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케인 해설 6
intro
실존주의 문학가 장-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페미니즘의 대모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현상학의 아이돌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이 세 사람이 창간한 것으로 유명한 «레 탕 모데르네Les Temps Modernes»라는 저널이 있습니다. ‘레 탕 모데르네’를 영어로 옮기면 모던 타임즈Modern Times입니다.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의 1936년작 <모던 타임즈>를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종종 현대現代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레 탕 모데르네»의 창간자인 사르트르, 보부아르, 메를로-퐁티 이 세 사람은 각각의 영역에서 손에 꼽히는 거인들인데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을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전설적인 영화비평가인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이 사르트르의 눈에 띄어 이 «레 탕 모데르네»에 글을 썼다고 합니다.
<시민 케인>이 프랑스에 공개된 건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되던 해인 1946년입니다. <시민 케인>은 1941년 작이지요. 널리 알려져있다시피 사르트르는 <시민 케인>을 아주 못마땅해했습니다. 영화가 뭔지 모른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반면 앙드레 바쟁은 사르트르와는 아주 다른 입장을 취합니다.
1 사르트르의 혹평 이후 재평가되기까지
앙드레 바쟁은 <시민 케인>에서 그동안의 체계를 따르지 않는 새로운 종류의 영화를 발견합니다. 이러한 논조로 강연도 하고 비평문-「시민 케인의 테크닉The Technique of Citizen Kane」-까지 쓰는데 이것이 당대 프랑스에서 <시민 케인>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이후 <시민 케인>은 현대 영화Modern Cinema의 출발점처럼 여겨지게 되지요. 이와 관련된 내용은 <시민 케인> 첫 화와 딥 포커스 편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미국에서는 해가 갈수록 <시민 케인>의 평판이 나빠져갔습니다. 미국에서 재평가되기 시작한 건 <시민 케인>이 처음 공개된 해로부터 15년이 지난, 1956년 이후부터입니다. 누벨바그 비평가들에게 영향을 받은 미국의 영화 비평가 앤드류 새리스Andrew Sarris가 «필름 컬쳐»에 기고한 「시민 케인: 아메리칸 바로크Citizen Kane: The American Baroque」라는 제호의 비평문에 의해 <시민 케인>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56년 무렵에 <시민 케인>이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기 시작했고, 오손 웰스가 브로드웨이에서 <리어왕>을 공연하는 시기에 맞춰 <시민 케인>이 재개봉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는 <시민 케인>의 명성이 자리잡히기 시작한 건 이 이후부터 입니다. 1958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만국 박람회 엑스포58에서 위대한 영화를 선정하는 투표식 조사가 진행됩니다. 전세계적인 조사는 엑스포58에서 진행된 것이 사상 최초라고도 하는데요. 여기서 <시민 케인>이 9위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4년 뒤에 진행된 1962년의 사이트앤사운드Sight&Sound의 조사에서는 1위를 차지하게 됩니다. 사이트앤사운드의 조사는 10년마다 진행되는데 1962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50년 간의 조사에서 <시민 케인>이 1위를 수성합니다. 그리고 이 50년간의 1위 자리 수성이 <시민 케인>에게 ‘1등 영화’라는 색인을 붙여주었지요.
여기까지가 <시민 케인>이 재평가되고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는 명성을 얻기까지의 간략한 과정입니다. 그런데 궁금증이 드는 지점이 한 가지 있지요. 앙드레 바쟁과 장-폴 사르트르가 <시민 케인>에 대해 정반대의 입장을 보인다는 점입니다. 앙드레 바쟁은 <시민 케인>을 새로운 시도로 받아들였던 반면 장-폴 사르트르는 <시민 케인>의 시도가 프랑스인들에게는 뒤쳐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근본적으로 잘못된 영화라고 평가하지요. 한 작품을 두고 어떻게 이렇게 극단적인 입장 차이가 생겨날 수 있었을까요?
2 사르트르는 뒤쳐졌다고 하고 바쟁은 새롭다고 하는 이유
<시민 케인>이 전통적 면모와 혁신적 면모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시민 케인> 해설 시리즈를 봐오신 분들은 바로 이렇게 떠올리실 겁니다. 즉 <시민 케인>은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를 줄기로 이어져 온 전통적인 비극의 모티브를 취하면서도, 딥 포커스로 표상되는 새로운 종류의 데쿠파주, 즉 기존의 체계와는 다른 방식의 미장센 및 편집을 구사하는 작품입니다. 전자는 플롯 편에서, 후자는 딥 포커스 편에서 자세히 설명드렸지요. 하지만 사르트르가 <시민 케인>을 혹평하는 것과 관련하여 가장 자주 언급되는 논점은 <시민 케인>이 과거 시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점입니다.
이거 뭔가 이상하지요? 과거 시제가 펼쳐지는 게 왜 문제인 걸까요? 이게 그렇게 전면적인 혹평을 가할 만큼 잘못된 것일까요? 사르트르의 논점은 이렇습니다. 영화에서는 늘 현재가 펼쳐진다. 그런데 <시민 케인>은 과거 시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것은 영화에 관한 전적인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잘못된 영화라며 <시민 케인>을 전적으로 부정을 하는 것까지는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일반적인 상식에 비추어 봐서는 알기 어려운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르트르가 실존주의 문학가라는 맥락을 고려해야 합니다. 실존주의를 설명하자면 또 아주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겠지요? 일단은 어느 정도의 왜곡을 인정하기로 하고, <시민 케인>을 향한 사르트르의 주장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만큼만 간단히 짚어 보겠습니다. 실존주의에서는 나의 주관이 중요합니다. 나의 의식과 경험 그리고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날 이런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 것들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을 겁니다.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상식이지요. 따라서 실존주의를 이해하려면 왜 이러한 사조가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와 관련된 내용은 제쳐두겠습니다.
다시 사르트르의 논점으로 돌아가 볼까요. 사르트르는 <시민 케인>이 과거 시제를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점을 문제삼았습니다. 한편 실존주의에서는 나의 주관과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시민 케인>은 시점時點도, 시점視點도 불명확한 작품입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시민 케인> 시리즈 2편에서 말씀드린 바 있는데요. <시민 케인>은 과거 시제와 현재 시제가 혼재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인공도 불분명하고, 찰스 포스터 케인이라는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회고로써 제시됩니다. 즉 <시민 케인>은 실존주의적 입장에서는, 조금 풀어서 말하자면 주관의 측면에서는 들여다볼만한 지점이 아예 없는 작품인 것입니다. 게다가 문학적으로도 고전적인 구도를 띠고 있는 작품이고요. 그래서 사르트르가 그토록 전면적으로 비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톰슨이 케인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톰슨의 주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 이런 것들이 그려졌다면 사르트르의 평가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의구심이 남는 구석이 있습니다. 아무리 실존주의적 가치가 떨어지고, 고전적인 비극의 구도와 회고적 구성을 취했다고 하더라도, <시민 케인>의 접근법과 그것이 이뤄낸 성취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기에도 모던합니다. 퍼즐 모형에 기반한 <시민 케인>의 다면적 접근의 바탕에는 이러한 의식이 놓여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르트르는 이것을 외면했던 것일까요?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3 너와 나는 서로 다른 우주다
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여러분이 그분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꽤나 많은 분들이 이런 이유를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서. 이번에는 여러분이 아주 유명한 사람이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실제로 그런 분도 계시겠지요. 대중들은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할 겁니다. 마침 여러분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문화재단에서 촉망받는 한 드라마 작가에게 여러분의 삶을 소재로 한 작품을 의뢰합니다. 당연히 이 젊은 작가는 여러분이 조금 전에 떠올리신 그분을 인터뷰하게 되겠지요? 그분을 만난 작가는 인터뷰에서 여러분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듣게 될 겁니다. 여러분이 뭘 좋아했는지, 뭘 하고 싶어 했는지, 여러분이 힘겹게 보냈던 나날들, 한 걸음씩 성장해갈 때마다 겪었던 고비들 …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여러분이 경험해왔던 일들에 대해 듣게 될 겁니다. 작가는 이 인터뷰 이후에도 몇 사람을 더 만나야 할 겁니다. 수십 명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중에는 여러분과 반목했던 사람, 등돌린 연인이나 친구들도 있을 겁니다. 드디어 긴 시간동안 면밀히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여러분의 삶을 기초로 한 극본이 쓰이기 시작합니다. 집필이 시작된지 6개월 쯤 지나자 문화재단과 제작사의 협력이 이루어지는 듯하더니 초고가 나온 다음에는 넷플릭스 계약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제작이 추진되기 시작할 때 여러분은 그 시나리오를 보게 됩니다.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거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한 가지는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건 있는 그대로의 여러분의 삶은 아닐 겁니다. 극화됨으로써 그리고 대중의 흥미를 자극해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 일정 정도의 가공이 일어난다는 건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면밀히 조사했다 하더라도 이는 작가가 재구성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보다 더 심층적인 차원에는, 여러분과 조금이라도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을 남김없이 인터뷰하고, 여러분이 지나온 삶의 궤적을 초 단위로 추적하고, 심지어는 여러분을 연구실에 불러다 앉혀 뇌스캔까지 하더라도 여러분에 대해 완전히 아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놓여있습니다.
<시민 케인>은 이러한 의식을 밑바탕에 둔 작품입니다. ‘로즈버드’는 찰스 포스터 케인이라는 한 사람의 뿌리와 본질을 표상하는 사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톰슨은 여러 사람을 만나 케인의 전기傳記를 쌓아올렸지만 로즈버드가 무엇인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합니다. 갖은 노력을 다 해도 이 사람에 대해 아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대상을 향한 또는 존재를 향한 총체적 인식이 불가능하는 의식,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소외와 불안. 이것이 모더니즘적 심성 구조의 저변입니다. 이는 실존주의가 등장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시민 케인>의 퍼즐 모형은 총체적 인식의 불가능성을 상징합니다. 퍼즐 모형에 기반한 다면적 접근은 모더니즘적 상대론을 구현한 것이고요. 쉽게 말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퍼즐 조각들 같은 파편들뿐입니다. 게다가 퍼즐 조각을 다 가지는 것도, 더 나아가 퍼즐을 완성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현대의 많은 예술 작품들이 소외와 불안, 절대적 가치의 부재와 인식의 상대성, 좌절과 부유를 이야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실존주의는 이러한 좌절과 비관을 돌파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오면 우리는 사르트르의 비판을 한 층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민 케인>이 모더니즘적 상대론을 구현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한편으로는 고전주의적 관조의 태도를 보입니다. 사태를 한 발짝 물러서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은 반성적 물러섬보다는 즉각적 행동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주관을 따라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니 <시민 케인>이 얼마나 못마땅했겠습니까?
물론 실존적 행동주의를 기준으로 <시민 케인>을 향한 긍정과 부정을 일관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장 실존적 행동주의을 표방하는 누벨-바그의 슈퍼스타 장-뤽 고다르만 해도 앙드레 바쟁에 공감했었기 때문입니다. 실존주의자들 간에도 상대성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시민 케인>이 현대 영화의 출발점처럼 여겨지긴 하지만 오손 웰스가 현대 영화를 의식하고 그것을 시도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시민 케인>을 호평한 바쟁마저도 웰스와 다른 우주에 있었던 셈이지요.
outro
프랑스에 <시민 케인>이 공개될 무렵 프랑스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시민 케인>이 혁신적인 작품이냐, 아니냐에 관한 비평적 담론이 있었습니다. 이때 사르트르는 <시민 케인>을 향해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웰스가 지적인 건 알겠다. 하지만 <시민 케인>이 혁신적인 작품인 건 아니다. <시민 케인>에서 시도된 것들은 이미 있던 것들이다. 이건 맞는 말입니다. 딥 포커스 편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시민 케인>은 기술적으로 화려한 작품이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한 작품은 아닙니다. 또한 실존주의자인 사르트르는 자신은 <시민 케인>의 입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시민 케인>이 프랑스인들에게는 뒤쳐진 것이라고 말한 것이지요.
지금까지 <시민 케인>을 둘러싼 사건들, <시민 케인>이 어떤 점에서 혁신적인 작품인지 그리고 <시민 케인>의 아이디어가 되었던 모형 등 영화인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작품인 <시민 케인>을 몇 화에 걸쳐서 살펴보았습니다. 올해는 사이트앤사운드의 위대한 영화 순위가 발표되는 해인데요. 이런 줄세우기를 좋게만 볼 수는 없지만 영화팬들에게 큰 재미거리가 되어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재미거리를 즐기시는데 그리고 영화적 교양을 쌓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지난 2012년에는 <시민 케인>이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현기증Vertigo>에 1위 자리를 내주었는데요. 올해는 과연 어떤 작품이 1위를 차지할까요?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리스트에 오를 수 있을까요? 영화팬들에게는 귀추가 주목되는 해입니다.