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골에서 왔다.
“좋아하는 디자이너 있니?”
대학 때 한 선배가 새내기였던 우리에게 물었다.
나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요.”라고 답했다.
“음, 그렇구나.”
그 선배는 내 대답이 뭔가 못마땅했는지 입꼬리를 비죽이더니 술을 한 잔 들이켰다. 그녀만큼 파격적이고 뚝심 있는 디자이너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잘못된 거지? 나는 눈을 껌벅거렸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선배는 나를 계몽이라도 시켜주겠다 듯 두어 마디 보탰다. 촌뜨기 취급을 하며 요새는 누가 잘 나간다, 컬렉션을 많이 보라나 뭐라나. 그러더니 대뜸 내 억양이 특이하다며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선배들의 학연, 지연 사냥이 또 시작됐다.
“저, 김천이여.”
"김천이 어디에여~ 김밥천국?”
김밥천국이라니. 이 허접한 농담에 다들 낄낄대고 웃었다. 십 년이 지나, 지금은 저 선배들의 얼굴도 어렴풋하지만 그날의 수치는 여전히 잊을 수가 없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게 점점 어려웠다. 사투리로 웃음을 살까 두려웠다. 식당에서 주문을 할 때도, 택시를 탈 때도 말끝을 흐렸다.
“김치찌개.. 주세.. 요..”
"어디.. 가 주세..요.."
김천에서는 '-요'가 아닌 '-여'로 말을 끝맺는데, 최대한 '-요'를 하기 위해 띄어서 대답했다. 그땐 누가 내 억양을 따라 하면 악의가 없단 걸 아는데도 기분이 안 좋았다.
대학에 와서 처음 받았던 과제가 압구정에 있는 갤러리아 백화점에 다녀오라는 거였다. 교수님 말씀을 들으며 '갤러리아? 어디지?' 메모를 하고 있는데, 친구들은 거길 갔다가 어딜 가자고 코스를 짜고 있었다. '여기 다들 알만한 백화점이었구나..' 나는 지도와 함께하는 생활이 낯설기만 했다.
처음 스무디킹에 따라갔던 날, 익숙하지 않은 메뉴들 중에 best라고 적혀 있던 메뉴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날이 잦아졌다. 대단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것들인데 생활 곳곳에서 모르는 것들이 생겨나니 속이 상했다. 설레기만 했던 대학 생활, 새로운 동네, 새로운 만남이 다 서글펐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 다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잘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엄마와의 백화점 쇼핑이 익숙했던 친구들 사이에서, 작은 시내에서 옷을 사 입던 나를 숨겼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친구들에게 나는 <미녀와 야수>와 <라이언 킹>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화를 하다 모르는 것이 생기면 화장실에 가서 검색을 하고 왔다. 친구들의 웃음소리를 “그게 뭐야?”, “나는 몰라”, “나는 그것도 모르는데..”라는 말들로 끊고 싶지 않았다.
주말이 되면 고향 친구들을 보러 떠났다. 새 친구들은 영문도 모른 채 함께하는 시간이 드물어졌다.
그 당시 나는 자주 체하고 탈이 났다. 평생 먹고 자라온 걸 부정하니 몸이 삐그덕거리기 시작했다. 첫끼로 샐러드나 샌드위치 같이 익히지 않은 걸 먹으면 더 심하게 체했다. 나는 콜라를 같이 마셔도 피자 한 조각에 입이 물리는데, 친구들은 피자 몇 조각을 아메리카노랑 먹는 게 아닌가.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조합이 너무 신기해서 친구들의 위장을 계속 체크했다.
"우아 피자를 먹는데 콜라를 안 마셔?"
"누구야, 피자가 막 커피에 둥둥 떠있지 않아?"
"느글거리지 않아?"
우린 수업이 끝나고 대학가로 걸어가며 점심 메뉴를 골랐다.
“오늘 뭐 먹을까?”
"ㅂ..ㅡ..압"
“브리또 먹자!”
밥..
매일 양식을 찾는 친구들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사실 난 레스토랑에 가서도 감자 그라탕을 한 숟갈 떠먹으며, 아~ 찐 감자에 설탕 한 스푼 넣어 슥슥 비벼 먹고 싶어 했다. ‘이걸 이 돈 내고 먹다니.. 이런 게 도시의 맛인 걸까.’ 자꾸만 체하는 촌스러운 몸뚱이를 한심하게 여기며 꽉 막힌 가슴을 두드렸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우리들 앞에 연둣빛 개구리가 나타났다. 비명까지 지르며 달아나는 친구들을 뒤따라가며 나도 무서운 척했다. 어릴 때 개구리 뒷다리 튀김을 즐겨 먹었단 걸 어떻게 말할 수 있었을까. 촌에서 자란 내가, 우리 엄마가, 우리 아빠가 미개한 걸까? 부끄러웠다.
어떤 20년을 살았길래 이렇게 달랐을까. 잘 놀고, 잘 먹고, 잘 공부하며 자랐다고 생각해왔는데 내가 해온 모든 게 초라해졌다. 부족해 보이는 내 모든 것에 원인을 찾아야 했다. 찾아서 탓하고 싶었다.
한날 바지를 만드는 수업에서 다리 길이를 쟀는데 내 다리가 유독 짧았다. 잘못 잰 것 같다고 두 번이나 다시 재는 친구들이 조금은 미웠다. 짜리 몽땅한 이 다리가 좌식 생활을 한 탓인 것 같았다.
“너희 혹시 집에서 입식 생활했어?”
다리가 긴 도시 친구들 모두가 신기하게 다 그랬다고 했다. 역시! 내 다리가 못 생긴 건 그 오래돼서 끈적이던 적갈색 밥상 때문이구나! 그렇게 나는 나를 잃어가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나의 모든 걸 부정했다.
그해 겨울.
“혜원아, 너 어디서 왔다고 했지?”
학생회 엠티로 김천에 가게 됐다. 스키장에 가기엔 돈이 부족했고 인적이 드문 곳에 가고 싶었는데 정보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깡촌에서 자랐다는 걸 누군가 떠올렸다.
친구들을 데려가도 되냐는 전화에 엄마는 흔쾌히 오라고 했다. 아빠는 딸내미 기를 살려주고 싶었는지,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통나무 별장을 빌려뒀다고 연락이 왔다. 고기랑 술도 사 오지 말라고 했다. 엄마는 친구들이 여기까지 와서 춥고 불편할까 봐 연신 별장에 들락거렸다고 한다. 엄마, 아빤 내가 자라난 이곳에서 친구들도 좋은 추억 하나 가져갔으면 했다.
그런데 나는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정작 무슨 생각을 했던가. 친구들이 오줌이 안 마려웠으면 했다. 별장에 가기 전, 인사를 하기 위해 들린 우리 집에서 화장실을 찾지 않길 바랐다. 낡은 우리 집 화장실을 보여주기 싫었다. 그러다 집에 도착했는데 집이 평소랑 달랐다. ‘아 엄마.. 애들 온다고 며칠을 쓸고 닦았구나’ 바로 알아챘다. 어찌나 미안하던지.. 나의 걱정과 달리 아이들은 경치에 감탄하느라, 우리 집 똥강아지 진순이랑 인사하느라 바빴다.
별장을 안내해준 아빠에게 "아버님 여기 진짜 최고예요~"하며 아빠를 춤추게 했고, 엄마가 가져다 놓은 형형색색의 꽃무늬 이불을 보곤 각자의 할머니 집을 떠올리며 금세 이곳에 정을 붙였다. 친구들은 별장의 안부를 묻는 엄마의 전화에 쫑알쫑알 껴들었다.
“감사해요 어머니~”
"쌈장이 찐이에요!"
“다 너무 맛있어요!”
“다행이네. 내일 일어나면 여와서 밥 먹고 가라.”
“네~~”
다음 날, 바닥에 둘러앉아 엄마가 해준 김치찌개에 밥을 두 그릇씩 복스럽게 먹었다. 친구들의 소란스러움이 왠지 모르게 든든하고 고마웠다.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나눈 대화들은 나의 일 년 치 서러움을 날려 보냈다.
“혜원아, 네가 집에 다녀오면 사뭇 밝아지는 이유를 알겠어.”
“언제더라.. M이 본가에 간다는 너한테 <인스타그램에 힐링하러 간다고 올라오겠네>했었잖아. 비꼬는 것처럼. 내가 생각하기엔 걔가 이해조차 할 수 없었던 것 같아.”
“맞아. 동네 사람들이 언제 내려왔냐고 반겨주고, 학교는 재밌냐고 안부를 물어주는 그런 경험들. 한 번도 못해봤을 거야. 걔한텐 집이 너랑은 다른 공간인 거지.”
“나 무슨 면, 무슨 리 이런데 처음 와 봤잖아. 차멀미도 처음 해보고. 꼬불꼬불~~ 즐거웠다, 김천. 일박 이일 찍고 가는 것 같아.”
“집 앞엔 천이 흐르고~ 집 뒤엔 산이 있고~ 이런 거 아무나 경험 못하지!"
우리 정말 친구가 될 수 있겠구나. 아 내가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니구나. 아니, 미운 오리 새끼여도 괜찮은 거구나. 알게 됐다. 다르다는 건 특별한 거란 걸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흔히 쓰이는 의미의 ‘촌스럽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세련된 사람들한테는 세련되다고 하지, 도시스럽다고 말하진 않는다. 어딘가 어설프거나 엉성하거나 이상하다 여기는 거에 촌스럽다고 말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촌(村)이 도시보다 기준에 못 미치는 걸까?
누구나 알법한 것을 모르는 사람한테 “그것도 몰라? 촌스럽게”하며 혼을 내듯 쓰기도 한다. 웃긴 건 시골에서도 서울 사람들이 뭘 모르면 “으휴, 서울촌놈”이라고 한다. 왠지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보다 우위에 있는 느낌이다.
20살의 어린 나는 촌스럽다는 말을 듣게 될까 봐, 그 단어 안에 갇힐까 봐 나를 숨겼다. 촌스러운 게 뭐냐고 싸우지 못할 나였기에 혼자 속앓이를 했다.
촌스럽다는 말을 다시 정의하고 싶다.
촌스럽다.
많은 이들이 고즈넉한 풍경, 여유, 정, 순수함 이런 걸 떠올리려나. 뻥 뚫린 풍경 속에서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는 건 시골의 가장 큰 장점은 맞다. 여유는 글쎄. 고향에 내려가 어르신들을 지켜보면 할 일이 넘쳐 하루가 모자란데 그걸 굳이 드러내지 않으신다. 바쁘다는 말 대신 묵묵히 할 수 있는 데까지 하실 뿐이다. 그래서 여유로워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도시의 소음과 다를 뿐 시골의 삶도 치열하다.
시골 사람들이라고 다 정이 많고 순수해 보이는가? 물욕이 없을 것 같은가?
고스톱 한 번 같이 쳐보기를..
내가 배운 촌스러움은 볕이다. 누가 뭐라든 내리쬐는 것.
엄만 정말 촌스러운 사람이다. 보라색을 좋아해서 집에 비슷한 옷이 있건 말건 또 보라색 옷을 산다. 내가 서울에 올라온 뒤로는 온갖 종류의 즙과 채소들, 심지어 깨질지도 모를 달걀까지 보낸다. “냉장고에 다 안 들어가면 애들 좀 나눠 주.”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는다. 피해자 없는 저돌이다. 감사하다.
마치 장기하 노래 같다.
(knock knock)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창문에 대고 노랠 부를 그.
조목조목 설명한 인터뷰 같은 걸 안 찾아봐도 장기하의 노랫말은 말을 걸어와 머무른다.
촌스러운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우리 모두 좋아하는 것들에 꾸밈없이, 때론 뙤약볕처럼 다가가기를. 그럼 세상이 더 무르익지 않을까. 풍부하고 당도 높은 세상을 꿈꾼다.
나랑 씩씩하게 내리쬐어 볼래?
* 추천곡 : 장기하와 얼굴들 - 별거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