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네 와이프야, 엄마야?

by 지푸라기

2011년 7월 28일. 내 삶의 처음이자 아직까지는 -장담컨대 출산은 더 이상 없을 예정이지만, 인생은 한 치 앞도 감히 내다볼 수 없으니 말을 아끼는 의미로-마지막 육아가 시작되었다. 분만하는 데 있어 평소 괄약근 조절에 나름 탁월함을 남몰래 인지하고 있었기에 힘조절에 있어서 한껏 두각을 드러냈으나,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의 무게 앞에서는 여느 산모들과 마찬가지로 '제발 끝내주세요'라며 그분께 누구보다 간절했음을 기억한다. 그날 오전부터 유도분만이 계획되어 있어서 시부모님께서 출산 때에 맞춰 발걸음을 해주셨고, 분만실로 시어머니께서만 잠깐 들어오셨다.


"수고했다. 그런데 애를 안 난 얼굴 같네. 병원비만 보탤게."


비록 진통온 후 2시간 내로 아이를 낳았지만, 내 몰골이 정말 평소와 차이가 없었을까. 같은 여자로서 여자의 몸으로 처음 느껴보는 고통임을 잘 아실 텐데. 내가 기억하는 그때 그분의 얼굴에 웃음기가 없었다. 손주를 보아 기쁜 표정은 그다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며느리로서 나름 도리를 한다고 하고 있었던 터라-주기적인 안부전화와 때에 맞는 현금과 함께 시댁방문-설마 그 표정에 숨겨진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마음을 숨기고 있는 건 오직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병원비만 이라뇨...二段증가상태!





우리 올케를 포함한 내 주변 며느리들이 누린 시댁에서 마련해 준 조리원 생활을 나는 비록 누리진 못해 속상했지만, 내 아들이 꽤나 예민한 덕분에 다행히 그 감정에 길게 놀아날 틈이 없었다. 지나가는 아이를 보기만 해도 눈찡긋 코 찡긋 해대는 남편과 달리 난 아이에게 그다지 눈길을 오래 주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내 아이는 확실히 달랐다. 심지어 그를 향한 나를 기꺼이 내어줄 수 있을 만큼의 사랑을 태어나서 처음 느꼈다.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듯싶다. 아이가 점점 커가면서 내 삶의 포커스가 배우자에게 점점 옮겨가는 과도기적 현 상황에서 분명히 보이는 것은, 그 사랑은 내가 배우자를 선택할 때 처음으로 느꼈어야 하는 감정이어야 했다. 몇 년도 아니고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이라면 이성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필수조건인데, 난 도대체가 내 긴 삶의 고작 8년 연애가 뭐가 대수라고 이성적인 눈을 뜨지 못하고 情의 노예가 된 걸까. 누가 뼛속까지 한국인 아니랄까 봐. 결혼 14년 차. 이젠 정이라면 좀 많이 지겹다.


출산하고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 흔한 산모 도우미 한 번을 쓰지 않고, 친정엄마께서 기꺼이 내어주신 친정에서의 한 달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외지에서 나 홀로 육아를 1년여 가까이하다 보니 우울감이 엄습해 왔다. 거기에 신랑의 혹독한 대기업 대리생활이 더해졌다. 지금의 삼성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 며칠을 꼴딱 새는 야근이 다반사여서 나는 나대로 신랑은 신랑대로 각자 휘몰아치는 생활 속에 허둥대며 버티기 바빴다. 그 속에서 아이에게 닥치는 갑작스러운 일들-열이 난다거나 한눈 판 사이 아이가 침대에서 떨어진다거나 밤새 칭얼댄다거나 또 토를 하거나-을 혼자 처리하려다 서러움에 울면서 신랑에게 전화해 버럭버럭 고함을 쳐 댔던 장면들은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그 주체가 신랑이었던 기억은 없다. 지금보다 젊은 30대였을지라도 그도 처음 놓인 삶의 페이지였을 텐데 사랑하는 아이의 엄마로서의 절규가 애처로워서였을까. 지금 생각해도 일에 있어 그의 한결같은 성실함과 묵묵함은 참으로 칭찬할 만하다. 어쨌든, 육아에서 남편의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상황은 큰 축복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댁의 주기적인 방문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어려워졌다. 특히, 며느리로서 웃는 목소리로 아이의 상황을 전하며 의무감으로 연기해야만 할 수 있는 시부모님께 드리는 안부전화의 지속여부에 난 회의적인 태도를 갖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시부모님께서는 본격적으로 내가 마음에 안 드셨던 모양이다. 아니, 시어머니께서는.


"쟤야, 나야!"


그래도 아들에게 이 말은 아니지 않았나요, 어머님?



keyword
이전 03화그 친구와 절교해야 내가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