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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동은 날 위한 선택

by 지푸라기

나는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있다. 좋은 말로 포장하면 결핍. 결핍은 양면성을 지닌다. 부족함으로부터 생기는 고통을 성장동력으로 삼아 나 자신을 발전시킬 수도 있고, 반대로 부족함을 메꾸는 데에 급급한 데서 오는 부작용을 경험할 수도 있다. 첫 장에서 얘기했듯이 난 당시 가정폭력이 있던 우리 집을 탈출하고자 그 수단으로 선택했던 '공부'에 부단히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목표한 것들을 성취했지만, 아버지와 반대로 오직 가정적인 가장의 모습만을 결혼 상대자의 조건으로 올려놓고 그 이외의 것들은 따지지도 묻지도 않았기에 결혼 후 시댁과의 갈등을 겪게 되었다.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순간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어머니 걱정을 해야만 했었다. 아버지는 내게 너무 무서운 존재였다. 다혈질 -지금은 늙으셔서 그 정도가 상당히 누그러졌지만- 이셔서 화를 뿜을 때의 압도되는 목소리부터가 두려움 그 자체인데, 혼자 숨죽여 듣다 이대로는 엄마가 죽을까 봐 뛰쳐나가 그녀를 때리는 아빠에게 제지를 할라치면 내가 맞을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해야 했다. 등교를 하고도 학교에서 있는 내내 엄마가 이대로 사라지게 될까 봐 쉬는 시간마다 학교 내 비치된 공중 전화기를 붙들고 엄마의 생사를 확인하느라 바빴다.


그 와중에 엇나가지 않고 나는 왜 공부를 했었을까? 일단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합격해 자취를 구실로 그 집구석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었고, 내 힘으로 되는 게 하나도 없던 당시 공부만은 노력을 배신하지 않아 줘서 고마운 대상이었다. 청소년 암흑기에 희망을 품고 몰두할 공부가 있어서 이런 불행한 가정 속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비행 청소년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선택이 내 인생에서 '신의 한 수'였다. 만약 삶이 우울하다고 나를 찾아오는 누군가가 있다면, 자신을 위한 '배움'에 아낌없이 투자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자신을 빛나게 해 줄 것이고, 암흑이 자신을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보호막이 되어 줄 것이다. 하교 후, 다행히 병원에 누워있는 엄마를 찾아가 그녀의 안전을 확인하고 내가 믿는 그분께 그저 '감사하다'며 눈물 흘렸던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시간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겐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후벼 파는 크나큰 아픔이다.


내 트라우마는 일상생활 중 어느 순간, 특히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불현듯 나를 덮쳤다. 아마도 청소년기 애용하였던 이동수단인 버스에서 혼자 멍 때리며 사색에 잠기는 말랑한 시간을 그놈이 노린 것이 아닐까. 심지어 대학교 때까지도 버스 창 밖을 보며 눈물을 훔치는 내 모습은 내겐 너무나 익숙했다. 다른 장면들은 희미해져 갔지만, 유독 아빠에게 목 졸림을 당하고 있던 엄마의 모습만이 꽤 선명하게 펼쳐지는데 그럴 때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심장이 조이는 듯한 통증을 느껴야만 했다. 그래도 부모님의 비참한 광경들을 남동생이 목도하지 못하게 하고 모르게 한 게 어디냐며, 그 고통을 오롯이 나만 느끼게 됐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k장녀를 위로했다. 내가 그에게 해 준 유일무이한 선물이었다. 그럼에도 왜 나는 그가 아빠의 폭력성을 닮았으면 어쩌나 쓸데없는 걱정을 했을까?




2대 1로 부당한 시댁싸움이 시작되면서 어김없이 그날도 퇴근한 남편과 나는 화를 폭발하고 있었다. 극한 감정으로 치닫자 마치 내가 광녀가 된 듯한 느낌이 들면서 물건을 보이는 대로 마구 집어던지고 싶은 아주 강한 충동이 올라왔고, 심지어 끝까지 내 감정을 어루만지지 않는 죽일 놈의 남편을 패고 싶은 충동까지 올라왔다. 피해자인 내가 순간의 실수로 가해자로 전세역전이 될까 참았지만, 돌 것 같은 고점의 감정은 아버지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려는 내 옷자락을 아들이 같이 울며불며 잡아당기자 나는 출처 모를 강한 힘으로 그 가벼운 생명체를 밀쳐 바닥에 붕 떠 나자빠지게 했다. 미친 거 아냐! 다친 곳이 있는지 아들을 살피는 남편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를 밀쳐낸 손을 떨리는 마음으로 펼쳐보니 '아빠를 닮은 건 바로 너였어'라는 글자가 차례로 새겨졌다.


'내가 당한 고통을 내 자식에게 혹은 누군가에게 절대 대물림 하지 않겠어'는 도의적인 자각에서 기인한다. 이를 이루려면 인간은 보통 내가 당한 고통을 타인에게 고스란히 주려는 강력한 습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능가하는 힘을 키우기 위해 수없이 자신을 쪼개고 단련시켜야 한다.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은 반대로 자신이 고통을 주게 될 수도 있는 지점들을 느낌으로 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멈추는 연습을 몇 천 번 몇 만 번 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당한 고통이 나에게서 끊기는 습성이 비로소 자리 잡게 된다. 그날부터 나는 무지하게 노력했다. 비록 시댁일로 내 강력한 습성을 알게 되었지만, 이후 육아의 과정이 짜증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순간을 연속적으로 맞닥뜨리는 여정이다 보니 하나뿐인 자식에게 나보다 나은 유년시절을 선물하기 위해 난 응당 그래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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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명의 자식도 벅찼다. 처음에는 남편을 포함한 시집 식구들이 용서가 안 돼서 -씨 집안에 손주를 더 안기는 것이 죽을 만큼 싫었다. 솔직히 시댁과 연을 끊고 살았던 몇 년이 내 마음 회복기였다. 내게 상처 준 사람들 억지로 봐야 나아질 것 하나 없다. 그렇게 우리 부부 사이에도 차츰 여유가 찾아왔지만, 여느 가족처럼 오로지 아이를 위해 둘째를 갖기에는 이후 내가 날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여기서 더한 노력은 내겐 무리라고 판단했다. 대신 그에게 제대로 된 사랑을 듬뿍 주겠다 다짐했지만, 아들의 외로움은 짙어져 가는 모양이다.


아들의 외로움이 커질수록 외동맘은 그를 향해 커지는 안쓰러움, 불쌍함과 싸워 이겨야 한다. 그것들에 자리를 내어줘서는 우리 아들 인생이 야리야리해질 판이니 내가 좀 더 단호히 마음 문단속을 한 후 아들의 독립심을 키우는데 집중해야 한다. 문제는 '남편은 남편이고 시집은 시집이지. 다들 아이 생각해 둘째 갖는 거다' 라며 내게 당연하듯 훈수를 두는 참견맘들이었다. 나중에는 그냥 몸이 좀 안 좋다고 둘러대는 게 그들의 입을 빨리 막아버리는 지름길이더라.


나는 자식을 위해 필요하다면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지만, 내 삶을 전부 내어 줄 생각은 없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살아왔는지는 말로도 글로도 다 품을 수 없는데, 감히 누가 함부로 둘째 얘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내 행복이 너무 소중한 엄마이기 전에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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