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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 :: 새로움은 경계에서 잉태한다

교만은 악이요 의심은 미덕일지니

by ordinaryjo Mar 17. 2025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유혹은 '교만(확신)'이다. 확신을 갖고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놈은 악에 빠진다.


* 스포 포함

<콘클라베>는 고상함의 탈을 쓴 비열한 정치 드라마다. "후보님 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에 '난가?'병에 들린 정치인, 자신의 위치가 어떤 덕망과 실력으로 만들어졌다고 착각하는 직장인 등... 스스로를 과신하는 자는 반드시 이 영화를 봐야한다. 교만이란 바이러스가 몸 안에 퍼지는 속도는 매우 빠르다. 겸손으로 고요해진 마음은, 누군가 톡하고 돌을 던지면 언제든 큰 파장을 일으킨다. 그리고 인간은 결국 제 몸안의 울림을 계시로 받아들인다. "역시 나 뿐이야...!"

"주님... 정녕 저입니까?"

로렌스의 설교는 <콘클라베>의 핵심이다. 로렌스는 무시무시한 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의심'의 중요성을 설파한다.(결국 자기도 빠져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예수의 말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진짜 신앙인가. 로렌스의 설교에서 나타나듯, 예수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끝까지 의심하는 자만이 신앙다운 신앙을 하는 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걸 '신앙'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본인의 목표나 신념, 관계, 모든 것에 대입 가능하다. 의심하는 자는 말씀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여 믿는게 아니라, 말씀 뒤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말씀을 던져보고 두들겨보는 자다. 대충 덮어놓고 믿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의심하고 뒤져가며 마음을 촘촘히 하는 자이다. 그래서 안주하는 자만이, 진심이 부족한 자만이, 확신한다. 오직 노력하고 고민하는 자만이 "내가 잘 가고 있는 걸까"라며 흔들리고 의심한다. 니체의 말마따나 "내면에 혼돈을 지니고 있는 자가 춤추는 별을 낳을 수 있다" 


왜 의심이 중요한가. 의심은 100%의 확신에 도달하지 못한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이 때, 의심은 마치 아킬레스(제노의 역설)마냥 영원히 이 100%에 도달할 수 없게 만드므로, 여엉-원히 자신의 부족분만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면 삶은 게임처럼 100%라고 띄워주는 계기판이 없으니까 말이다. 사실상 닿을 수 없는 100%를 위해 인간은 끝없이 스스로를 의심하며, 괴로워하며, 그래서 노력한다. 그렇게 의심하는 인간은 0.999999999999로 나아간다. (또, 0.99999999...는 수학적으로 1과 동일하다)

'의심'은 <콘클라베>의 주 메세지이긴 하지만, 결국 '경계'라는 테마 안의 한 꼭지다. 

내가 발견한 경계는 세 가지다. 앞서 말한 확신과 불확신의 경계, 세상과 교황청이라는 경계, 남성과 여성이라는 경계. 이 경계들에서는 늘 새로움이 탄생한다. 


콘클라베가 시작되면 추기경의 모든 전자기기를 압수되며 외부와 단절된다. 즉, 성당 안에서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외부의 소식'을 차단한 채 교황을 선출한다. 심지어, 바깥에서는 폭탄테러가 일어나고 있는데도 로렌스는 그 소식을 콘클라베 내부에 알리지 않는다. 근데 그게 정말 '결정에 옳은 영향을 주는' 규율인가.


콘클라베의 진행자(단장) 로렌스도 당연히 규율을 알고 있지만 고민한다. 왜냐면 '제대로 된 교황을 선출하자'는 규율만을 지켜서는 정작 '제대로 된 교황'을 선출할 수 없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까 말한 '의심'의 효과와 상통하는 부분이다. 규율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자는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본질을 생각하고 규율을 의심하는 자만이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결국 로렌스는 봉인을 깨고, 밀정을 보내 추기경들의 뒤를 캐는 규율을 어김으로써 트랑블레의 표 매수 비리를 파헤치고야 만다. 

"폭탄이나 맞아라 이 새끼들아" - 신

그럼 제대로 된 교황을 뽑는 건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가. 당연히 테데스코 추기경처럼 그저 전통과 규율을 지키기 위해 과거로 과거로- 더 회귀하는 일은 아니다. 추기경들이 전통과 변화 사이에서 표리부동하고 로렌스마저 교만에 빠졌을 때, 신이 말한다. "폭탄이나 맞아라. 이 새끼들아" 


폭탄에 교회의 지붕이 무너진다. 어두컴컴한 교회 안으로 빛이 들어오고 비로소 그들은 세상과 연결된다. 그러나, 대가리가 깨지거도 정신 못차린 테데스코가 여전히 큰 소리를 내자 베니테스 추기경이 메세지를 확실히 짚어준다. "당신이 세상을 아는가. 우리는 세상과 연결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추가로, 그럼 제대로 된 교황은 성인(聖人)이어야 할까. 그러니까, 한없이 너그러운 상태의 인물이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벨리니 추기경은 복도에서 이런 말을 한다. "이상에 도달하려고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교황은 인간이다. 신에게 제일 가까운 인간이다. 조지 오웰은 인간성에 대해 '삶에 의해 패배하고 깨질 준비를 하는 것'이라 했다. 제대로 된 교황은 그런 인간성이 가진 아픔을 공감하며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고상한 곳에서 속 좋은 말이나 내뱉어서는 좋은 교황이 될 수 없다. 그런면에서 베니테스가 적격일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사이,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존재를 고민해온 인물이니까. 교황은 성인을 뽑는게 아니라 인간과 신의 사이(경계)에서 고뇌하는 사람을 뽑아야 할지 모르겠다. 


예수의 말을 잘 따르는 교황은 필요없다. 예수처럼 사는 교황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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