 반해 난 뱃속에 손주를 품고도 그럴 자격이 안된다는 자괴감은 내가 그들보다 좋은 인서울 대학에 나와 돈 좀 더 벌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그들한테 나는 감히 비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이런 예상치 못한 비참한 감정을 피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그것이 특정 모임 속에서 기인되는 것이라면 끊어내는 것만이 내가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랬다.
"나 이 모임에서 그만 나가고 싶어..."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친구의 변명이라도 들어볼 걸 싶다. 어쩌면 그녀의 다그침은 대출받지 않고 제2의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자기들의 우월함을 으스대려 한다기보다는 내 처지가 진심으로 안타까워 건넨 말이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나 당시 난 아직 시댁으로 인해 내가 땅으로 꺼지는 것 같은 감정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밀어낸다고 밀어내지는 감정이 아니었음을 이후 일련의 시댁 사건들을 맞닥뜨리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시댁에 대한 내 본격적인 반감은 '시댁 때문에 중학교 친구 3명을 잃었다'라는 이 사건이 시초이다. 우리 집과 달리 결혼식 폐백 때 시댁 어른들께 받은 몇 만 원의 절값과 결혼식 후 시아버님으로부터 어떤 언질도 듣지 못한 채 남편에게 건네진 빈 축의금 봉투들이 아마도 그것의 깔려 있는 복선이었을 것이다.
... 이은정, 끝까지 나를 만류해 줘서 너무 고마웠다.
잘 살고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