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상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메시지들만의 교통은 꽤나 위험하다. 소싯적 이별통보나 친구들에게 껄끄러운 말을 해야 할 때마다 툭하면 메시지를 보내 버리는 비겁한 나였기에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용감하고 깔끔하게 통화 버튼을 누르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특히 그 누군가와 지속적인 관계 유지를 원한다면 더더군다나 내가 먼저 나서서 해야 할 일이다.
Episode 3
아들의 일 년 잔치를 치르고도 나는 여전히 백일의 기적을 맛보지 못했다. 소리에 극도로 예민하고 잠을 푹 못 자는 엄마를 닮아 우리 아들 삶이 좀 피곤할 텐데 어쩌나 안타까움은 잠시이고, 어느 순간 말도 못 하는 그의 몸짓을 달래느라 짜증이 목구멍까지 차 오를 때면 그를 향하는 내 몸뚱이에 자연스레 못된 힘이 실렸다. 남편이 대리생활을 버텨내며 틈틈이 육아와 살림을 도와주었지만, 오로지 아이만을 위해 반복되는 일상은 육퇴 후 마시는 시원한 맥주와 야식으로 버티기도 이젠 진절머리가 났다. 그나마 우리의 이 버거운 육아의 무게를 기꺼이 함께 들어주는 친정부모님이 계셔서 작은 숨통이 트였다. 외손자가 보고 싶고 걱정되서라기보다는 -우리 가족에 친손자가 태어나니 사뭇 다른, 나조차 처음 보는 그들 눈빛의 깊이와 발걸음의 속도는 딸로서 참 많이도 서운했던- 딸이 힘들까 싶어 그 마음의 양만큼을 입에 넣어 줄 좋은 것들로 꾹꾹 눌러 담아 나를 찾아오셨다. 아들 생일에 수수팥떡을 직접 해먹이겠다고 설쳐대는 딸을 찾아와 우리 엄마는 수수팥떡은 물론이고 내가 육아를 핑계로 마땅히 할 일을 버릴까 봐 남편 생일상까지 차려주시기까지 하셨다. 반면, 시댁은 어떠한가? 어머님의 단호한 한 마디가 잊히지 않는다.
"난 너네 애 절대 봐줄 생각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내 마음은 시댁에 전혀 곱지 않았다. 이후 내 남동생의 육아에 깊게 배려하고 관여하시는 우리 부모님을 보며 난 참 시댁 복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기들에게 있는 하나뿐인 친손주한테 어떻게 이런 대접을 할 수 있을까. 그 답을 찾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살 예민한 아들과 집이어도 쉽지 않은 하룻밤을 시댁에서 추석을 앞세워 억지로 보냈던 것은 신랑의 과욕이었다. 그날은 육아 우울증이 올락 말락 하는 내 정신 타이밍에 불을 끼얹었던 하루였다.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시댁에서 나올 때 내 기분은 이미 저 바닥이었다. 기운 빠진 모양새를 카톡 프로필 내 상태 메시지에 그대로 적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시누이 카톡 프로필 대화명이 바뀌었다.
'그러니깐 네가 잘해야지'
여자의 육감으로 그녀는 분명 시댁의 '시'자도 들어가 있지 않은 내 혼잣말에 대답한 것이 틀림없다. 그때, 그녀에게 그간 쌓였던 증오에 찬 내 눈이 희번덕이면서 어느새 내 손가락은 뭐라 뭐라 맞받아치는 글자-물질적 도움-들을 날려대고 있었다. 이거였구나. 내가 당시 가장 서운했던 것은 마침 친정에서 이사 때 보태 준 몇 천만 원, 내 아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안겨주시던 선물들이 시댁에서는 돌반지 이외에는 나오지 않았다는 현실이었나 보다. 당신들이나 나한테 잘해 주고 그런 말이나 하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개 당장 카톡 메시지 내리라고 해! 그리고 다신 나한테 연락하지 마, 너희!"
남편 폰에 불호령이 떨어지자 그는 매우 당황하였고, 그녀와 통화를 시도했지만 수신거부를 당하였다. 나도 순간 뭐에 홀린 듯 적은 내 메시지를 그녀의 요구대로 지우고, 그녀의 번호를 수십 번 눌러댔지만 나 역시 실패했다. 얼른 이성을 찾고, 그녀와 통화로 오해를 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녀에게 장문의 글을 남겨 내가 흥분해 남긴 글자들에 사과하는 동시에 그녀의 섣부른 행동-나와 확인절차 없이 시댁얘기로 넘겨짚으며 나를 먼저 공격한-도 지적했다. 그러자 그날 밤까지 남편 폰에 들어온 그녀의 도 넘은 메시지들은 내게 그와 사는 한 평생 떠올려 질 상처를 남겨주었다.
"싸가지 없이 어디다 지적질이야!
"우리 집에 지금 아빠, 엄마까지 다 모여서 개 얘기했고, 결론은 매형까지 다들 개 싫대."
"우린 다신 보지 말자, 너나 개 데리고 잘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